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76화 (375/386)

Saṃsāra (윤회:輪回)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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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접경 지역에 있는 거대한 호수, 서울보다 조금 작은 536㎢의 면적을 가진 이 호수를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접 국가에서는 보덴제(Bodensee)라고 불렀다.

영어로 콘스탄스호(Lake Constance)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호수는 지역 주민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단순히 식수나 농업용수, 수산물을 제공하는 삶의 터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평균수심 90m, 최대 수심 254m, 담수량 55㎦를 자랑하는 보덴호는 ‘얼지 않는 호수’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었고,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오스트리아의 포어아를베르크, 스위스의 샤프트하우젠, 투르가우, 장크트갈렌 지역에 온화한 날씨를 선사해 주었다.

이 같은 기후 덕분에, 보덴호 인근은 중세 시대부터 왕족과 귀족, 고위 성직자들의 겨울 휴양지로 유명했으며, 현재까지도 돈 많은 유럽 부호들의 겨울 휴양지로 주목받고 있었다.

* * *

보덴호 남쪽 지역인 스위스 장크트갈렌(Kanton Sankt Gallen)도 부호들에게 사랑받는 지역 중 하나였다. 북쪽 독일 지역의 프리드리히스하펜(Friedrichshafen)이나 서부의 대표적인 관광도시 콘스탄츠(Konstanz)와 비교하면 편의 시설이나 접근성은 불편했지만, 그만큼 조용하고, 외부인이 잘 찾아오지 않았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구릉지대에 부호들이 겨울 별장으로 사용하는 저택들이 지어져 있었고, 그중 하나의 저택에 완이 있었다.

완은 3층에 있는 자신의 침실에서 창문을 통해 보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먼지 하나 없는 푸른 하늘을 담고 있는 잔잔한 수면, 그리고 수면 위로 날아가는 새들의 모습은 마치 거장이 온 힘을 기울여 그린 마지막 걸작처럼 위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려 내고 있었다.

하지만 창밖을 바라보는 완의 얼굴에는 그런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 같은 감정은 없었다. 그저 무감정한 시선으로 창밖에 시선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무감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년 가까이 같은 창문을 통해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자의로 이곳에 온 것도 아니었다.

마치, 새장 속에서 창살 너머를 바라보는 새처럼, 거장이 그려 낸 명작 같은 풍경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녀를 구속하는 또 다른 족쇄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움직였다.

답답했다. 이렇게 계속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는 영혼까지 답답함에 잠식되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은 침대 옆 작은 탁자에 올려놓은 종을 가볍게 흔들었다. 크지 않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문이 열리고 하얀 셔츠와 검은색의 폼이 넓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성이 모습을 보였다.

아이힝거 부인(Frau Eichinger). 완이 알고 있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산책하러 나가도 괜찮을까요?”

완이 말했다.

“산책 말씀이십니까?”

아이힝거 부인이 되물었다.

“안 되나요?”

“주인님께서 5시에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아이힝거 부인이 말했다.

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침은 4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완이 다시 아이힝거 부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주인’이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어요.

완의 눈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힝거 부인은 작게 고개를 숙인 후, 문을 닫고 나갔다.

그렇게 닫힌 문을 완은 계속 바라만 보고 있었다.

* * *

보덴호 남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장크트갈렌-알텐하인 공항(Flugplatz St. Gallen-Altenrhein)은 정규 항로라고는 하나뿐인 작은 공항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스나 같은 소형 프로펠러 비행기나 뜨고 내리는 다른 지방 공항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 있었다.

바로 보덴호 인근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부호(富豪)들의 비즈니스 전용기가 이 공항의 주요 고객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증명하듯, 에어버스에서 제작한 비즈니스 전용 제트기 ACJ319 한 기가 장크트갈렌-알텐하인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보덴호 상공에서 10번 활주로에 기수를 맞추었다.

-착륙하겠습니다.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기체 하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랜딩기어 수납부가 열리고, 랜딩기어가 내려가면서 발생하는 진동이었다.

“보덴호는 언제 봐도 아름답군요.”

크레디트 에우로파 그룹의 법무 이사 바이스 되블린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맞은편에 눈을 감고 앉아 있던 남자, 얀 베르그만도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보덴호의 전경이 들어왔다.

보덴호의 수면은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얀 베르그만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온 그에게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감정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얀 베르그만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얀 베르그만은 가장 마지막으로 감정을 느꼈던 순간을 떠올렸다.

반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 * *

완이 산책하러 나가기 위해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외출용 신발로 갈아 신으면 끝이었다.

하지만 아이힝거 부인에게는, 정확히 말하면 아이힝거 부인과 저택 안에 머무는 세 명의 남자에게는 준비가 필요했다.

