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77화 (377/386)

Saṃsāra (윤회:輪回) 10)

* * *

장크트갈렌-알텐하인 공항의 10번 활주로를 향해 점점 고도를 낮춰 가던 ACJ319 비행기는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부드럽게 활주로 위에 착륙했다.

부드러운 착륙이었지만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을 때 발생하는 진동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기체 속도를 줄이기 위한 엔진 역추진이 시작되면서 기내에 전달되는 진동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얀 베르그만은, 마치 그런 진동을 느끼지 못한다는 듯,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고서, 그날,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 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시아계 여자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을 때, 여자는 바로 전화기를 건네받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동자에는 주저함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잠시 전화를 바라보던 여자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받아 들고 얼굴로 가져갔다.

전화기가 얼굴에 고정되었음에도, 여자의 손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에 관한 이야기로,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따를 필요 없어요.

그러나 여자의 목소리 그 어디에도 떨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나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아 줘요.

여자의 얼굴에도.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아 줘요.

여자의 눈동자에도.

-그저 당신이 원하는 길을 걸어가 줘요.

여자의 영혼에도.

-내가 행복할 수 있도록.

떨림은 없었다.

얀 베르그만은 여자의 모습에서, 여자의 목소리에서 감정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의 감정이 얀 베르그만에게 전달되었다. 바싹 말라 쩍쩍 갈라진 안 베르그만의 마음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스며든 여자의 감정은 얀 베르그만의 마음 안에서 파동을 만들었다.

마치 같은 헤르츠를 가진 두 개의 소리굽쇠가 공명하는 것처럼, 얀 베르그만의 마음속에서도 감정이라는 이름의 진동이 느껴졌다.

얀 베르그만은 여자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자신의 마음속에 울리는 진동을 바라보았다.

얀 베르그만은 그 진동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것이 진짜 감정인지, 진짜 감정이라면 어떠한 감정인지, 공감인지, 동정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인지, 얀 베르그만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진짜 감정인지, 그리고 진짜 감정이라면 어떠한 감정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얀 베르그만이 무언가를 느꼈다는 것이었다.

할 말을 끝낸 여자는 전화기를 다시 얀 베르그만에게 내밀었다.

얀 베르그만은 전화를 건네받지 않았다. 그저 여자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여자의 손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한규호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여자의 손 떨림이 강해졌고, 동시에 희미해져 가던 여자의 감정도 다시 강하게 물결쳤다.

그 순간 얀 베르그만은 마음을 정했다.

이 여자를 곁에 두어야겠다고,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고.

얀 베르그만이 여자를 확보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서용석이 죽어 버렸고, 새로운 장난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규호를 자극할 수 있는 새로운 장난감, 술래잡기를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 줄 새로운 장난감. 여자의 가치는 단지, 그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더 이상 여자는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앞으로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곁에 두고 지켜보고 싶었다.

흥미롭군.

얀 베르그만은 그런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에 들린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여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전화기를 얼굴로 가져갔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얀 베르그만은 침묵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분노를 느꼈다. 한규호의 감정도 얀 베르그만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아주 흥미롭군.

얀 베르그만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속하지. 그녀는 안전할 거야.”

여전히 시선을 여자에게 고정한 채로 얀 베르그만이 말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전화기를 통해 씹어 삼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어디로…… 가면 되는 거냐.

다시 한번 한규호의 감정이 얀 베르그만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가 느끼는 분노, 절망, 고통이 마치 바싹 말라 있는 땅을 적시는 빗물처럼 그렇게 스며들었다.

“나중에.”

얀 베르그만은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때가 되면 그때 알려 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얀 베르그만은 자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 * *

마지막 숫자까지 해독해 낸 베드로 신부는 수집된 위치 정보를, 머릿속에 그려 놓은 지도에 핀으로 꽂았다.

그렇게 꽂힌 핀과 핀을 연결해 선을 그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선의 교차점을 다시 한번 더 점검했다.

예전에 도출된 결과와 동일했다.

대부분의 화살표가 보덴 호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 보덴 호수 남쪽, 스위스의 장크트갈렌주를 가리키고 있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스위스 북부의 주(Kanton), 장크트갈렌에는 룩셈부르크보다 조금 작은 2천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에 5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장크트갈렌의 인구밀도는 평방킬로미터당 250명으로 스위스 전체 인구밀도인 평방킬로미터당 181명보다 높았다.

단순히 면적과 인구밀도만을 본다면, 장크트갈렌에서 얀 베르그만의 거처를 찾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영역을 호숫가 인근의 고급 별장 지대로 한정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장크트갈렌-알텐하인 공항을 중심으로 하는 반경 4km, 호수 영역을 제외한 반원을 탐색 영역으로 상정한다면, 범위는 장크트갈렌의 전체 면적의 80분의 1인 25평방킬로미터로 줄어든다.

