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72화 (371/386)

Saṃsāra (윤회:輪回) (5)

* * *

오전 6시가 조금 지난 시간, 오하이오주 데이튼에 위치한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Wright-Patterson Air Force Base) 23R 활주로에서 비행기 한 대가 이륙을 위해 가속하기 시작했다.

록히드마틴사(社)가 미 공군에 납품한 전자전(電子戰) 지원기 EC-130은 4기의 Allison T-56 터보프롭 엔진이 뿜어내는 추력 4,500마력의 힘으로 날아올랐다.

표면적으로 이번 비행의 목적은 새롭게 개량된 콤파스 콜(Comapass Call : 적 대공무기 사정거리 밖에서 적군 지휘, 통제, 통신 시설에 대한 ECM교란) 장비에 대한 점검이었다.

작전 계획을 수립한 AFRL(Air Force Research Laboratory:미국 공군 연구소)담당관도, 계획을 승인한 연구소 소장도,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 사령관도, 그리고 직접 비행기를 조종하는 파일럿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비행기 안에는 특별한 손님 두 사람이 탑승해 있었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공군부 장관(Secretary of the Air Force)을 포함한 공군 최상층부의 몇 사람뿐이었다.

CIA 방첩분석센터(The Counterintelligence Center Analysis Group)의 센터장과 밀러 국장이 바로 그 특별한 손님이었다.

전자전 지원기인 EC-130 내부는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전자전 지원기의 특성상 기체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전파를 차단했으며, 동시에 4기의 터보프롭 엔진이 발생하는 소음과 진동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기내 내부를 물리적으로 도청하는 것도 불가능케 했다.

진동과 소음이 가득한 기내에서 밀러 국장은 CIA 방첩분석센터장이 건네준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밀러 국장의 손에 들린 보고서는 CIA 구성원들에 대한 감찰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반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그 사건을 계기로 CIA를 다시 장악한 밀러 국장은 인사이동을 통해 인적쇄신을 진행했고, 동시에 감사실을 통한 내부 감찰을 지시했다.

근 10년 동안 없었던 강력한 감찰이 진행되었고, 감찰 결과는 백악관과 의회에 보고되었으며, 공식 기밀문서로 보관되었다.

하지만 감사실에서 진행된 감찰은 일종의 미끼였다.

감사실의 감찰이 진행되는 동안, CIA 디지털혁신국(The Directorate of Digital Innovation)에서는 보다 강도 높은 비밀 감찰이 진행되었다.

CIA 내에서도 최고의 인재만이 모여 있다는 디지털혁신국의 감찰은 보다 더 촘촘하게 진행되었고, 타국 정보기관이나 해외 기업들과 연계해 미국의 국익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요원들의 리스트가 만들어졌고, 윌리스 웨버 미 상원 기밀보호 위원장에게만 전달되었다.

하지만 밀러 국장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백악관도, 의회도, 기밀보호위원장도 알지 못하는 세 번째 감찰을 진행한 것이다.

해외 정보기관의 동향 정보 분석을 담당하는 방첩분석센터(The Counterintelligence Center Analysis Group)를 동원해 기존 감찰 시스템과는 차별화된 프로토콜을 진행했고, 그 결과물을 확인하기 위해 가장 안전한 공중의 회의실인 EC-130에 탑승한 것이었다.

보고서에는 유럽계 벌지 브래킷, 특히 크레디트 에우로파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요원들의 리스트가 작성되어 있었다.

일종의 살생부였다.

물론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고 해서 실제로 목숨을 잃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옷을 벗거나, 오랜 시간 동안 감시를 당하게 될 것이다.

“발밑에 폭탄이 있었군.”

보고서를 확인한 밀러 국장이 말했다.

“저도 놀랐습니다. 그저 투자은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거미줄을 깔아 놓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방첩분석센터장이 말했다.

밀러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센터장의 말에 동의를 표한 후, 다시 한 번 더 리스트를 확인해 보았다.

크레디트 에우로파(Credit Europa).

