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ṃsāra (윤회:輪回) (11)
주방에서 차 한 잔을 우려 거실로 나온 신시아 챔버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창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챔버가의 막내딸인 마리아가 치마를 펄럭이며 앞마당에서 열심히 축구공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마리아의 까르륵하며 웃는 소리가 창문을 통해 거실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런 마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는 신시아 챔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한동안 위험 징후를 보이던 마리아가 많이 호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신시아 챔버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신시아 챔버의 시선이 마리아와 놀아 주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향했다.
고등학교 때 여자 축구부에서 중앙 수비수를 담당했다던 트레이시는 능숙한 발놀림으로 축구공을 트래핑하고 있었다.
신시아는 고마움이 담긴 눈으로 그런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챔버가에 와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신시아 챔버는 더욱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신시아 챔버는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놀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두 사람을 위해 간식을 좀 만들어 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시아 챔버는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식빵을 토스터에 넣으면서, 앤을 떠올렸다.
바쁜 신시아 챔버를 대신해 앤은 마리아의 간식을 만들어 주고는 했었다. 그때마다 앤은 절대로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인스턴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걸려도 항상 신선한 재료를 이용해 건강한 간식을 만들었다.
-엄마도 그랬어요.
매번 그렇게 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는 신시아 챔버의 질문에 앤이 그렇게 말했었다.
-다른 애들 다 먹는 과자, 인스턴트, 패스트푸드를 못 먹게 했어요. 어릴 때는 그런 게 제일 맛있는데, 못 먹게 하니까 좀 속상하고 그랬는데.
‘그랬는데?’
-엄마의 방식이 옳다는 걸 이제 알게 된 거죠. 마리아도 원망하겠지만, 나중에 알게 되겠죠.
그렇게 말하며 웃던 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 한쪽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괜찮을까.
신시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넉 달 전, 앤과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신시아는 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 앉아 있는 앤을 바라보는 신시아 챔버의 시선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절대로 안 돼. 절대로.”
신시아 챔버가 앤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신시아 챔버를 앤은 가벼운 미소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허락할 수 없어. 절대로 허락할 수 없어.”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목소리에 담겨 있는 단호함이 고통스러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신시아 챔버는 고통스러웠다. 지금, 이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러웠다.
규가 홍콩에서 실종되었다. 그렇게 실종된 규가 얀 베르그만이라는 사람에 의해 유럽으로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규가 아직 유럽에 있는지, 유럽에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아니,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규를 찾기 위해, 다시 데려오기 위해, 앤이 유럽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CIA의 독립 요원이 되어서.
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신시아 챔버는 알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신시아 챔버야말로 당장 유럽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그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조직과 힘을 이용해 유럽 전역을 샅샅이 뒤져 보고 싶었다.
하지만 밀러 국장은 허락하지 않았다. 허락은커녕, 신시아 챔버와 트레이시에게 시애틀에서 절대 벗어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말고, 누구의 연락도 받지 말고, 그저 죽은 것처럼 그렇게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었다.
트레이시는 그나마 나았다. 얀 베르그만의 위치를 찾는 작전에서 트레이시는 역할이 있었다. 뭐라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시아 챔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티칸과 밀러 국장, 그리고 그 남자, 한규호가 무언가를 할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안 돼. 절대로.”
신시아 챔버가 다시 말했다.
말없이 신시아 챔버를 바라보고만 있던 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신시아 챔버 옆자리로 옮겨 와 앉으며, 챔버의 손을 두 손으로 살포시 포갠 후 나직하게 말했다.
“만약 나라면.”
앤이 말했다.
“만약 납치된 사람이 나였다면, 규는 그저 기다리고만 있었을까요?”
신시아 챔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정면을, 조금 전까지 앤이 앉아 있던 자리를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앤이 다시 말했다.
“엄마는 규에게도 지금처럼 말했을 거예요. 하지만 엄마도 알잖아요. 규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신시아 챔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속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앤이 두 손으로 덮고 있는 신시아 챔버의 손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엄마도 알잖아요.”
“…….”
“그 누구도 나를 해칠 수 없어요.”
