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74화 (373/386)

Saṃsāra (윤회:輪回) (7)

마이애미와 카라카스를 주 2회 연결하는 아메리카 에어라인 항공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여객 운송 국제항공편이 단항된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에 비행기가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객은 끊겼어도, 화물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항공화물을 실어 나르는 국제특송 업체의 화물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시몬볼리바르 국제공항에 이착륙했다.

마이애미 국제공항에서 이륙한 페덱스의 MD-11F 화물기가 보고타와 메들린을 거쳐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에 착륙한 시간은 오전 03시였다. 하역과 급유를 마치고 중남미지역 허브 터미널이 위치한 마이애미로 돌아가는 화물기 안에는 주베네수엘라 교황청 대사관에서 바티칸으로 보내는 외교행낭(外交行囊, Diplomatic Pouch)이 실려 있었다.

암호장치로 봉인되어 있는 외교행낭은 외교적 특혜(diplomatic immunity)에 따라 검색이 면제되었고, 가장 빠른 유럽행 항공편에 실렸다. 페덱스의 유럽 허브터미널인 리에주에 도착한 외교행낭은 가장 빠른 운송편을 통해 로마로 운반되었다.

그렇게 전달된 외교행낭 안에는 주베네수엘라 교황청 대사관 마리아니 대사가 보낸 종이 뭉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카라카스의 추기경 집무실에서 도밍게즈 의원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은 종이 뭉치였다.

그렇게 바티칸에 도착한 종이 뭉치의 최종 도착지는 바티칸 도서관 비밀문서고 13문서 보관실이었다. 정확히는 13문서보관실 사서(司書) 사제직을 맡고 있는 질베르토 베드로 신부의 책상이었다.

방콕에서는 길, 한국에서는 파비오 콘티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베드로 신부는 종이 뭉치가 들어 있는 서류 봉투의 봉인 상태를 점검했다.

2중으로 된 봉인 스티커와 봉인실을 확인해, 봉투가 개봉된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베드로 신부는 그제야 봉투를 열고, 안에 들어 있던 종이 뭉치를 꺼내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종이 위에는 불규칙적으로 나열된 네 자리의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봉투가 열렸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봉투를 열고 종이 위에 적혀 있는 숫자를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베드로 신부가 아닌 다른 누구도 해독할 수 없었을 테니까.

설사 문서를 바꿔치기 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내용을 넣는 것은 불가능했다. 문서가 바뀌었다는 것을 베드로 신부에게 바로 발각당할 것이다.

종이 뭉치를 조심스럽게 책상에 펼쳐 놓은 베드로 신부는 책상 위 필통에 꽂혀 있는 연필을 꺼내 들었다.

숫자를 해독할 시간이었다.

* * *

두 시간 넘게 집중해서 숫자를 해독하던 베드로 신부는 펜을 내려놓고 잠시 목을 풀면서 굳어 있는 근육을 이완시켰다.

그렇게 몸을 풀고 있는데, 마치 베드로 신부의 휴식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베드로 신부는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저 문을 두드릴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내가 방해를 했나?”

문을 열고 들어온 노인, 바티칸 도서관 비밀문서고 13문서보관실 실장 겸 교회최고서기관인 조반니 안토니오 몬시뇰이 물었다.

“아닙니다. 마침 쉬려던 참이었습니다.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베드로 신부가 안토니오 몬시뇰을 맞이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맙네.”

안토니오 몬시뇰이 비어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베드로 신부는 버너에 모카포트를 올리며 물었다.

“오늘 몇 잔 드셨습니까?”

안토니오 몬시뇰은 이탈리아인이라면 최소 하루에 세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에스프레소도 그냥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모카포트로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추출 후 1분 안에 마시는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안토니오 몬시뇰은 대답 대신 옅은 미소만을 지은 채, 시선을 베드로 신부의 책상 위로 주었다.

“고생이 많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베드로 신부의 말에 안토니오 몬시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불규칙적으로 나열된 숫자를 해독하는 일은 베드로 신부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반년 전 그날.

서용석의 주소를 확인한 한규호가 백악관에 메일 한 통을 보내 달라는 부탁을 남겨 두고 떠난 그날 밤.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사라진 한규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그와의 인연이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그런 느낌이 현실화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가, 한규호가 다시 베드로 신부를 찾아온 것이다. 베드로 신부가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가톨릭 대학교 국제교류관에 그가 나타난 것이다.

베드로 신부가 문가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한규호가 밤새도록 쉬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바티칸의,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규호의 첫 마디였다.

숙소 안으로 들어온 한규호는 서용석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얀 베르그만과 통화를 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베드로 신부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한규호는 지난 밤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 기프티드가 되었는지, 왜 서용석을 찾아다녔는지, 왜 얀 베르그만을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었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함축된 한규호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 안에는 베드로 신부가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진실이 감추어져 있었다.

한규호는 얀 베르그만에 의해 기프티드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의 기억 일부가 흘러 들어왔다.

얀 베르그만은 기프티드이다. 그리고 그에게 발현된 능력은 불사(不死)였다.

