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ṃsāra (윤회:輪回) (14)
얀 베르그만의 겨울 별장은 다른 저택과는 달리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식당이 1층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유럽식 저택은 식당을 G층(Ground floor)이라고 불리는 지상층에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래된 저택은 보관상의 이유로 식재료 창고를 지하에 두었고, 운반과 조리의 편의를 위해 주방과 식당을 지상층인 G층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얀 베르그만의 겨울 별장은 G층이 아닌 1층, 한국의 관점에서 2층에 식당이 위치해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보덴호의 풍경을 감상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후 8시가 조금 지난 시간, 바로 그 식당에 완이 있었다.
완은 아무런 감정 없는 눈을 하고 식탁에 앉아서 식기로 자신의 앞에 놓인 송아지 안심을 한입 크기로 썰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얀 베르그만이 앉아 있었다. 그도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식당 안에는 네 명이 있었지만, 10명은 앉고도 남을 대형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완과 얀 베르그만, 둘뿐이었다. 다른 두 명은 두 사람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식당 안은 조용했다. 두 사람의 손에 들린 식기가 접시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간간히 들릴 뿐, 그들 사이에 대화는 전혀 없었다.
완에게는 익숙한 분위기였다.
얀 베르그만과 저녁을 먹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반년 동안 여러 차례 식사를 같이했었지만, 그때도 지금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말없이 각자의 음식을 먹었고, 식사가 끝나면 완은 자신에게 배정된 감옥으로 돌아갔다.
가끔 식사 후에 차를 마시는 경우도 있지만, 대화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얀 베르그만이 불편한 것은 없는지 물으면 완이 없다고 대답하는 정도였다.
평상시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얀 베르그만과의 저녁 식사가 이날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는 식사를 끝낸 완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얀 베르그만이 차를 마시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것도 식당이 아닌 서재에서.
그 제안에 가장 놀란 것은 저녁 식사 내내 완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아이힝거 부인이었다.
그녀는 완에게 절대 그 제안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강렬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완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얀 베르그만의 제안을 수락했다.
제안을 수락한 이유가 아이힝거 부인의 강렬한 눈빛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얀 베르그만의 눈빛 때문이었다.
할 말이 있다고, 그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 * *
“Saṃsāra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나?”
조용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완에게 얀 베르그만이 질문을 던졌다.
“……reincarnation(환생).”
완의 대답이었다.
“중국어로는 뭐라고 하지?”
“……Lún huí(轮回:윤회).”
완의 대답을 들은 얀 베르그만은 만족스럽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단어의 차이점을 알겠나?”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사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라고 해도,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얀 베르그만은 계속 말을 이었다.
“환생과 윤회, 둘 다 Saṃsāra에서 번역된 단어지. 영어로, 그리고 한자로.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의미라고 볼 수는 없지. reincarnation은 육체적 관점에서 재탄생을 의미하고, 윤회는 정신적 관점에서의 순환을 의미하지.”
완은 마치 철학과 교수라도 되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얀 베르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도에 가 본 적이 있나?”
얀 베그르만이 다시 물었다.
완은 고개를 저었다.
“인도인들에게 윤회는 중요한 관념이지. 태어나면 필연적으로 죽고, 그렇게 죽어도 다시 태어나고, 또 죽고를 반복하면서 끝없는 삶을 산다고 믿고 있지. 그러한 순환을 그들은 Saṃsāra라고 부르지. 목적지가 없는 끝없는 헤매임.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는 환생보다는 윤회가 더 근접한 표현이 되겠군.”
“…….”
“인도인들은 그 끝없는 헤매임을 끊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고 믿지. 그들의 성지인 바라나시에 가서 화장하고, 재를 갠지스강에 뿌려야 한다고, 그것만이 윤회를 끊어 낼, 다시 태어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
완이 물었다.
얀 베르그만이 아무런 의미 없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겉도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말 상대가 되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한규호.”
얀 베그만이 한규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완의 눈이 커졌다.
“그가 나에게 있어서 바라나시와 같은 의미라는 이야기지. 내 윤회를 끊어 줄 유일한 방법.”
얀 베르그만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완에 얼굴에는 감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얀 베르그만 앞에서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각오도 잊은 듯,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이라는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얀 베르그만은 그런 완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즐겁군.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자신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고, 그 느낌이 즐거웠다.
“키루스 2세. 들어 본 적 있나?”
얀 베르그만이 말했다.
