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82화 (382/386)

Saṃsāra (윤회:輪回) (15)

밤 10시.

서울에서라면 아직 밤을 즐기는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 들어차 있을 시간이었지만, 스위스의 밤 10시는 마치 어둠에 잠식당해 있었다.

유령의 도시처럼, 사람은커녕, 차도 다니지 않는 장크트갈렌의 한적한 시골 도로를 SUV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은 곽용신이었다.

곽용신은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시골 도로를 전조등 하나에 의지해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가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차를 몰아가던 곽용신의 눈에, 고풍스러운 철제 대문이 눈에 보였다.

“들어간다!”

곽용신은 그렇게 외치고는 액셀을 밟고 있는 오른발을 더욱 힘주어 밟았다.

빠르게 달려가던 차량이 굉음을 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앤 챔버는 재빨리 손잡이를 두 손을 잡았다.

하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는 한규호는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빠르게 접근해 오는 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쾅’ 하는 충격음과 함께, 외부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한 장벽보다는 저택 앞마당과 외부를 구분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대문이 차량에 의해 강제로 열렸다.

대문을 뚫고 저택 내부로 들어간 차량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넓은 앞마당을 가로지르는 진입로를 따라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저택 현관 앞까지 속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바로 현관 앞 계단 20여 미터 앞에 도달했을 때, 곽용신은 있는 힘껏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였다.

타이어가 노면과 마찰하는 고주파 음이 강하게 울리고, 차량이 멈추었다.

“괜찮아?”

차량을 멈추고 자세를 잡은 곽용신이 재빨리 뒷좌석을 돌아보며 외쳤다.

두 손으로 손잡이를 꽉 잡고 있던 앤 챔버가 그런 곽용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한규호는 이미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차에서 몸을 날린 한규호는 재빨리 방향을 꺾어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분명히 대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자동차가 긴급 제동하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현관 너머에서는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한규호는 현관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네 명.

현관문 너머에 있는 네 명이 미처 반응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안에서 불청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 한규호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그에게는 상관없었다.

가장 먼저 현관문 앞에 도착한 한규호가 현관문을 열기 위해 자물쇠 부분을 걷어차려고 하는 그 순간, 뒤에서 앤 챔버의 외침이 들려왔다.

“잠깐만요!”

어느새 차에서 내린 앤 챔버가 한규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제가 앞장설게요!”

그 말과 동시에 한규호의 몸이 묶였다.

앤 챔버가 자신이 가진 염동력으로 한규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버린 것이다.

한규호가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한규호와 현관문 사이에 선 앤이 가볍게 손짓을 하는 것과 동시에 두꺼운 원목으로 만들어진 현관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커다란 샹들리에를 중심으로 펼쳐진 거대한 홀과 홀 여기저기에 있는 기둥과 가구 뒤에 엄폐하고 있던 경비원들의 모습이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아주 잘 훈련받은 군인처럼,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권총 총구를 현관 쪽으로 겨누었고 빠르게 발사했다.

하지만 그들이 쏜 총알은 두 사람에게 닿지 못했다. 앤 챔버의 염동력에 의해, 완전보호능력에 의해서 총알의 궤도가 바뀌었다.

경비원들은 자신들이 발사한 초탄이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제압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동시에, 자신들이 발사한 총알이 표적을 맞히지 못한 것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표적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 경비원들이 두 번째 사격을 위해 방아쇠에 걸려 있는 손가락에 힘을 주려던 찰나, 앤 챔버의 염동력이 다시 한번 작용했다.

손가락을 포함해 그들의 온몸이 굳어 버렸고, 동시에 한규호의 몸을 구속하던 염동력이 풀렸다.

신체의 자유를 되찾은 한규호는 다시 몸을 앞으로 날렸고, 가장 가까운 경비원에게 달려들었다.

앤 챔버의 염동력에 의해 제압당한 경비원들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로, 속수무책으로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채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홀에 있던 경비원 네 명을 제압한 한규호는 감각을 확대했다. 그리고 지상층에 아직 몇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규호는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그런 그의 뒤를 앤 챔버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방문을 열고,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 대상이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상관하지 않고, 앤 챔버가 염동력으로 구속하고, 한규호가 제압했다.

두 사람이 지상층을 정리하는 사이에 한발 늦게 현관으로 진입한 곽용신은 경비원이 사용하던 권총을 회수한 후, 홀을 중심으로 사주경계에 들어갔다.

마치, 오랜 시간 합을 맞춰 온 팀처럼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에 지상층을 점거한 한규호와 앤은 계단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앤 챔버는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1층으로 뛰어 오르려 했다. 하지만 한규호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아 세운 다음 말했다.

“내가 먼저 간다.”

그렇게 앤 챔버를 제지한 한규호는 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리고 1층 복도로 막 접어든 한규호에게 직감이 찾아왔다.

