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ṃsāra (윤회:輪回) (8)
베드로 신부는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걸어가겠다고? 유럽까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두 다리로 유럽까지 걸어가겠다고?
“그……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베드로 신부가 물었다.
한규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드로 신부는 반박하고 싶었다.
불가능하다고, 사람의 몸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쩐지 가능할 수도 있다고, 눈앞의 이 남자라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정말로 두 다리만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언제라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대략 반년 후에 연락하겠습니다. 그 시점에 얀 베르그만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수 있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베드로 신부는 말없이 한규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능합니까?”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베드로 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6개월은 정보를 분류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입니다.”
베드로 신부의 대답이었다.
바티칸은 세계 최고의 정보 수집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한 평가는 전 세계에 깔려 있는 가톨릭 인적 네트워크, 즉 휴민트(HUMINT : 인간정보)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바티칸의 휴민트는 다른 나라 정보기관의 테킨트(TECHINT : 기술정보)와는 달랐다. 특정 정보를 기계적으로 수집하는 테킨트와 달리, 아날로그 방식인 휴민트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정보를 수집했다.
사람을 기반으로 하는 휴민트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광범위하고 다양한 정보 취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한계점이 되기도 했다.
화물 운송으로 비교하자면 전 세계에서 수집된 정보가 실려 있는 수천, 수만 개의 컨테이너가 끊임없이 바티칸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았다.
그 안에는 테킨트로는 수집할 수 없는 정보도 들어 있었지만, 그 정보가 어느 컨테이너, 어느 위치에 실려 있는지 빠르게 알아낼 수는 없었다.
컨테이너를 하나하나 개봉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화물을 하나하나 검사해서, 얀 베르그만과 관련 있는 정보와 관련 없는 정보를 분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엄청난 양의 정보가 바티칸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분명히 얀 베르그만의 위치와 관련된 정보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엄청난 양의 정보 안에서 얀 베르그만의 정보만을 빠르게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위치를 알아내기에는 부족합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반년이라는 시간은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정보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절대로 길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얀 베르그만을 특정해 사람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다면, 흔적이 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분명 흔적이 남습니다.”
다시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한규호가 직접 두 다리로 유럽을 향해 가는 동안, 베드로 신부가 얀 베르그만의 위치 정보를 수집하면서 흔적을 남긴다면 한규호의 수고는 헛수고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밀러 국장이 도와줄 겁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밀러……. CIA의 밀러 국장 말입니까?”
베드로 신부가 물었다.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테킨트로 진행할 겁니다. 정보가 수집된 이후, 전달, 분석하는 것은 바티칸의 방식으로 진행하면 흔적은 남지 않을 겁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베드로 신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뇌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기술로 특정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한다. 빠르게 분류된 정보를 바티칸의 방식으로 전달한다.
가능하다. 가능할 것 같다.
그렇게 답을 도출했다.
* * *
6개월 후에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받아 든 한규호는 모습을 감추었다.
중국으로 가는 밀항선을 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 그날 이후 한규호의 모습은,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한규호가 사라진 이상, 베드로 신부가 한국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바로 미국으로 향했고, 밀러 국장을 만나 얀 베르그만을 찾기 위한 그림을 그렸다.
얀 베르그만에 대한 직접적인 추적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일부러 그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대신 얀 베르그만의 주변 인물들에 주목했다.
17세기부터 유럽 금융시장을 지배해 온 크레디트 에우로파는 거대한 투자은행으로 성장했다. 그 거대한 자본주의 괴물을 얀 베르그만 혼자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말하면, 얀 베르그만을 도와서, 아니, 얀 베르그만의 의지에 따라 회사를 경영할 경영진이 필요했다.
그 경영진 중에서 얀 베르그만의 심복이 있을 것이라고 가설을 세웠다. 얀 베르그만이 죽지 않는 괴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런 얀 베르그만에게 충성을 다하는, 가신(家臣)의 역할을 하는 심복이.
한국에 있던 다니엘라 노이도르프가 그 증거였다.
다니엘라 노이도르프는 하이델베르크 의대을 졸업하고, 함부르크 의과대학 부설 병원의 뇌혈관외과 전문의였다. 그 말은 그녀의 앞에 부와 명예가 보장된 길이 펼쳐져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으로 왔다. 에우로파 프룩스 극동종자연구소 소장이라는 명분이었지만, 그녀의 임무라고는 서용석을 보살피는 것뿐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움직였을까? 돈? 명예?
아닐 것이다. 그녀를 움직인 것은 얀 베르그만을 향한 충성심이라고 베드로 신부는 판단했다.
만들어진 것이다.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당연했던 전근대 왕국의 신하들처럼, 그들은 얀 베르그만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이 다니엘라 노이도르프만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니엘라 노이도르프는 깃털일 뿐이다. 몸통이 있을 것이고, 그 몸통을 찾으면, 얀 베르그만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세 명의 사람을 찾아냈다.
크레디트 에우로파 금융그룹 CEO 겸 집행이사회 의장 헤르만 에릭슨(Hermann Ericson), 그룹 법무 이사 바이스 되블린(Weiß Döblin), 그리고 최고위기관리자(CRO) 울리히 뮐러(Ulrich Müller)가 그들이었다.
