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80화 (380/386)

Saṃsāra (윤회:輪回) (13)

곽용신과 한규호, 두 사람은 작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곽용신은 한규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괴한이 한규호라는 것을 확인하고 이미 5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곽용신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곽용신은 긴장과 흥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침착한 목소리로 한규호에게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지?”

“흔적을 남겼더군.”

한규호의 말에 곽용신의 얼굴이 굳었다.

흔적을 남겼다고? 그렇게 조심했는데, 흔적이 남았다고?

곽용신으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만약 괴한이 한규호가 아닌, 악의를 가진 다른 누군가였다면, 곽용신은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을 것이다.

아니, 곽용신이 위험한 것은 둘째 문제였다. 반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노력해 만들어 놓은 이번 작전이 자신 때문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어떤…… 흔적이 남았지?”

곽용신은 무거운 표정으로 한규호에게 물었다.

부끄러운 질문이었다. 질문을 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떠한 흔적인지, 그 흔적이 어떻게 남았는지, 어떻게 발각되었는지를 알아야 했다.

책임을 지고 말고는 나중 문제다. 지금은 이 작전을 지속할지, 중단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질문을 해야 했다.

“표정.”

한규호가 말했다.

“표정?”

“창가에 서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 눈에 띌 수밖에 없지. 어이가 없더군. 지나칠 수가 없었지.”

곽용신은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한규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이지? 심각한 표정? 어이? 지나칠 수가 없었다고?

한규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합이 되지 않았다.

콘스탄츠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창밖을 바라보는 자신을 보고,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인가?

그렇게 잠시 어리벙벙한 표정을 하던 곽용신의 얼굴이 붉어졌다. 한규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게 무슨 개…….”

“국정원이 어떻게 이 작전에 참여하게 된 거지?”

한규호가 곽용신의 말을 끊었다.

곽용신은 한규호를 잠시 노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국정원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 난 국정원 요원이 아니라는 말이지. 사표를 썼으니까.”

* * *

곽용신이 해 준 설명은 이러했다.

바티칸과 공조해 한규호를 지원하는 작전을 진행하기로 한 밀러 국장에게는 풀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바로 작전에 동원할 요원의 수급이었다.

CIA의 요원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체 소속원에 대한 강도 높은 내부감사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중에서 믿을 수 있는 요원을 걸러 내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물론 100% 신뢰할 수 있는 요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시아 챔버와 트레이시 테일러가 있었지만, 그 둘을 유럽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유럽으로 보내기는커녕, 중요한 일도 맡길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를 쥐새끼들에 눈치를 챌 수도 있었으니까. 그저 시애틀에 숨겨 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대안이 바로 한국이었다. 신뢰할 수 있고, 그나마 덜 노출된 한국의 요원을 활용하기로.

밀러 국장의 요청을 받은 정보위원장 김형원은 곽용신을 호출했고, 작전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명령이 아니었다. 부탁이었다.

곽용신은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거절할 수 없었다. 한규호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있었으니까.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국정원에 사직서를 제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국정원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그리고 재미교포의 위조 신분으로 2주 동안 한국에서 행적을 만들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밀러 국장과 독립요원 계약을 맺고 전문 부동산 브로커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유럽으로 넘어온 것이다. 바티칸과 공조해 얀 베르그만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드디어 크레디트 에우로파의 자산으로 추정되는 저택을 찾아냈다는 설명까지 들은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생했겠군.”

“돈은 많이 벌었지.”

곽용신은 마치 한규호의 치사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행이군. 형수가 좋아하겠군.”

“미친…… 형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한규호는 곽용신의 거친 말에 작게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위치를 알아내는 것으로 당신의 일은 끝인가?”

한규호가 물었다.

“그랬다면 진작에 여기를 떠났겠지.”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객실 한쪽에 놓여 있는 여행용 가방으로 다가가,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 * *

오후 2시가 지난 시간

스위스 아르본의 장크트 마르틴 성당, 일반 관광객은 물론 성당 관계자의 접근도 제한된 사제관 안에는 네 사람이 있었다.

앤 챔버, 베드로 신부, 곽용신, 그리고 한규호였다.

네 사람의 복장은 제각각이었다. 앤 챔버는 수녀복을 입고 있었고, 베드로 신부는 스웨터에 청바지를, 곽용신은 양복을, 한규호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 표정도 제각각이었다.

앤 챔버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베드로 신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곽용신의 얼굴에는 두 개의 감정이 합쳐진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규호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앤 챔버는 한규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베네수엘라에서 헤어지고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은 그녀의 기억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특히 얼굴을 덮고 있는 수염은 그녀가 알고 있던 스즈키의 얼굴에는 없던 요소였다. 하지만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베네수엘라에서 보았던 그대로였다. 믿음을 주는 무표정이었다.

