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ṃsāra (윤회:輪回) (6)
아메리칸 에어라인(American Airlines) 소속 보잉 737 항공기가 라 토르투가섬(Isla La Tortuga) 상공을 관통해 우측으로 기수를 돌렸다.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선회한 737은 천천히 고도를 낮췄고,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의 관문 공항,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28번 활주로에 부드럽게 착륙했다.
미국 플로리다의 마이애미 국제공항과 시몬볼리바르 국제공항 사이를 주 2회 운행하는 이 비행기가 현재 미국과 베네수엘라를 연결하는 유일한 항공편이었다.
비행기는 거의 만석이었다. 하지만 비행기를 가득 채운 승객 중에 일반 여행객은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는 위험한 나라였고, 미 국무부는 베네수엘라를 여행 경보 4단계 ‘Do not travel’ 리스트에 올려서 자국민들에게 관광 목적의 베네수엘라 방문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 대부분은 정부 관계자, 또는 이 어려운 나라에서도 어떠한 식으로든 사업을 진행하는 비즈니스 관계자, 아니면 UN이나 경제협력기구 관계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들 중에는 베네수엘라 국민에 대한 구호 활동을 진행하는 비정부 구호단체 관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다른 승객들과 섞여 입국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에녹 노이스(Enoch Noyce)도 그런 구호단체 관계자 중 한 명이었다.
시애틀 중심가에 위치한 유서 깊은 종합병원 메이슨 메디컬 센터의 아동·청소년 정신과 담당의 중 한 명인 에녹 노이스는 가톨릭 계열 의료구호단체인 ‘성 고스마, 성 다미안회(Saints Cosmas and Damian Society)’ 소속 구호단원 자격으로 격주에 한 번씩 베네수엘라를 방문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수화물을 찾은 에녹 노이스가 입국장을 빠져나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 하나가 에녹 노이스에게로 다가왔다.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였다. 양복을 입었음에도 날카로운 인상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가 일반적인 비즈니스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다가온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미스터 톨레도.”
에녹 노이스는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 톨레도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톨레도라는 남자가 잡았다.
두껍고 거친 손이었다. 단순히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손이 아니었다. 평생 동안 거친 일을 해 온 사람, 예를 들어 군인처럼 거친 삶을 살아온 사내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손이었다.
다른 의사였다면 몰라도, 에녹 노이스는 잘 알고 있었다. 소말리아에서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그도 이런 손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일을 했었다.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톨레도는 에녹 노이스의 캐리어가 담긴 카트를 받아 들고는 몸을 돌렸다.
에녹 노이스는 널찍한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믿음직한 뒷모습이라고 생각했다.
* * *
톨레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에녹 노이스가 도착한 곳은 여장을 풀기 위한 호텔이 아니었다.
카라카스 남부에 있는 산 호세 어린이 병원(Hospital San Jose De Dios), 카라카스의 유일한 어린이 전문 병원이자,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병원 중 하나였다.
이곳이 에녹 노이스가 베네수엘라를 방문하는 2박 3일 동안 그의 일터이자 숙소가 되는 장소였다.
3일 후, 마이애미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에녹 노이스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진료와 수술, 현직 의사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세미나, 의대생을 위한 특강, 산호세 어린이 병원 지원 사업을 확대하기 위한 현장 조사와 보고서 작성 등이 예정되어 있었다.
호텔에 오고 가는 시간까지 아껴야 했던 에녹 노이스를 위해 병원 측은 6층의 병실 하나를 제공해 주었다. 일명 ‘특별 병동’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1인실이었다.
그 특별 병동 한쪽에 자신이 가져온 캐리어를 던져두고, 가운으로 갈아입기 위해 재킷을 벗던 에녹 노이스의 귀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에녹 노이스가 그렇게 말하자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공항에서 자신을 맞이한 톨레도와 톨레도보다는 조금 더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남자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자 톨레도는 문을 닫았다.
“먼 길을 오셨는데 쉬지도 못하시는군요.”
옷을 갈아입는 에녹 노이스를 보면서 남자가 말했다.