그 세 사람은 회사 내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으며, 동시에 대를 이어 크레디트 에우로파에 소속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세 사람의 후보가 확정되자, 바로 그들의 위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일은 밀러 국장을 위해 일하는 독립 요원, 세계 최고의 네트워크 보안 기업인 스쿠텀 시큐리티의 라이언 대길 김이 맡았다.
라이언 대길 김은 세 사람의 위치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시스템의 구조는 단순했다. 서유럽 네트워크에 기록되는 모든 위치 정보를 스크리닝하는 것이었다. CCTV에 녹화된 영상, 신용카드 사용 기록, 차량의 위치 등이 실시간으로 수집되고 분류되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역(Hamburg Hbf)에서 그들의 신용카드가 사용되거나, 주차관리 시스템에 공무 차량의 출입 기록이 남거나, CCTV에 그들의 얼굴이 찍히면, 스크리닝 시스템에 ‘함부르크역(Hamburg Hbf)’을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기록된 위치 정보는 베드로 신부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Hamburg Hbf’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흔적을 지우기 위해 수집된 위치 정보에 암호화 작업을 진행해야 했고, 암호화 작업에는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에 약속된 기호가 필요했다.
수신자인 베드로 신부와 발신자인 라이언 대길 김은 기준이 되는 암호 코드로 불가타성경(Biblia Sacra Nova Vulgata)을 활용했다.
5세기 초에 쓰인 로마가톨릭의 라틴어 정본이, 정확히 말하면 47번째 성경인 마태오복음서(Evangelium secundum Matthaeum)부터, 55번째 성경인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Epistula ad Galatas)’까지가 암호 표로 이용되었다.
시스템은 위치 정보를 구성하는 알파벳을 하나하나 분해해 4개의 숫자로 변환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역(Hamburg Hbf)의 H는 1898로 변환되었는데, 1898은 암호 표로 사용되는 첫 번째 불가타성경 ‘마태오 복음서’ 8장 9절의 8번째 단어, ‘habens’의 머리글자인 H를 의미했다.
모든 H가 1989로 변환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도행전’ 4장 9절의 세 번째 단어인 ‘hodie’를 지시하는 5493도 H를 의미했고, ‘고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2장 6절의 7번째 단어인 ‘haec’를 지시하는 8267도 H를 의미했다.
시스템은 위치 정보의 변환이 완료되면, 그렇게 만들어진 숫자를 이용해, 숫자 퍼즐인 스도쿠(Sudoku)를 만들었다.
총 81개의 블록으로 형성된 스도쿠 퍼즐의 최소 힌트 숫자는 17이었다. 그 말은 퍼즐 하나당 최대 64개의 숫자를 할당할 수 있었고, 16개의 알파벳을 전달할 수 있었다.
퍼즐을 풀어내는 것은 트레이시의 임무였다. 시스템에 의해서 만들어진 스도쿠 퍼즐은 아이패드 스도쿠 게임 앱을 통해 트레이시에게 전달되었다.
시애틀에 있는 챔버가(家)에 연금된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트레이시는 매일 게임 앱을 통해 전달된 퍼즐을 풀고, 그렇게 풀어낸 숫자를 순서에 따라 네 자리씩 잘라 직접 수기로 종이에 기록했다.
트레이시는 그렇게 만들어진 문서를 신시아 챔버에게 넘겨주었고, 신시아 챔버는 예전에 소말리아에서 한규호에 의해 목숨을 건진 에녹 노이스에게 문서를 전달했다.
현직 의사인 에녹 노이스는 의료 구호 활동을 이유로 2주에 한 번씩 베네수엘라로 향했고, 그곳에서 한규호와 같이 작전을 진행했던 도밍게즈에게 문서를 전달했다.
인편으로 문서를 전달받은 도밍게즈는 주베네수엘라 교황청 대사관의 마리아니 대사에게 문서를 넘겼고, 마리아니 대사는 외교행낭 배송 시스템을 이용해 바티칸의 베드로 신부에게 문서를 보냈다.
베드로 신부는 숫자를 다시 알파벳으로 변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73권 1334장, 3만 절이 넘는 성경을 전부 외우고 있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변환된 알파벳은 재조합되어 위치 정보가 되었고, 그렇게 확인된 위치 정보는 다시 베드로 신부의 머릿속에 있는 지도에 점으로 찍혔다.
몇 달 동안 진행된 작업을 통해 수많은 점이 찍혔고, 그렇게 찍힌 점들은 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방향성을 보이고 있었다.
* * *
모카포트로 추출한 에스프레소의 향기가 베드로 신부 사무실을 은은하게 채워 나갔다.
에스프레소가 담긴 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신 안토니오 몬시뇰이 베드로 신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연락이 없는가?”
안토니오 몬시뇰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아직, 연락은 없었습니다.”
베드로 신부가 책상에 놓여 있는 구식 전화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슬슬 반년이 되어 가는 것 같은데……. 과연 그가 도착할 수 있을까?”
“저는……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직 이게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네.”
안토니오 몬시뇰이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그렇게 말한 두 사람은 말없이 다시 커피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쓰디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안토니오 몬시뇰이 베드로 신부의 책상에 놓여 있는 문서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가? 찾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베드로 신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표가 보입니다.”
“그러한가…….”
안토니오 몬시뇰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저 커피 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그런 안토니오 몬시뇰을 바라보는 베드로 신부의 머릿속에 지명 하나가 떠올랐다.
Bodensee.
독일과 스위스, 오스트리아 접경 지역에 위치해 있는 보덴호수(湖水)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