일명 CE. 17세기 동인도 회사에 출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럽 최초의 투자 은행 중 하나이자, 21세기로 접어든 지금까지 세계 금융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대형 유럽계 벌지 브래킷.

밀러 국장이 크레디트 에우로파에 집중하게 된 것은 스튜라는 코드명을 가진 한규호 때문이었다. 아니, 덕분이었다.

CIA도 크레디트 에우로파가 북한 핵개발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이익을 얻기 위해 리스크가 큰 사업에 뛰어든 것이 단지 크레디트 에우로파만의 행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CIA도 미국계 투자은행을 앞세워 북한과 같은 적성 국가에 자본을 침투시키기도 했었다. 비록 그것이 옳은 행동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크레디트 에우로파가, 그리고 크레디트 에우로파를 소유한 베르그만 가문이, 베르그만 가문의 당주인 얀 베르그만이 기프티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최근에 알게 되었다.

반년 전, 한국에서 발생한 사건, 북한군 출신 공작원이 한국에 침투해 한규호와 접촉한 사건의 배후에 크레디트 에우로파가, 정확히는 크레디트 에우로파가 지분을 통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네덜란드 곡물 메이저 에우로파 프룩스(EUROPA Frūx)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기프티드에 대한 베르그만 가문의 관심이 작용하고 있었다.

기프티드라는 존재를 알게 된 지 채 100년도 되지 않은 CIA로서는 상상도 못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발생한 사건의 중심에 있던 한규호, 그리고 적게는 수백 년, 길게는 천 년 가까이 기프티드의 존재를 알고 추적해 온 바티칸이 아니었다면, CIA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정보 수집력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밀러 국장은 얀 베르그만이, 베르그만 가문이 어떠한 이유로 기프티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지, 기프티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나중 문제였다. 지금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은 미국에, 특히 CIA 내부에 뻗어 있을지 모르는 크레디트 에우로파의 그림자를 찾아내고, 그것을 걷어 내는 작업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크레디트 에우로파가, 베르그만 가문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기술, 인력, 그리고 자본 정도라는 것이었다.

크레디트 에우로파가 운용할 수 있는 자본의 규모는 웬만한 국가 단위를 넘어섰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될 수는 없었다. 국가에게만 허용된 군사력이나 첨단 군사과학기술을 이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통신용 상업 위성을 보유할 수는 있었지만, 해상도 15cm 미만의 군사용 정찰위성을 띄울 수는 없었다.

밀러 국장은 다시 한번 리스트에 적힌 이름을 읽어 내려갔다.

이름이 적힌 이들 모두가 크레디트 에우로파와 관련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관련되어 있든 되어 있지 않든 밀러 국장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밀러 국장에게, 그리고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은 관련자들이었다.

그들 모두를 찾아내기 전까지, 네 번째, 다섯 번째 감찰이 계속 진행될 것이다. CIA를 넘어, 정계, 재계, 학계 등 모든 분야로 영역을 넓혀 가면서.

힘든 싸움이 되겠군.

밀러 국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보고서 페이지를 넘겼다.

* * *

마리아의 병원 방문이 예약되어 있는 월요일 오후. 챔버가에는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예약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마리아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신시아 챔버는 앤 챔버의 침대에 앉아 뚱한 표정으로 눈물만 흘리고 있는 마리아의 등을 손으로 쓸어 주면서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마리아는 마치 신시아 챔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신시아 챔버는 그 모습이 나쁜 징조라는 것을 알았다. 앤 챔버의 부재가 그동안 옅어지고 있던 마리아의 상처를 다시 헤집어 놓은 트리거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우리 딸, 엄마 좀 봐 봐. 엄마가 하는 소리 안 들려요? 우리 착한 마리아, 엄마 좀 봐 봐요.”

그렇게 간청하고 있음에도, 마리아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시아 챔버는 정신적인 한계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 그래도 신시아 챔버는 힘든 시기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었다. 규의 실종, 앤의 부재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은 마리아뿐만이 아니었다.

신시아 챔버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해서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속으로 억지로 찍어 누른 신시아 챔버는 다시 한 번 더 마리아의 눈을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마리아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때, 그녀의 등 뒤, 방문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아, 이렇게 엄마 속 썩이면 나중에 앤 언니에게 엄청 혼난다.”