“그자가 여기에 있습니까?”

한규호가 베드로 신부에게 물었다.

“그렇게 판단됩니다.”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말하고는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11시간 동안 900km를 혼자서 운전해왔다.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르거나 급한 화장실 용무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멈출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차를 몰았다.

베드로 신부는 몸을 잠식하는 피로감을 떨구기 위해 고개를 작게 흔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오후, 정확히 16시 20분에 크레디트 에우로파 소유의 비즈니스 전용기 ACJ319가 장크트갈렌-알텐하인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기장과 부기장을 포함해 비행기에 타고 있던 인원은 여섯 명이고, 그중 두 사람은 기내 승무원입니다. 6명 중, 2명이 하기(下機)했고, 비행기는 급유 후에 바로 이륙해서 함부르크로 돌아갔습니다. 내린 사람 중 한 명은 크레디트 에우로파의 법무 담당 이사인 바이스 되블린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감시 대상으로 선정된 베르그만의 최측근 세 명 중 한 명입니다.”

“바이스 되블린과 함께 내린 다른 한 명이 그자, 얀 베르그만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질문을 한 사람은 곽용신이었다.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그 대답에 곽용신이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작전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정보의 정확성은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했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무리하게 작전을 진행했다가, 작전이 실패하는 것은 물론 요원을 잃은 사례는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확인이 가능은 합니까?”

이번에도 곽용신이 물었다.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고 흔적이 남을 겁니다. 그리고 흔적이 남으면 얀 베르그만이나 그의 수족들이 알아채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베드로 신부의 말에 곽용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바티칸의 정보수집 방식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인간 정보 휴민트,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에게 접촉하는 그 순간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군요.”

곽용신이 말했고, 베드로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세 사람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한규호가 처음 입을 연 것이다.

“인질의 존재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귀한 손님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평상시보다 상주 인력이 늘었고, 무엇보다 적어도 한 달에 두 번은 이곳을 찾아오는 전용기가 그 사실을 뒷받침하니까요.”

베드로 신부의 말에 한규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세 사람은 그런 한규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번 작전의 최고 현장 책임자는 한규호였다. 추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계속 기다릴지, 기다린다면 얼마나 기다릴지를 결정하는 것은 한규호의 몫이었다.

“함부르크로 돌아간 비행기가 오늘 돌아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두 시간 전 확인했는데, 오늘 공항에 중형 항공기의 이착륙 계획은 없습니다.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그럼 적어도 오늘은 시간이 있다고 봐도 되겠군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적어도 오늘은.”

베드로 신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규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22시.”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한규호에게로 집중되었다.

“오늘 22시에 진입하도록 합시다.”

한규호가 말했다.

“확실하지도 않은데, 그렇게 무턱대고 들어가도 괜찮은 거야?”

곽용신이 말했다.

“거기 있을 거야.”

한규호의 대답이었다.

곽용신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그런 곽용신에게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나는 알아. 거기 있을 거야.”

* * *

아이힝거 부인은 얀 베르그만의 겨울 별장 3층에 있는 완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아이힝거 부인은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면서, 자꾸만 표면 위로 떠오르려 하는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렇게 분노를 감춘 아이힝거 부인은 손을 들어, 완의 방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안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음에도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방 주인인 여자의 모습이 아이힝거 부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창가에 서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보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이힝거 부인의 눈에 억지로 눌러놓았던 분노가 서렸다.

아이힝거 부인으로서는 당연할 수밖에 없는 분노였다.

어제 산책을 고집한 저 여자 때문에 제때 주인을 맞이하지 못했다. 산책을 마치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주인은 이미 도착한 다음이었다. 아이힝거 부인이 이 저택의 관리자가 된 이후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거기에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여자는 주인과의 저녁 식사를 거절했다. 단지 산책을 오래 해서 피곤하다는 핑계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힝거 부인은 저 여자에게 징벌을 내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두 번 다시 그런 불경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아주 강력한 징벌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주인께서 그렇게 하기를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이힝거 부인은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여자가 물었다. 여전히 시선은 창밖을 향한 채로.

“주인님께서 저녁을 같이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힝거 부인은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최대한 꾹꾹 누른 상태로 말했다.

* * *

창밖을 바라보던 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문 옆에 서 있는 아이힝거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태도와 목소리는 평상시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지만, 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감추지 못하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불쌍한 사람.

그녀에 대한 완의 생각이었다.

저 여자를 비롯해 이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은 모두 종교적인 열망으로 그들의 주인을 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 예전의 완이라도, MSS에 의해 도구로 사용되던 그 당시에도 완은 생각이란 것을 할 수는 있었다.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 어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마치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는 듯,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커다란 불경이라는 듯, 저들의 주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어요.”

완이 말했다.

“저녁 시간은 오후 8시입니다.”

아이힝거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완은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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