호숫가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천천히 걷고 있는 완의 옆에는 아이힝거 부인이 같은 보폭으로 걷고 있었다.

그녀는 저택 안에서 입는 흰색 셔츠에 검은색 폼이 넓은 드레스 대신 스웨터와 베이지색 면바지 차림이었다. 산책이라는 행위에 자연스러워 보이는 복장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완을 따르는 사람은 아이힝거 부인만이 아니었다.

완의 반경 20m 안에는 마찬가지로 평상복을 입고, 완과는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완을 ‘경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주인의 귀한 손님인 완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은 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완은 ‘경호’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감시’.

그게 완이 느끼는 정확한 감정이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들은 완을 감시하고 있었다. 도망가지 않도록, 자해하지 않도록.

아이힝거 부인은 저택 관리인이었다. 메이드의 등급으로 보면 하우스키퍼(Housekeeper), 집안의 회계, 인사관리, 시설 관리를 책임지는 일종의 집사, 또는 메이드장(長)의 역할을 했다.

동시에 완의 곁에서 수발을 드는 레이디스 메이드(Lady's maid)의 역할도 수행했다. 물론 그녀가 빅토리아 시대의 레이디스 메이드처럼 완의 말동무가 되어 주거나 치장을 도와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완이 장크트갈렌의 고급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가장 가까이서 수발을 들었다. 식사를 챙기고, 건강 상태를 파악했다. 세탁과 완의 침실 청소도 그녀가 직접 담당했다.

하지만 완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았다. 완의 입장에서 아이힝거 부인은 그저 그녀 주인의 애완동물을 관리하는 사육사일 뿐이었다.

완은 옆에서 걷고 있는 아이힝거 부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답답한 마음에 산책을 나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그녀가 옆에 붙어 있으니,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완은 다시 시선을 움직여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호수(Washington lake)를 떠올렸다.

시애틀 머다이나에 있는 챔버가(家)도 워싱턴호숫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머다이나 쪽은 호숫가를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남쪽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호수와 접한 작은 공원이 있었다.

공원에서 바라보는 워싱턴 호수가 그리웠다. 그 공원이 그리웠다.

그곳에는 신시아 챔버가 있었고, 앤이 있었다.

나란히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보덴호보다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었다.

그때를 회상하자 완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둠이 조금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억지로 찍어 누르고 있었지만, 마음속의 어둠은 그녀를 잡아먹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주 작은 방심만으로도 고개를 치켜들었다.

완은 그런 어둠을 떨쳐 내기 위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한번 머리를 치켜든 어둠은 쉽게 물러가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마음을 야금야금 파고들고 있었다.

완은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아이힝거 부인이 알아차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둠을 다시 몰아내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하나밖에 없었다.

완의 머릿속에 과거의 어떤 날이 떠올랐다.

한규호와 마지막 통화를 했던 반년 전 바로 그날이 떠올랐다.

* * *

“그 전에 바꿔 줄 사람이 있군. 잠시 기다리도록.”

얀 베르그만은 그렇게 말하고는 완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완은 그 전화를 받아 들고 싶지 않았다. 한규호와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한규호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 같아서, 한규호의 목소리를 들으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그 전화를 받아 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완은 전화를 받아 들었다.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해 줘야 할 말이 있었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완이 말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죠?”

완이 다시 말했다.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만약 나에 관한 이야기로…….”

-그만.

한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있어. 더 이상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한규호의 목소리에 완은 작게 미소 지었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의도로 말을 끊었는지,

하지만 완은 말을 계속 이었다. 해 줘야 할 말이 있었다.

“나에 관한 이야기로,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따를 필요 없어요.”

-그만.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이미 살아 있지 않을 거예요.”

-그만해.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아 줘요.”

-그만하라고!

“그저, 당신이 원하는 길을 걸어가 줘요. 내가 행복할 수 있도록.”

-그만해! 그만하라고! 조용히 해! 더 이상 말하지 마!

한규호의 외침이 전화기를 타고 터져 나왔다.

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해야 하는 말은 전부 해 주었다. 더는 해 줄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 말을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보고 싶어요.

말을 끝낸 완은 힘을 주어 이빨을 사리물었다. 완은 그녀의 작은 몸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기를 얀 베르그만에게 건네주었다.

얀 베르그만은 전화기를 받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한규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전화기를 들고 있는 완의 손이 떨렸다.

그의 말이 기뻤다.

그의 말이 슬펐다.

기쁨과 슬픔이 그녀의 마음 안에서 마구 소용돌이쳤다.

완은 눈을 감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구 소용돌이치는 마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그녀의 손에 걸려 있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전화기를 받아 든 얀 베르그만이 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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