* * *
아케메네스 제국의 샤한샤(شاهنشاه : 왕 중의 왕)이며, 페르시아 최초의 대제국인 아케메네스(Archaemenes) 제국의 기초를 닦아 역사상 최초로 대왕(The Great.) 칭호를 받은 왕 중의 왕, 키루스 2세(Cyrus II The Great)는 열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이 안샨(انشان:Anshan)의 왕인 키루스 1세와 메디아의 공주였던 만다네 사이에서 태어난 왕손이라는 신분을 모른 채, 목동들 사이에서 양을 키우며 자랐다.
외조부이자 메디아의 국왕이었던 아스티아게스가 ‘외손자에게 왕좌를 빼앗긴다.’는 신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외조부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목동들 사이에서 양을 키우며 자랐던 키루스 2세는 마치 신탁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성인이 되는 것과 동시에 군사를 일으켜 메디아의 수도 엑바타나를 정복하고, 외할아버지를 왕좌에서 몰아낸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시작이었다.
왕좌를 차지한 키루스 2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왕손임을 모르고, 목동들 사이에서 양을 치며 자라던 어린 시절, 항상 그의 곁에 있어 주던 친구이자, 누이이며, 또한 첫사랑이었던 아르드비(Aredvi)를.
키루스 2세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 아케메네스 가문의 딸 카산다네(Cassandane)가 있었지만, 키루스 2세가 사랑한 유일한 여자는 아르드비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결실인 아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짧은 행복을 공유했지만,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출산 중에 아르드비가 목숨을 잃어버리게 된 것.
어미의 목숨을 대가로 태어난 사내아이는 정실(正室)인 카산다네에게 입적되었고,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키루스 2세는 정복 전쟁에 몰두한다.
리디아를 정복하고,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이자 신바빌로니아의 수도였던 바빌론을 정복하면서, 서아시아 최초의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바빌론을 정복한 그날, 태어난 이후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아니, 보지 않은 아들이 찾아온다.
장성한 청년이 된 아들의 얼굴에서 아직도 사랑하는, 하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아르드비의 얼굴을 본 키루스 2세는 칼을 뽑아 들고 외친다.
저놈이다! 저놈이 아르드비를 죽였다!
아버지의 따듯한 포옹을 기대했던 아들은 겨우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된다.
어미의 목숨을 대가로 태어난 아들, 그런 아들을 증오하는 아버지. 저주받은 인생의 시작이었다.
아비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아들이었지만, 그는 키루스 2세의 장자였으며, 아케메네스 제국의 상속자였다.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사랑받지 못한다면, 자신만의 힘으로 왕위를 계승 받겠다고 결심한 아들은 자신의 세력을 조금씩 확장하며 기회를 노린다.
그리고 기원전 830년, 아들은 스키타이 원정 중이던 아버지의 막사에 몰래 잠입한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아버지의 가슴에 힘차게 단검을 찔러 넣는다.
단검이 아버지, 키루스 2세의 심장을 꿰뚫는 그 순간, 아들은 머릿속에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살부(殺父), 살모(殺母)하면 불사(不死)의 능력을 얻는다.
* * *
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얀 베르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제로 완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얀 베르그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남자가 2200년 전부터, 전설로만 내려오던 고대 시대부터 살아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얀 베르그만은 완의 표정에서 그녀가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완에게 실망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캄비세스 2세(Cambyses II)라는 왕호를 얻고, 선친의 정복 전쟁을 계속 이어 갔다. 그는 죽지 않았고, 그래서 언제나 전장의 선두에 서서 군사를 이끌었다.
전장의 선두에 서서 돌진하는 왕에게는 جاودانه(Immortalem : 불멸자)이라는 찬사가 뒤따랐고, 그의 군대는 키프로스와 이집트를 정복해 동으로는 이란 고원에서부터, 서로는 아나톨리아 반도, 남으로는 아프리카 북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완성했다.
그는 불멸과 대제국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주변 인물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궁내 암투로 아들이 죽었고, 원정으로 인해 발생한 전염병으로 왕비와 공주를 잃었다. 항상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치던 그의 전우들은 하나둘씩 전장에서, 또는 전장에서 입은 상처로 죽음을 맞이했다.
캄비세스 2세는 죽음이 자신의 곁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미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시작한 죽음의 행보는 그의 주변을 맴돌면서 천천히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괴로웠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두려웠고, 모두에게 찾아오는 죽음이 그에게만 허락되지 않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불사의 능력이 저주라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저주임을 알게 된 그는 모든 것을 버렸다. 왕좌도, 권력도, 명예도, 그가 이룩한 모든 업적을 뒤로하고 여행을 시작했다.
죽기 위한 방법을 찾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고대사회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음을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죽지 못했다. 고통스러울 뿐 죽을 수 없었다.