그렇게 줄어든 영역 안에서 일반 주민들이 사는 저택을 제외하고, 별장용 고급 저택이나 고성(古城)을 탐색 대상으로 한정한다면 후보군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만약 얀 베르그만이, 그리고 그가 납치한 완이라는 여자가 그곳에 있다면,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베드로 신부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모카포트를 집어 들었다.

오늘 이미 에스프레소를 네 잔이나 마셨지만, 그의 정신은 카페인을 요구하고 있었다.

“난 이탈리아 사람도 아닌데.”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보일러에 물을 담고, 바스켓에 원두를 담은 다음 보일러와 바스켓을 결합했다. 그러고는 삼발이가 장착된 휴대용 버너에 모카포트를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천천히 끓어오르는 모카포트를 바라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슬슬 도착했으려나…….”

* * *

완은 여전히 호숫가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보폭을 맞춰 걸어가던 아이힝거 부인이 있었다.

아이힝거 부인은 잠시 속도를 늦추고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다섯 시까지 10여 분이 남아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아이힝거 부인은 완에게 다가갔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제 들어가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그러나 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이힝거 부인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아니, 애초에 그녀가 존재하지도 않다는 듯, 계속 걸어 나갔다.

아이힝거 부인은 그런 완을 잠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완의 곁에서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아이힝거 부인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조급함과 분노가 조금씩 커져 가고 있었다.

주인이 도착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주인을 맞이하는 것이 하인의 의무였다.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조급함을 느끼는 이유였다.

그런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완은 그런 조급함이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계속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분노를 느끼는 이유였다.

‘불경스러운 여자’,

완에 대한 아이힝거 부인의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모셨다.

그녀는 주인이 처음으로 곁에 둔 젊은 여자였다.

얀 베르그만을 곁에서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아이힝거 부인은 주인이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주인이 처음으로 곁에 둔 젊은 여자였다. 주인의 반려(伴侶).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인은 여자를 취하지 않았다.

가끔 저녁을 같이하거나, 차를 마시는 때는 있어도, 주인은 그녀와 같은 침실에 들지 않았다.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때도, 주인과 여자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여자가 주인에게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아이힝거 부인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알 필요도 없었다. 아이힝거 부인은 그저 주인의 지시에 따라 완을 보살피면 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힝거 부인에게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에 대한 미움이 커져 갔다.

주인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인에 대한 불경이었다. 그녀가 주인의 욕구를 해결해 주는 창부였다면 이렇게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힝거 부인은 그런 마음을 억지로 꾹 찍어 누르며 다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 * *

완은 자신을 향하는 아이힝거 부인의 분노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왜 분노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아이힝거 부인을 포함해 지금 완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은 얀 베르그만을 마치 신처럼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말로써, 행동으로써 그러한 강요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완은 느낄 수 있었다.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새.

완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완에게 노래 부를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주인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정작 그들의 주인이 노래를 원하는지, 노래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완에게 노래 부를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새장을 벗어나는 것은 완의 의지에 따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를지, 부르지 않을지는 완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완은 그들의 강요에 따라 노래를 부를 생각은 없었다. 설사, 얀 베르그만이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노래를 들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완은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오후의 평화로운 하늘을 담고 있는 하늘과 그런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과 호수 위를 떠다니는 선박의 모습이 담겼다.

* * *

보덴호 북쪽에 있는 독일 프리드리히스하펜(Friedrichshafen)과 남쪽의 스위스 로만스혼(Romanshorn) 사이를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운항하는 페리선, MF Euregia호는 관광객은 물론 보덴호 남쪽에 거주하는 스위스 국적의 지역민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들에게는 프리드리히스하펜이 가장 가까운 대도시였다. 쇼핑을 하기 위해 차를 몰고 취리히를 가는 것보다 페리를 타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것이 훨씬 빠르고 편했다.

로만스혼 초등학교(Primarschule Romanshorn)의 미술 교사인 하이케 하버만(Heike Habermann)도 프리드리히스하펜에서 쇼핑을 마치고 다시 스위스로 돌아오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약한 뱃멀미를 느낀 그녀는 바람이라도 쐬면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3층 갑판으로 올라갔다. 그런 그녀의 눈에 갑판 난간에 기대어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수녀가 보였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장크트갈렌은 17세기까지 수도원의 지배를 받는 수도원령(修道院領)이었고, 지금까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수도원과 수녀원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한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의 비율도 다른 주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높았다.

하이케 하버만은 잠시 수녀를 바라보다,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말을 걸었다.

“참 아름다운 호수지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대화라도 나누면 울렁거리는 속이 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말을 건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이케 하버만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수녀가 영어로 답했다.

하이케 하버만은 그제야 수녀가 이국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호수지요?”

하이케 하버만이 다시 영어로 말하자, 수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네요. 참으로 아름다운 호수예요.”

“우리 지역 수녀원에 계신 수녀님인 줄 알았어요. 보덴호에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혹시 관광?”

하이케가 물었다.

하이케의 질문에, 수녀는 다시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호수로 향하면서 말했다.

“언니를 만나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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