Saṃsāra (윤회:輪回) (16, 完)
* * *
현관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곽용신은 위층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들었고, 경험적으로 산탄총 소리라는 것을 파악했다.
실내에서 산탄총의 파괴력은 엄청났다. 발사된 산탄은 좁은 복도에서 그 어느 탄약보다 효과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곽용신은 계속 현관문을 지키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그 자식은…… 괜찮을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당장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찍어 눌렀다.
구출은 두 사람의 임무였다. 곽용신에게는 다른 임무가 있었다.
당장 뛰어 올라가려는 충동을 억지로 참아 내고 있는 감각에 무언가가 잡혔다.
소리.
저택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저택 외부에서, 정확히는 보덴호가 있는 북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곽용신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에 집중했다. 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 형태도 점점 선명해졌다.
곽용신은 소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헬리콥터의 로터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곽용신은 놀라지 않았다. 헬리콥터를 호출한 당사자가 바로 곽용신이었으니까.
미국을 떠나기 직전에 CIA의 밀러 국장은 곽용신에게 노트북을 건네주었다.
휴랫팩커드가 CIA의 의뢰를 받아 특수 제작한 노트북에는 열네 종류의 보안 기술, CIA가 직접 제작하고 커스터마이징한 운영체제와 위성 통신용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노트북의 용도는 하나였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미국유럽사령부(United States European Command)와 통신을 하기 위한 용도였다.
몇 시간 전, 성당에서 작전 계획이 수립되었다.
구출은 한규호와 앤 챔버, 두 사람이 담당한다. 곽용신은 지원 요청을 하고, 베드로 신부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육상 탈출 수단을 준비하고 저택 밖에서 대기한다.
그런 단순한 계획이었다.
계획이 수립된 후, 곽용신은 건네받은 지 반년 만에 처음으로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부팅을 끝낸 노트북은 자동으로 미국유럽사령부 상황실과 연결되었고, 곽용신은 키보드를 두드려 위치 좌표와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22시 10분, 수송용 헬리콥터, 응급 구조 요원.
밀러 국장은 노트북에 입력된 공중 수송 지원 요청은 바로 미국유럽사령부 상황실에 전달되고, 곧바로, 미국유럽사령부 산하 미공군기지인 람슈타인 기지(Ramstein Air Base)에서 헬리콥터가 날아올 것이라고 했다.
곽용신은 그런 밀러 국장의 말에 따라 지원 요청을 보냈지만,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기대하지 않겠다는 방어기재가 작용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이라고 해도, 타국의 영공에서 함부로 군용기를 운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곽용신은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도 아닌 독일, 스위스에서. 평생을 정보 세계에서 살아온 곽용신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반신반의했던 곽용신의 귀에 헬리콥터 로터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곽용신은 북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미친…… 양키 놈들. 진짜로 왔네…….”
그러고는 등에 지고 있던 배낭에서 길쭉한 막대를 꺼내 들고는 저택 앞마당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한 곽용신은 손에 들고 있던 막대의 뚜껑을 열고 달려 있는 끈을 잡아당겼다.
흔히 홍염(紅焰)이라고 불리는, Ikaros社에서 제작한 신호용 연막탄이 빨갛다 못해 하얗게 빛나는 1만 5천 칸델라(cd)의 불꽃을 힘차게 뿜어 올렸다.
* * *
완을 확보했다는 앤의 외침이 들렸지만, 한규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 얀 베르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얀 베르그만도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북한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처럼, 한규호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기 위해 다가오던 그때처럼, 감정 없는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얀 베르그만을 바라보는 한규호의 눈에는 그날 이후, 그의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던 분노가 터져 나오는 홍염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얀 베르그만이었다.
“오랜만이군.”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얀 베르그만을 노려볼 뿐이었다.
“흔적을 잘 숨겼더군.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군,”
얀 베르그만이 다시 말했다.
침묵하고 있던 한규호의 입이 열렸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시선이 향하는 얀 베르그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데리고 나가.”
앤 챔버는 한규호의 그 말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의 말대로, 완을 데리고 나가기 위해 완을 안고 있는 두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완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한규호의 등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규, 어서. 여기서…….”
완을 설득하기 위해 앤이 말을 했지만, 그 말은 완의 말에 의해 끊겨 버렸다.
“들었어요.”
완의 말은 한규호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죽으면, 당신도 죽는다고. 그렇게 말하더군요. 사실인가요?”
완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 말투 안에는 깊은 슬픔이 진하게 담겨 있었다.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 없는 한규호의 등에서 완은 얀 베르그만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완을 지켜보던 앤은 저택 밖에서 들려오는 헬리콥터 소리를 들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당장 이 저택을 빠져나가야 했다.
앤은 염동력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가 염동력을 사용하면, 완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완이 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앤, 나를 지켜 줄 수 있어?”
완이 말했다.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동안, 날 지켜 줄 수 있어?”
슬픔이 가득 담겨 있는 완의 눈이 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완은 작게 미소 지은 후, 다시 앞을 지키고 있는 한규호의 등에 시선을 주었다.