아무리 엄청난 고통이라고 해도 그 끝에 죽음이 있다면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고통도 그에게 죽음을 안겨 주지 못했다.
죽음을 찾고, 고통을 받고, 죽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 큰 고통을 느끼면서, 그렇게 셀 수도 없는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그렇게 2천 년이 흘렀다.
* * *
“태양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얀 베르그만이 물었다.
완은 대답 없이, 그저 공포에 잠식당한 눈으로 얀 베르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은 조금씩 커지고 있지. 온도도 올라가고 있고. 학자들은 대략 7억 년 이후에는 뜨거워진 태양 때문에 지구상에 생물이 살 수 없다고 예측하더군.”
얀 베르그만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지금껏 감춰 두었던 비밀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때의 후련함,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7억 년. 긴 시간이지. 일반인들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지. 어느 누구도 그 시간의 10만 분의 1도 살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공포를 느꼈지.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어떻게 하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고, 지구상의 모든 수분이 증발하고, 태양풍에 의해 모든 대기가 날아가고, 적색거성화되어 버린 태양에 지구가 잡아먹힐 때까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하지?”
완은 목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찻잔에는 식어 버린 차가 담겨 있었지만, 완은 그 찻잔을 입으로 가져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얀 베르그만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규호가 당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나요?”
완이 물었다.
얀 베르그만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북한에서 그를 만났지. 그리고 그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을 때, 문장을 보았지. 2천 년 만에 보는 두 번째 문장이었지.”
“……왜 규호를 만나러 가지 않았죠? 당신 말대로라면, 그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을 텐데…….”
완이 다시 물었다.
얀 베르그만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완에게 천천히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예정된 삶을 한 번은 살아 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아니, 이해할 수 없겠지. 그 누구도.”
완은 얀 베르그만의 목소리가 마치 뱀처럼 자신에게 감겨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느꼈던 절망과 희열, 자신이 느끼는 놀라움과 공포가 마치 뱀처럼 그녀의 몸에 감겨드는 그런 느낌이었다.
얀 베르그만은 괴로워하는 완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말했다.
“반년 전, 그날을 기억하나? 그와 전화 통화를 했던 그날을?”
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그는 몸을 감추어 버렸지.”
완의 눈이 다시 커졌다.
“밀항선을 타고 중국으로 간 것까지는 확인되었지만, 그 이후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지. 무슨 생각으로 몸을 감춘 것일까?”
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오고 있을 거야. 이리로.”
얀 베르그만이 대신 답했다.
“아주 오랜만에 고민이라는 것을 해 봤지. 이 저주받은 삶을 끝낼 것인지, 아니.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이 삶을 즐길 것인지.”
“…….”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이 저주받은 삶을 조금 더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를 위해서, 그리고 그를 위해서.”
얀 베르그만의 말에 완의 눈에 다시 감정이 떠올랐다. 경악, 그리고 공포. 그렇게 설명되는 감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완이 물었다.
얀 베르그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웃음 지을 뿐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는 것이 무슨 말이죠?”
얀 베르그만은 완의 얼굴에 떠오른 놀라움과 초조함이 다시 얀 베르그만의 마음으로 스며들었다.
얀 베르그만에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전수자로부터 다시 죽음을 돌려받을 때, 능력을 상실한다. 2천 년 만에 본 문장의 내용이지.”
“돌……려……받을 때?”
“내가 죽으면 그도 살아남지 못해. 내가 먼저 그에게 죽음을 선물했으니까.”
얀 베르그만이 말했다.
완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완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안을 하지.”
얀 베르그만이 말했다.
제안이라는 말에 완의 눈에 초점이 다시 돌아왔다.
“……무슨 제안을…… 하겠다는 거죠?”
“홍콩에서 꾸던 꿈을 계속 이어 가라는 제안.”
“……홍콩에서 꾸던 꿈……?”
“10년 넘게 지켜봤지. 그 시간 동안 한규호가 새로 만난 사람 중에서 의미를 가진 사람은 네가 유일했다. 그와 같이 살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지.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얀 베르그만의 말을 들은 완의 표정이 천천히 바뀌었다.
놀라움에서 분노로.
얀 베르그만은 그런 완의 표정 변화를 여전히 무감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완전히 분노를 드러낸 완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 순간.
멀리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완의 고개가 움직였다.
처음 들어 보는 소리였다.
아니, 처음 들어 보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 장크트갈렌에서는 들어 보지 못한 소리였다.
무슨 소리지?
완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순간에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음.
조금 전 들렸던 소리와는 달리, 고주파음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지상층, 현관이 있는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