“돌아갈 때마다 항상 아쉽더군요. 매번 비행기를 탈 때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에녹 노이스가 남자에게 말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제가 원한 일입니다.”
옷을 다 갈아입은 에녹 노이스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침대에 올려놓은 자신의 서류 가방을 들어 올렸다.
시애틀에서 출발할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은 서류 가방이었다.
에녹 노이스는 가방을 열고, 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3일 전, 시애틀에서 신시아에게 건네받은 종이 뭉치였다.
남자는 건네받은 종이 뭉치를 바라보았다.
4725 5648 5716 3223 1154 3242…….
종이에는 연속된 네 자리의 숫자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고생은요. 저는 그저 전달할 뿐인데요.”
“확실히 잘 받았습니다. 그럼 2주 후에 다시 뵙게 되겠군요.”
남자의 말에 에녹 노이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렇게 되겠군요.”
“식사라도 같이했으면 좋겠습니다만, 박사님이 주무실 시간도 부족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권유드리기는 어렵겠군요.”
남자가 에녹 노이스에게 말했다.
“저녁 식사라……. 안 그래도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는데 말입니다.”
에녹 노이스가 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있는 남자를 보면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부탁이든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당연히 의원님께서 해 주실 수 있는 일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하는 일이 모두 마무리되면, 그때 이 병원에 제 자리를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에녹 노이스의 말에 남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저도 이제 슬슬 은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는 삶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도 들고.”
“선생님이라면 미국에도 자리가 많을 텐데요…….”
“자리도 많지만, 의사도 많죠. 거기에는 제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아직 위험한 곳입니다.”
“지금의 베네수엘라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도밍게즈 의원님이라면 기대를 걸어 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에녹 노이스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남미 독립전쟁 당시부터 명문가로 자리 잡은 도밍게즈 가문의 4남, 베네수엘라 방위군 특수부대를 이끌면서 카라카스의 치안을 지켜 온 남자, 그리고 카라카스를 지배하던 거대 범죄 카르텔 3대 세력을 궤멸시킴으로써 단숨에 민중의 영웅으로 떠오른 남자, 현재 베네수엘라의 야당 중 젊은 지식인층으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정당 ‘Alianza Bravo Pueblo(두려움 없는 민중 연대)’를 이끄는 남자, 가리발도 몬타노 도밍게즈(Garibaldo Montano Dominguez)는 미소 띤 얼굴로 에녹 노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녁 식사는 나중에, 제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그때 얻어먹도록 하지요.”
에녹 노이스가 말했다.
“최고의 저녁을 대접해 드릴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도밍게즈가 고마움 가득한 시선으로 에녹 노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 * *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인 바티칸시국을 나라로 인정하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바티칸은 외교 관계의 주체가 아니었다. 바티칸은 교황이 통치하는 ‘세속의 영토’, 즉 땅을 의미할 뿐이었다.
공식적인 해석에 따르면 가톨릭의 주체는 Sancta Sedes, 영어로는 Holy See라고 표현되는 성좌(聖座)였다.
즉 성좌라는 최상위 개념 아래 교황청(Curia Romana)이라는 하위 개념이 있고, 교황청의 하위 개념 아래, 바티칸이라는 세속의 영토가 있는 것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아무런 가치 없는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국제외교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국제사회에서 하나의 주권국가로 인정받는 바티칸시국이 타국과 수교 관계를 맺고, 외교 공관을 설치할 때, 그 외교 공관의 국제법상 지위를 어떻게 정의하고 분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교황청과 국제사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청의 외교관과 외교 공관에, 기존 외교 관계에서 사용하는 용어 대신 교황청 대사관과 교황청 대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를 적용함으로써 차별점을 두었다.
바티칸 대사관을 의미하는 ‘Vatican Embassy’ 대신에 교황청 대사관을 의미하는 ‘Nuntiatura Apostolica’를, 대사를 의미하는 ‘Ambassador’ 대신, 교황청 대사를 의미하는 ‘Apostolic Nuntio’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다.
현재 주베네수엘라 교황청 대사를 맡은 이가 바로 프란세스코 마리아니(Francesco Mariani) 주교였다.