신시아 챔버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문가에는 트레이시가 서 있었다. 그녀의 한쪽 손에는 A4 크기의 종이 묶음이 들려 있었다.

트레이시를 바라본 것은 신시아 챔버만이 아니었다.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눈물만 흘리고 있던 마리아도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신시아 챔버에게 가볍게 윙크로 신호를 건넨 트레이시는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마리아와 눈을 맞추었다.

“마리아, 앤 언니가 뭐라고 그랬어?”

“…….”

“벌써 까먹은 거야? 앤 언니가 알면 속상해할 텐데?”

“……들으라고.”

“응? 뭐라고?”

“엄마 말…… 잘 듣고 있으라고.”

“그래. 기억하고 있네. 앤 언니가 엄마 말 잘 듣고 착하게 있으라고 했는데, 나중에 앤 언니가 돌아왔을 때 마리아가 엄마 말 안 들었다고 하면, 마리아 때문에 엄마가 힘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앤 언니가 얼마나 속상할까? 안 속상할까?”

마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앤 언니가 속상했으면 좋겠어?”

마리아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그러면, 엄마가 슬퍼했으면 좋겠어?”

마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역시 마리아는 잘 알고 있네. 좋아, 오늘 일은 엄마랑 내가 앤 언니에게는 비밀로 해 줄 테니까, 엄마 손잡고 병원 다녀올 거야?”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신시아 챔버를 바라보았다.

이내 으앙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마리아는 두 팔 벌려 신시아 챔버의 품에 안겨 왔다.

“괜찮아. 우리 아기. 괜찮아, 괜찮아. 우리 착한 마리아.”

조심스럽게 마리아를 안은 신시아 챔버는 막내딸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렇게 안심을 시켰다.

신시아 챔버의 품에서 한바탕 울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마리아는 조금씩 울음을 그쳐 가기 시작했다.

그런 마리아에게 트레이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엉엉 우니까 우리 이쁜 마리아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었네요. 의사 선생님 보러 가야 하는데, 예쁜 얼굴로 가야겠지? 자, 얼른 세수하고 오세요.”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시아를 꼭 껴안고 있던 두 팔을 풀고,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런 마리아의 뒷모습을 두 사람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항상 숨어서, 소리 없이 우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마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트레이시가 말했다.

“앤을 키울 때도 그랬지만…… 혹시라도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마리아에게 또 다른 상처를 안겨 주는 것이 아닐까……. 두려울 때가 있어요.”

슬픈 표정을 한 신시아가 말했다.

“똑똑한 애예요. 너무 똑똑해서, 그래서 자꾸 감정을 감추려 하니까 그게 안에서 곪은 거죠. 그리고 신시아는 잘하고 있어요. 바르게 큰 지금 앤의 모습이 그 증거니까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묶음을 신시아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신시아가 종이 뭉치를 받아 들면서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리고 오늘 저녁은 제가 준비하도록 할게요. 기대하세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는 신시아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 * *

시애틀 나인쓰 애비뉴(9th ave.) 1100번지에 위치한 버지니아 메이슨 메디컬 센터(Virginia Mason Medical Center)는 1920년에 설립된 오랜 역사와 실력 있는 의료진을 바탕으로 워싱턴 주를 대표하는 민간 비영리 병원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마리아가 방문해야 하는 소아청소년정신과 병동은 본관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9번가 교차로 쪽에 위치해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 병원에 대한 공포를 조금이라도 경감시켜 주기 위해, 입구와 로비에는 귀여운 동물 인형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물을 뚝뚝 흘리던 마리아도, 어느새 병원 로비를 뛰어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즐겁게 웃고 있었다.

신시아 챔버는 그런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기린과 코끼리가 그려진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가 신시아에게 다가왔다.

“챔버 부인, 안녕하세요. 한 주 동안 잘 지내셨죠?”

반가운 얼굴로 신시아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의 가슴에는 에녹 노이스(Enoch Noyce)라는 명찰이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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