언제나 그가 위험에 처하기 직전에 경고처럼 찾아오는 직감이었다.

직감이 찾아오면서 신경이 가속화되었다. 동시에 주변의 시간이 느려졌다.

그렇게 느려진 시간 속에서, 한규호는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냥하는 중년 여자를 확인했다.

하얀색의 셔츠, 검은색의 긴 치마, 마치 고용인임을 주장하는 듯한 복장을 하고 있는 중년 여성이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의 손에 들린 고전적 형태의 더블 배럴 산탄총의 총구도 슬로모션처럼 느린 속도로 한규호를 향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바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왼손으로 총신을 잡아 위로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충격을 받은 여자의 몸이 뒤로 밀려나면서 반작용으로 방아쇠가 당겨졌다.

하지만 위로 향한 총구에서 터져 나온 산탄은 한규호는 물론, 뒤를 따라 1층으로 올라온 앤 챔버에게도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중년 여성이 쓰러지기도 전에 한규호는 다시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복도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장년 남자를 발견했다.

장년 남자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한규호는 장년 남자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재빨리 장년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의 턱에 빠르고 날카로운 훅을 먹여 버렸다.

빠각.

턱뼈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 내렸다.

턱을 맞고 뇌진탕으로 쓰러진 남자는 크레디트 에우로파의 법무 이사 바이스 되블린이었지만, 한규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바뀔 것은 없었다.

이미 한규호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30초도 안 되는 시간에 순식간에 두 사람을 제압하고, 더 이상의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한규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앤 챔버에게 수신호로 기다리라고 지시를 내린 다음, 감각을 확대했다.

그의 감각에 두 사람이 잡혔다.

10여 미터 떨어진 위치에 두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느낌을 주는 기척이었다.

인원과 위치를 확인한 한규호는 앤 챔버에게 따라오라는 수신호를 보낸 후, 기척이 나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찼다.

* * *

완은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 음의 정체를 파악했다.

노면과 타이어가 강하게 마찰하는 고주파 음, 빠르게 달려오던 차량이 급제동할 때 발생하는 소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소음이었겠지만, 완은 그 고주파 음이 그녀에게 전달되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그가 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완은 다시 시선을 얀 베르그만 쪽으로 향했다.

얀 베르그만은 마치, 밖에서 소음 같은 것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무표정한 시선으로 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홍콩에서 꾸던 꿈을 계속 이어 가게 해 주겠다고 했나요?”

완은 그런 얀 베르그만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규호,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완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발밑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오던 충격음, 고주파 음과는 다른 종류의 소리였다.

총이 발사될 때 나는 소리였다.

발밑에서 총소리가 들렸지만, 완과 얀 베르그만은 여전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내가 아닌 그 누구라 하더라도. 그는 변수(variable)가 아닌 상수(Constant)이니까.”

“……상수?”

“절대로 변하지 않는 상수. 규호는 그런 사람이에요.”

발밑에서 더 이상의 총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완은 걱정하지 않았다.

한규호는 상수다. 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원하는 것을 해낼 것이다. 이곳으로 올 것이다.

“상수, 상수라…….”

얀 베르그만이 완의 말을 다시 읊조렸다.

“당신이 원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거에요.”

“그가 죽어도 괜찮다는 의미인가?”

얀 베르그만이 물었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그가 약속한 대로 미국 영토인 괌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완이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벽을 통해 이질적인 소리가 전달되었다.

누군가가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였다.

완은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그 누군가가 한규호라고 확신하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 알게 되었어요, 그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없는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거기까지 말했을 때, 벽 너머에서 산탄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들려온 총소리도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시선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완을 얀 베르그만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보여 주는 눈빛이, 그 눈빛에 담겨 있는 감정이 그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었다.

“재미있군.”

얀 베르그만이 그렇게 말한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서재 문이 강하게 열렸다.

* * *

열린 문으로 들어온 한규호는 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한눈에 담았다.

완, 그리고 얀 베르그만이 서로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고개를 돌린 사람은 완이었다.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한규호를 바라본 완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와 줬네요.”

한규호는 완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답을 하는 대신 안으로 걸어 들어와 완의 앞을 막아섰다.

완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한규호의 등을 바라보면서, 산맥을 따라 하루에 50km씩 마투피를 향해 걸어가던 그때의 한규호의 등을 떠올렸다.

든든한 등이었다. 그 등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했다.

그때 느꼈던 행복감이 다시 그녀의 마음 안에서 되살아났다.

“규!”

복도에서 완의 또 다른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규호의 등을 바라보던 완은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무시하기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였다.

완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앤이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완을 향해 달려온 앤은 재빨리 규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한규호를 향해 소리쳤다.

“확보! 이제 안전해요! 규는 안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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