이날 마리아니 대사는 대사관이 아니라 베네수엘라 추기경좌 성당인 카라카스 대성당(Caracas Cathedral)에 있었다.
베네수엘라 가톨릭교회의 최고 수장인 발타사르 엔리케 포라스 카르도조(Baltazar Enrique Porras Cardozo) 추기경과의 면담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추기경 집무실, 마리아니 대사는 베네수엘라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추기경과 마주 앉아 있었다.
“대사께서 이곳에 오신 지 얼마나 되셨죠?”
추기경이 물었다.
“……기억도 안 납니다. 하도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마리아니 대사의 답에 추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니 대사가 전임 교황청 대사였던 피에트로 파롤린(Pietro Parolin) 주교의 뒤를 이어 스물네 번째 교황청 대사로 임명받은 해가 2013년이었다. 그리고 2013년은 조짐을 보이던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해였다.
“억울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추기경이 물었다.
베네수엘라가 아닌 다른 나라였다면 교황청 대사라는 이름만으로 귀빈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에 취임한 마리아니 대사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교황청 대사이자 성직자로서 경제 위기로 고통 받는 베네수엘라 국민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정신적, 종교적 지주 역할을 해야 했다. 단순히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빈민 구호와 같은 실질적 지원 사업도 진행해야 했다.
지원 사업에는 돈과 인력이 필요했고, 마리아니 대사는 베네수엘라인이 아니면서도 베네수엘라에 부임한 대사라는 이유로 바티칸과 유럽을 위시한 여러 선진국에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다.
“주님께서 정해 주신 자리입니다. 어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마리아니 대사가 말했다.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티칸도 어찌 보면 하나의 나라였고, 조직이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의자의 수는 줄어들었고, 그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Prelate’라는 이름의 고위성직자들에게는 정치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눈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에게는 정치 놀음을 할 여유 같은 것은 없었으리라.
아니, 그저 어떻게 하면 빈민가에 빵 하나를 더 나눠 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유아들의 사망률을 낮출지를 생각하는 마리아니 대사에게 정치 놀음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추기경은 마리아니 대사의 마음을 이해했다. 현세의 지옥이라는 베네수엘라에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지켜 내기 위해, 절망과 싸워 온 두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말 없는 대화로 서로의 마음을 다독인 두 사람이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을 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게.”
추기경의 대답에 문이 열리고, 비서 사제가 모습을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 하게.”
추기경의 말에, 비서 사제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나간 후, 또 다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시간 전, 산 호세 어린이 병원에서 에녹 노이스에게 종이 뭉치를 건네받은 도밍게즈 의원이었다.
추기경 집무실로 들어온 도밍게즈는 추기경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그간이라고 해 봤자, 고작 보름인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 어서 일어서게.”
추기경이 미소 띤 얼굴로 도밍게즈에게 말했다.
“항상 건강을 챙기셔야 합니다. 연세가 있으시니까요.”
“아직 여기에서 할 일이 남았으니 주님께서 금방 부르시지는 않으시겠지.”
추기경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 나누시게. 그리고, 끝나면 저번처럼 바로 갈 생각인가?”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할 말은, 가기 전에 차나 한잔하고 가게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추기경님.”
도밍게즈의 대답을 들은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인 후,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자신의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추기경이 밖으로 나가자, 집무실 안에는 손님인 마리아니 대사와 도밍게즈 의원만이 남았다.
“대사님도 그동안 별일 없으셨는지요?”
도밍게즈 의원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 끼고 온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금 전 에녹 노이스에게 건네받은 종이 뭉치를 꺼내어 마리아니 대사에게 건넸다.
“별일이 있겠습니까?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적어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마리아니 대사는 그렇게 말하며, 건네받은 종이 뭉치를 바라보았다.
4725 5648 5716 3223 1154 3242…….
종이 뭉치에는 비규칙적으로 나열된 네 자리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마리아니 대사는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이 종이 뭉치를 건넨 도밍게즈 의원 또한 숫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수고하셨군요.”
마리아니 대사가 말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리아니 대사가 종이 뭉치를 자신의 가방에 넣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