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ṃsāra (윤회:輪回)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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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신시아 챔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녀의 침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어둠이었다. 어둠은 마치 잠식하려는 듯, 신시아 챔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 공포와 어둠을 잠시 주시하던 신시아 챔버는 어둠에 대항하려는 듯,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미약한 빛이었지만, 액정을 통해 나오는 빛에 의해 신시아 챔버를 압박하던 어둠은 한 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듯, 신시아 챔버는 어둠을 잠시 노려본 뒤에야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 43분. 다른 사람들은 깊게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신시아 챔버에게는 그러한 단잠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수면 장애를 겪고 있었다.
밤이 찾아와도,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워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이 들어도 그리 오랜 시간 잠들지 못했고, 그마저도 얕은 선잠이었다. 바람이 창문을 스치는 작은 자극에도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수면 장애보다 신시아 챔버를 더욱 괴롭히는 것은 얕은 잠과 깸 사이에 반복되는 악몽이었다.
의사는 과도한 스트레스에 기인한 심리적 불면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수면제를 먹으면서, 스트레스 요인을 해소하라는 처방을 내렸고, 병원에서 처방해 준 수면제가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신시아 챔버는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았다.
수면제 의존증이나 비각성활동증상과 같은 부작용이 걱정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수면제가 신시아 챔버를 괴롭히는 불면증이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날, 홍콩에서 규가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그날 이후 시작된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는, 규를 되찾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신시아 챔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잠을 청해 봤자, 허사라는 것을 그녀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니, 잠 못 드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다시 잠들었을 때, 그녀에게 찾아올 악몽이 더욱 두려웠다.
* * *
물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실로 나온 신시아 챔버는 주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발을 멈추었다.
주방 안에서는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불빛과 소리를 인지한 신시아 챔버는,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차를 우려내기 위해 물을 끓이고 있는 젊은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규가 물을 끓이고 있었다.
-어머, 깨신 거예요? 지금 차 마시려고 하는데, 신시아도 같이 한잔하시겠어요?
그 뒷모습에서 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규가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미소를 얼굴 가득 담고서 신시아 챔버에게 차를 타 주기 위해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러나 신시아 챔버의 기척을 눈치챈 젊은 여자가 몸을 돌린 순간, 젊은 여자의 얼굴이 신시아 챔버의 눈동자에 담긴 그 순간, 눈앞에 보이던 규의 모습도, 들려오던 규의 목소리도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제가 잠을 깨웠나요?”
금발 머리를 한 백인 여자, 젊은 여자라는 것을 제외하면 규와 전혀 닮지 않은 트레이시 테일러가 신시아 챔버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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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공작원들이 미국 요원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국정원 안전 가옥을 습격한 반년 전 그날의 사건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영토에서 이스라엘 공작원 두 명이 죽고, 신 베트의 고위 간부가 현장에서 체포된 대형 사건이었지만, 공개되기에는 얽혀 있는 문제가 너무나도 민감하고 복잡했다.
국제법을 어겨 가면서 타국 영토에서 작전을 진행한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었고, 선거를 앞둔 미국도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정부도 이스라엘 요원인 카멜리아를 불법적으로 구금하고 있었다는 원죄가 있었기에, 최대한 조용히 덮자는 미국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이스라엘은 사건과 관련된 모든 기록은 기밀로 봉인하기로 합의했다.
3국은 외교적으로 그런 합의를 이끌어 냈지만, 내부적으로는 피해와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이스라엘이었다. 신 베트의 핵심 구성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다비드 바이츠만이 한국에 구금되어 있었다.
바이츠만을 돌려받기 위해 한국 정부와 협상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지만, 두 나라의 거리만큼, 서로 원하는 것이 달랐다. 이스라엘은 한국을 달래기 위한 카드를 고심해야만 했다.
단지 거기에서 그친 것도 아니었다. 그 사건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미국이 모든 잘못을 이스라엘에 전가했다. 자중하라는 경고를 한 것이다. 이스라엘로서는 억울했지만, 미국의 경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스라엘 3대 정보 조직 모사드와 신 베트, 아만(AMan: אמ״ן, 이스라엘 군사정보부)이 진행하고 있던 모든 해외 공작과 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뼈아픈 결과였다.
모든 잘못을 이스라엘에 전가한 미국은 외교적인 피해를 최소한으로 봉합했지만, 내부적으로 변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프랭크 보머 대통령이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를 핑계로 재선 출마를 포기해야 했고, 대통령 선거를 앞둔 워싱턴 정가는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로 후폭풍을 감내해야 했다.
가장 유력한 차기 CIA 국장 후보로 주목받던 수석작전요원 앤드류 로이즈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낙마설이 돌았던 밀러 국장은 미 상원 기밀보호위원회 윌리스 웨버 위원장과의 연대를 통해 다시 CIA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미국 북서부 머다이나에 위치한 챔버가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앤 챔버가 챔버가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그 자리를 트레이시가 메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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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끓이고 있는 트레이시의 얼굴을 보면서, 신시아 챔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실망을 느꼈다. 그 실망이 채 형태를 이루기도 전에, 실망감보다 더 큰 슬픔이 뒤따라 그녀의 마음을 잠식해 오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트레이시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에요.”