죽지 않는, 아니, 죽을 수 없는 얀 베르그만은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고통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수 없다는 진실을 부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얀 베르그만은 기프티드를 찾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리면 찾아갔고, 설득하거나, 납치하거나, 때로는 돈으로 사들였다.

그렇게 확보한 기프티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진 기프티드는 무엇인지, 어떻게 발현되었는지, 유지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지, 제한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면담에서 시작된 연구는 보통 해부로 끝이 났다. 그렇게 연구를 계속하면서, 얀 베르그만은 기프티드에 대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샘플이 부족했다. 기프티드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은 수십 년, 길게는 한 세기 동안 기프티드를 찾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고, 그러한 상황은 얀 베르그만에게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얀 베르그만은 생각을 바꾸었다. 찾기 힘들다면 만들어 내기로.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서 기프티드라는 존재가 전쟁이나 전염병의 광범위한 확산, 극심한 빈부격차와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는 직접 그러한 상황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17세기부터 유럽의 자본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그는 자신이 가진 자금력을 이용해, 또는 자금력으로 확보한 무력과 기술을 이용해 전쟁을 일으켰고, 전염병을 유행시켰다. 북한을 찾은 것도, 북한의 핵개발을 도운 것도, 그러한 이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를 만날 겁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죽음을 안겨 줄 겁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베드로 신부는 잠시 동안 아무 말 못 하고 한규호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불사(不死). 그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신을 모시는 사제로서, 신의 섭리에 위배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완전 기억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됩니까?”

베드로 신부가 물었다.

“그의 위치. 그가 어디 있는지.”

한규호가 말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6개월 후. 그때 그가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려 주십시오.”

한규호가 말했다.

“반년 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베드로 신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반년 후에 알려 달라는 거지?

“그에게 숨을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한규호의 대답이었다.

* * *

한규호의 생각은 이러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유럽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밝혔다. 하지만 그 행위가 만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남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한규호가 자신을 찾아다닌다는 것도 알고 있고, 왜 찾아다니는지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니까.

만약 얀 베르그만이 죽고 싶었다면? 그랬다면 진즉에 한규호를 찾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한규호에 의해서 그에게 허락된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는 지금 당장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유한(有限)함의 기쁨을 알아 버린 지금, 조금 더 그 기쁨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이제야 다른 사람들처럼 약속된 끝이 있는 삶을 살아 보고 싶은 것이다.

그 증거가 서용석이었다.

얀 베르그만은 서용석에게 접근해 그에게 한규호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데려와 오랜 시간 동안 방치해 두었다.

얀 베르그만은 알고 있었다. 어떠한 방법을 쓴다고 하더라도, 서용석이 한규호를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얀 베르그만에게 서용석은 장난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자신을 찾기 위해 서용석을 찾아다니는 한규호, 그리고 부대원들의 복수를 위해 한규호를 찾아다니는 서용석을 무대에 올려놓고, 링사이드에서 관람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완을 납치한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자본과 정보를 가진 그는 완과 한규호의 사이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서용석이라는 장난감이 폐기 예정인 상황에서,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장난감을 원했을 것이다.

그게 완이었다.

“당장 죽고 싶어 하지 않는 얀 베르그만은 내가 유럽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 몸을 감출 겁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그가 도망친다는 말입니까?”

“도망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술래잡기와 같은 놀이, 단지 그뿐일 겁니다.”

“……술래잡기.”

“몸을 감출 겁니다. 몸을 감추고, 다시 내가 그를 찾아다니는 것을 지켜볼 겁니다. 포기하지 않도록, 내가 복수심을 계속 불태울 수 있도록, 내 주변에 피해를 주면서.”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말하는 한규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격한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저 감정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베드로 신부는 시선을 돌렸다. 일단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한규호의 감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얀 베르그만이 조금 더 살고 싶어졌다면, 그리고 목숨을 건 술래잡기를 하고 싶어 한다면, 한규호의 말대로 그는 몸을 숨길 것이다.

그가 몸을 숨긴다면? 찾아낼 수 있을까? 얀 베르그만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얼굴을 바꾼다면? 국가에 필적하는 자본력을 가진 그를, 적어도 수백 년 동안 축적된 교활한 지혜를 가진 그가 숨어 버린다면, 과연 한규호는 그를 찾아낼 수 있을까?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 신부는 다시 한규호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음 기회가 올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바티칸의,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베드로 신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왜 6개월 뒤인가? 그 질문이 남아 있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베드로 신부가 물었다.

“그가 숨지 못하도록, 흔적을 지우기 위해 필요한 시간.”

한규호가 말했다.

베드로 신부의 눈이 커졌다.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든, 어떠한 가짜 신분을 사용하든 일반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면 흔적은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돈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그자는 흔적을 찾아낼 것입니다. 제가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은 감출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다가가는지, 언제 다가갈 것인지를 감추기 위해 필요한 시간입니다.”

“……설마.”

“육로로 갈 겁니다.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두 다리로 걸어서.”

한규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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