신시아 챔버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는 앤을 바라보았다.
그런 신시아 챔버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앤이 다시 말했다.
“내가 규 곁을 지키면, 그 누구도 규를 해칠 수 없어요.”
“지금은 안 돼. 적어도 규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
“그가 찾아 줄 거예요.”
앤의 말에 신시아의 말이 멈추었다.
“그가 마리아를 찾아 주었던 것처럼, 다시 규를 찾아 줄 거예요.”
신시아는 말없이 앤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딸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데려올게요. 챔버가의 장녀를. 다시. 이 집으로 데려올게요.”
* * *
그렇게 앤은 머다이나의 챔버가를 떠났다.
앤은 밀러 국장을 만나 독립 요원 계약을 맺고, 교육을 받고,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한 앤이 바티칸에서 관계자를 만났다는 소식까지는 전해졌지만, 그 이후로 어떠한 연락도, 소식도 듣지 못했다.
신시아 챔버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자신을 원망하면서,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앤을 떠올리자 다시 고통이 그녀를 감쌌다.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던 신시아 챔버의 귓가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웃음을 찾은 막내딸이 공놀이를 끝내고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신시아 챔버는 그런 막내딸을 맞이하기 위해 얼굴에 떠올라 있는 괴로움을 재빨리 안으로 갈무리했다.
그리고 슬픔이 묻어나는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 * *
“이 저택입니다.”
유럽 내 부동산 기업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VICI European Properties Inc의 독일 수석 에이전트인 한스 마이네(Hanns Mayne)는 눈앞에 보이는 저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옆에 서 있던 동양인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한스 마이네는 동양인의 제스처와 눈빛에서, 그가 이 저택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부동산 에이전시는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들게 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직업관이었다.
한스 마이네는 동양인 남자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준비한 첫 번째 카드였다.
“클란제 말기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입니다.”
한스 마이네의 말에 남자가 반응을 보였다.
“설마…… 레오 폰 클란제 말입니까?”
한스 마이네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동양인은 클란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좋은 징조였다.
“아시다시피 신고전주의의 핵심은 바로크와 로코코의 화려함에 대한 반발입니다.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단순함 속에 숨어 있는 완벽한 비례의 아름다움은 고대 그리스부터 현재까지 사랑받는 스테디셀러입니다.”
한스 마이네의 말에 동양인 남자는 다시 저택에 시선을 주었다. 마치 새로운 평가 점수를 매기려는 듯.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단순하고 투박한 오래된 집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심미적 조예가 있는 고객께서는 이 아름다움을 분명 알아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건축 연도가 언제인가요?”
동양인 남자가 물었다.
“1851년입니다.”
한스 마이네가 말했다.
답을 들은 동양인 남자의 얼굴에 가볍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쁜 징조였다.
“제가 알기로는…… 그 시기면 클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을 때 아닌가요?”
동양인 남자가 말했다.
“맞습니다. 역시 잘 아시는군요.”
한스 마이네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은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의 등에는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동양인 남자는 실제 구매자가 아니었다. 의뢰를 받아 부동산을 대리 구매하는 일종의 대리인, 브로커였다. 한스 마이네는 많은 동양인 고객들을 만났고, 브로커를 상대했지만, 지금 눈앞의 이 남자처럼 까다로운 사람은 없었다.
18세기,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유럽에 명성이 자자했던 클란제는 1839년부터 1852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로마노프 왕조의 겨울 궁전이었던 현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개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동양인 남자는 그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1851년이라면 클란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당황하지 말자.
한스 마이네는 속으로 속삭이면서 두 번째 카드를 꺼내 들었다.
“클란제의 설계입니다. 그리고 제자 중 한 명이 클란제의 설계에 따라 이 저택을 지었고요.”
“클란제의 작품이 아니군요.”
동양인 남자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한스 마이네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공식적으로 클란제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클란제의 이름이 붙었다면 절대 지금 가격으로는 이 집을 구하실 수 없다는 사실도 아실 겁니다.”