“윤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규호 당신이 저 사람의 윤회를 끊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완이 다시 한규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윤회라는 것을 믿어 본 적 없고, 다시 태어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믿어 보고 싶어요.”
앤은 완을, 완은 한규호의 등을, 한규호는 얀 베르그만을, 얀 베르그만은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바라보는 대상은 달랐지만, 서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완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갈게요. 만약 다음 생에서 만나지 못한다면, 그다음 생에. 그다음 생에도 못 만난다면, 그다음 생에. 수백 번, 수천 번이라도 다시 태어나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그때, 나를 알아봐 줘요.”
“……그래.”
한규호가 말했다.
“당신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죠.”
“……그래.”
“약속해 줄 수 있나요?”
“……그래. 약속해.”
완은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규호의 등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체온이, 그의 온기가, 그의 심장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완에게 전해졌다.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싶어요.”
완이 말했다.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완은 그가 부탁을 들어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만나더라도, 절대로 엇갈리지 않도록.”
한규호의 등에서 다시 한번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갈 뿐이었다.
한규호가 한 발 걸어 나가자, 손바닥에 닿아 있던 한규호의 등이, 체온이, 온기가, 박동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완은 여전히 손을 들어 올린 채로, 한규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한 발 걸어 나간 한규호는 서재 책상에 놓여 있는 나이프, 편지 봉투를 개봉할 때 사용하는 칼을 집어 들었다.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한규호가 원하는 것을 이뤄 주기에는 충분했다.
칼을 집어 드는 것을 본 얀 베르그만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랜 삶의 마지막 장면으로 나쁘지 않군.”
그렇게 말한 얀 베르그만은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이제 끝을 내도록 하지.”
한규호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러고는 손에 든 칼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린 칼을 얀 베르그만의 심장이 위치한 부위에 겨냥했다.
그리고 다시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모든 준비 자세를 끝낸 한규호는 작게, 하지만 완이 확실히 들을 수 있게 말했다.
“행복했어. 당신을 만나서.”
그러고는 있는 힘껏 얀 베르그만의 심장으로 팔을 뻗었다.
* * *
한규호를 감싸고 있는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위험한 상황에서 경고처럼 찾아오는 직감이 다시 한규호를 찾아왔다.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언제나 위급한 순간에 그의 목숨을 살려 왔던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 경고를 무시했다. 처음으로 직감의 경고를 무시했다.
힘을 더욱 가해 칼날을 찔러 들어갔다.
편지 개봉용 나이프의 뭉뚝한 날이 얀 베르그만의 가슴에 닿았다.
날카롭지 않은 칼날이었지만, 피부를 가르고, 근막과 흉근을 뚫고, 갈비뼈 사이 공간을 지나 심장에 닿았다.
한규호는 칼날을 타고 전해지는 심장박동을 느꼈다.
근육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지는 심장박동이 아닌, 심장에 닿은 칼날을 통해 직접 전해지는 박동이었다.
그 박동을 확인한 한규호는 조금 더 힘을 주어 칼날을 밀어 넣었다.
칼날은 2200년 동안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은 얀 베르그만의 심근을 가르고 들어갔다.
칼날이 들어가자 심장은 더욱 요동쳤다.
마지 주인의 의지와는 달리, 심장은 아직 멈추기 싫다는 듯, 진동 주기를 더욱 좁혔다.
하지만 한순간이었다. 요동치던 심장박동은 다시 느려지기 시작했고, 점점 그 진동 폭을 넓혀 갔다.
얀 베르그만도, 그리고 자신도, 이제는 살지 못한다는 확신이 손끝을 타고 그의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렇게 확신한 순간, 한규호는 마지막으로 완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규호는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완을 보기 위해서.
봐 두기 위해서.
다음 생에, 아니면 그다음 생에.
수천 번을 죽고, 수만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완을 기억해 두기 위해.
한규호는 고개를 돌렸다.
한규호의 시야에 완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한 손을 앞으로 뻗고 있는 모습에 완이 보였다.
슬픔, 안타까움, 괴로움을 가득 담고 있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완의 눈이 보였다.
완의 눈을 본 그 순간, 한규호의 손에서 느껴지던 얀 베르그만의 심장박동이 멈추었다.
그리고 완의 눈을 마지막으로, 한규호의 의식은 화면이 꺼지듯 꺼져 버렸다.
...... * * *
완은 한규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에서 편지를 개봉할 때 사용하는 칼을 집어 드는 모습을.
얀 베르그만에게 한 발 더 다가가는 모습을.
칼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손을 앞으로 뻗은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한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행복했어. 당신을 만나서.”
한규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팔이 빠른 속도로 앞으로 뻗어 나갔다.
그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얀 베르그만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완은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의 모습을 눈에, 기억에, 마음에, 영혼에 담아 두고 싶었다.
하지만 완은 한규호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다.
얀 베르그만의 심장박동이 멈추고, 한규호의 의식이 화면처럼 꺼지는 그 순간에.
완은 머릿속에 문장이 떠올랐다.
-눈앞에서 반려자(伴侶者)가 사망하는 것을 목도(目睹)하게 되면…….
Saṃsāra (윤회:輪回)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