신시아 챔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신시아 챔버를 트레이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전히 제대로 못 주무시나 보네요.”
슬픔이 묻어 있는 옅은 미소로 트레이시의 질문에 대답을 대신한 신시아 챔버는 트레이시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
“……트레이시도 자다가 깼나요?”
“퍼즐을 풀다 보니 이 시간이 되어 버렸어요.”
트레이시가 손에 든 아이패드를 들어 보였다.
‘스도쿠(Sudoku)’라고 불리는 가로 아홉 칸, 세로 아홉 칸의 숫자 퍼즐이 아이패드 화면에 떠 있었다.
“……너무 무리해서 하지는 말아요.”
신시아 챔버도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트레이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판만 더, 한 판만 더 하다 보니……. 그래도 오늘은 이제 슬슬 자려고요. 잠들기 전에 차라도 한잔 마실까 싶어서 나왔어요. 신시아도 차 한잔하시겠어요?”
차를 마시겠냐는 말에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다시 올라오는 슬픔을 억지로 누르며 신시아 챔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나는 물이면 충분해요.”
신시아는 냉장고로 다가가 생수병을 꺼내 들었다.
신시아 챔버는 규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이후, 차를 마시지 않았다. 아니, 마시지 못했다.
규가 애용하던 찻잔과 티 포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찻잔과 생수병을 들고 거실로 나온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트레이시는 슬픔이 배어 나오는 신시아 챔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트레이시가 이 집에 머문 지 다섯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 다섯 달 동안 신시아 챔버의 얼굴은 날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홍콩에서 실종된 여자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앤 챔버마저도 해외 봉사활동이라는 명목으로 그녀의 곁을 떠나 있었다.
막내딸인 마리아가 있었지만, 신시아 챔버를 위로해 주기에, 마리아는 너무 어렸다.
트레이시는 시간이 갈수록 생기를 잃어버리는 신시아 챔버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흔들고는 스도쿠 퍼즐이 화면에 떠 있는 아이패드로 시선을 옮겼다.
신시아 챔버에게 어떠한 말을 해 준다고 하더라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트레이시는 잘 알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스도쿠 퍼즐을 풀어내는 트레이시에게 신시아 챔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힘들지 않아요?”
“네?”
“퍼즐 푸는 거.”
신시아 챔버가 트레이시의 태블릿 화면에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그저 숫자만 겹치지 않게 채우면 되는걸요.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요.”
트레이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신시아 챔버에게 보여 주었다.
* * *
“마리아가 병원에 가는 날이 월요일이었던가요?”
가로 9칸, 세로 9칸의 정사각형 블록, 여든한 개의 숫자를 모두 채운 트레이시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면서 물었다.
“맞아요. 내일모레, 오후 3시.”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한때는 베르나(Verna)라는 이름으로 베네수엘라 빈민가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던 어린 소녀는 이제 마리아 챔버라는 이름을 가진 챔버가의 막내딸이 되어 있었다.
베네수엘라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풍요로운 삶,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양어머니와 언니가 그녀의 곁을 지켜 주었지만, 베르나이던 시절에 입은 정신적 상처는 옅어질지언정 치유되는 상처는 아니었다.
정신의학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 입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극복한 것처럼 보여도, 꾸준한 치료가 병행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폭발한 마음의 상처는 우울증이나 자해, 자살 충동과 같은 끔찍한 피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신시아 챔버는 마리아의 마음속 폭탄이 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주 월요일 오후에 소아정신과 전문 병원으로 데려갔다.
“며칠 전에 마리아가 앤의 방에서 몰래 울고 있었어요.”
트레이시가 2층, 마리아의 방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신시아 챔버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번에 병원에 가면 선생님과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요. 차라리 그 나이의 다른 아이들처럼 울고 떼쓰고 하면 오히려 좋으련만…….”
마리아는 언제나 자신의 곁을 지켜 주던 언니, 앤 챔버의 부재를 견뎌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언니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해외 봉사활동을 나갔다는 것을 알았지만, 몇 달 동안 얼굴은커녕 목소리 한번 들려주지 않는 언니에 대한 그리움을 견뎌 내기에 마리아는 아직 너무 어리고 약했다.
“제가 조금 더 놀아 주도록 할게요. 앤의 빈자리를 메울 수는 없겠지만…….”
트레이시의 말에 신시아 챔버는 미소를 지었다.
“부탁해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트레이시는 그녀의 미소에 진한 슬픔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이제 진짜 자야겠어요. 머리가 멈춘 것 같아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생했어요.”
신시아 챔버도 자리에서 일어나 트레이시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