한스 마이네의 말에 동양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징조였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말씀드리지 않은 부분인데……. 만약 다른 고객님이었다면, 예를 들어 중국 고객님이었다면, 저는 이 집을 소개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분들은 저택이 가진 아름다움보다 얼마나 투자가치가 있는지에 더욱 집중하실 테니까요.”
다른 이를 험담해 상대방을 높인다. 화술의 기본 스킬 중 하나였다.
“귀하께서, 아니, 귀하의 의뢰인께서는 시세 차익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시려는 목적으로 저택을 구매하려 하신다고,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귀하의 의뢰인께서도 분명히 이 저택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알아보실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여기로 모셔 온 것입니다.”
한스 마이네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는 필사적이었다. 이 손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거래를 트고 싶었다.
유럽 부동산 시장에서 한국은 떠오르는 큰손이었다. 2019년 기준으로 한국 기업이 유럽에서 사들인 부동산 가치는 132억 달러에 이르렀다. 중국과 홍콩, 싱가포르 투자자들을 제치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구매자로 떠오른 것이다.
이 남자와 연을 맺어 둔다면, 앞으로 거래가 계속될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가격 조정도 가능합니다.”
한스 마이네의 말에 동양인 남자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번의 좋은 징조였다.
동양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한스 마이네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경험적으로 고객들이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말은 좋은 징조였다.
“저는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드는데……. 제 의뢰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군요. 가격은 제 의뢰인에게 첫 번째 고려 대상이 아니라서요. 다른 무언가가 더 있다면, 저도 이야기를 꺼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한스 마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춰 둔 카드를 꺼낼 타이밍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곳, 보덴호는 유럽의 부호들이 휴양목적으로 사용하는 별장들이 많습니다. 귀하의 의뢰인께서 이 저택을 선택하신다면, 좋은 이웃과 인연을 맺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동양인 남자가 고개를 돌려 한스 마이네를 바라보았다.
“……그 부분은 작용하겠군요. 예를 든다면?”
“저기 저 집 보이십니까?”
한스 마이네가 손으로 3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구릉 위의 저택을 가리켰다.
동양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디트 에우로파의 소유입니다.”
한스 마이네는, 마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했다.
“……크레티드 에우로파.”
동양인 남자가 말했다.
“유럽 최대 벌지 브래킷. 더 이상의 설명은 안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만.”
동양인 남자, 한국 대기업 회장의 의뢰를 받아 유럽의 별장을 대리 구매하는 브로커로 위장한 국정원 요원 곽용신은 저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 베드로 신부는 집무실 한쪽에 설치된 간이침대에 몸을 눕혔다. 침대에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간이침대가 불편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미 몇 달 동안 간이침대에서 잠을 잤고, 그의 몸은 침대에 완벽하게 적응해 있었다.
다섯 잔이나 되는 에스프레소를 마셨기 때문도 아니었다. 물론 작용을 안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몇 시간 전에 그에게 전달된 정보였다.
오늘 오후에 장크트갈렌-알텐하인 국제공항에 크레디트 에우로파 소속의 비즈니스 제트가 착륙했다. 그리고 그 비행기 승객 명단에는 바이스 되블린이 있었다.
크레디트 에우로파 그룹의 법무 이사 바이스 되블린, 얀 베르그만의 측근으로 추정되는 그가 장크트갈렌을 찾았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을 의미하고 있었다.
얀 베르그만이 장크트갈렌에 있거나, 아니면 모시고 왔거나.
베드로 신부는 몇 달 동안 맞춰 오던 직소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만을 남겨 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어서 빨리 마지막 한 조각을 끼워 맞추고 싶어 안달 내는 소년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흥분 때문에 한 시간 가량을 뒤척이던 베드로 신부는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들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잠들 수 없다면, 차라리 수집된 정보를 다시 검토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일으킨 그가 다시 커피를 내리기 위해 모카포트를 잡은 그 순간,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베드로 신부는 모카포트를 든 채로 잠시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직소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
그 문장이 떠올랐다.
베드로 신부는 조심스럽게 모카포트를 내려놓고, 천천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찾았습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년 만에 듣는 한규호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