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70화 (370/386)

Saṃsāra (윤회:輪回) (3)

* * *

김형원은 끝내 대답을 듣지 못하고 병실을 나가야만 했다.

김형원마저 나가 버리자 병실에는 한규호와 진통제를 맞고 잠들어 있는 박종연만이 남게 되었다.

한규호는 침대로 다가가 박종연을 바라보았다.

박종연의 얼굴에는 마치 아무런 고통도, 근심도 없는 것처럼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한규호는 그런 박종연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박종연의 가슴팍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박종연의 평온함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한규호의 손이 박종연의 가슴팍에 닿고, 10여 초가 지나자, 감겨 있던 박종연의 눈꺼풀이 반응을 보였다.

열린 눈꺼풀 사이로 눈동자가 드러나고, 그렇게 드러난 눈동자가 한규호에게 초점을 맞추기도 전에, 박종연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규호냐.”

“네. 접니다.”

한규호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박종연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한규호를 담았다.

박종연은 침대 옆에 서 있는 한규호의 모습을 확인했지만, 잠시 동안 한규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한규호의 모습이 진짜인지, 아니면 꿈인지를 파악하려는 듯,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 것은 통증이었다. 부상 부위에서 시작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천천히 퍼져 나가면서, 박종연에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한규호의 모습이 진짜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박종연은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병실 그 어디에도, 한규호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라고 잠깐 보냈습니다.”

정지혜를 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한규호가 말했다.

박종연의 시선이 다시 한규호를 향했다.

“할 이야기가 있구나.”

박종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한규호의 눈을 통해서, 일부러 정지혜를 내보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한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용석에 대한 이야기냐?”

“서용석은 앞으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한규호의 말에 박종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 서용석이 더는 살아 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너와 비슷한 느낌이 들더라.”

박종연이 허공으로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

“그날, 그 장소에서 묶여 있다. 그런 느낌.”

“……그렇더군요.”

“이야기는 해 봤냐?”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더냐.”

“나에게서 부하들의 목숨값을 받아 내기 위해 열심히 몸을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괴물 같더라. 10년 전보다 오히려 신체 능력은 더 좋아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손도 못 쓰고 당해 버렸지.”

“준비를 많이 했더군요.”

“북한의 지시를 받았다고 하더냐?”

“스스로의 선택이었다고 하더군요.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는 그날 죽었고, 성불하지 못했고, 원한을 갚기 위해 떠도는 원귀가 되었다고.”

박종연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 이해가 되는군.”

“그렇더군요.”

“그 백인 놈의 정체는? 서용석이 알려 주더냐.”

“얀 베르그만. 유럽계 투자은행의 소유주.”

한규호가 말했다.

“……은행 소유주가 왜 북한을 찾아간 거지?”

“그자가 북한에 원심 분리기를 제공해 주었다더군요.”

“원심…… 분리기?”

“농축우라늄 추출용 원심 분리기.”

“……핵탄두.”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투자은행 소유주가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 북한 핵 개발을 지원하려고 한 거지?”

“은행과는 관계없습니다. 그자의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 일을 벌인 겁니다.”

“개인적인 욕망?”

“한반도에 전쟁의 씨앗을 심기 위해서.”

박종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전쟁이 나고, 이 땅이 생지옥이 되어 버리면, 나 같은 놈이 생길 확률이 높아진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 같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존재들. 미국에서는 기프티드라고 부르더군요.”

가라앉아 있던 박종연의 눈동자에 분노가 맺히기 시작했다.

“진짜로…… 개자식이었군.”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용석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널 찾아 온 거냐?”

“모르고 있더군요. 내가 말해 주기 전까지. 알았다면 그자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들어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서용석을 한국으로 데려온 장본인이 그자였다고?”

“나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더군요.”

“……놀아났군. 그 자식의 손아귀 위에서. 너도, 나도, 그리고 서용석도.”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종연은 침묵 속에 숨은 의미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어디 있는지 아는구나. 찾아갈 생각이구나.”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갈 생각이냐?”

“그럴 생각입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박종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가슴 가득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내쉬고서는 한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우리 약속했었지.”

“…….”

“을지로에서 그 김치찌개 먹으면서, 그 자식 멱 딸 때 나도 같이 가기로. 그렇게 약속했었지. 기억하고 있냐?”

박종연의 말에 한규호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랬었죠.”

“조금 기다려 줄 수는 없겠냐.”

한규호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군요.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상황이 바뀌었다고?”

“그때는 형님 혼자였고. 지금은 아니란 말입니다.”

박종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팀장님은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한규호의 말에 박종연은 눈을 감아 버렸다.

흔들리던 눈동자는 눈꺼풀 뒤로 감추어졌지만, 그가 느끼는 미안함과 죄책감은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통해 더욱 강하게 표출되었다.

한규호는 그런 박종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팀장님을 대신해 지혜 씨, 그리고 요한이를 보살펴 줘서 고맙다고 할 겁니다. 그런 사람이니까.”

박종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규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치료 잘 받아요. 쓸데없는 고집부려서 주변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박종연의 가슴팍으로 손을 가져갔다.

해야 할 이야기를 모두 전했다.

서용석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얀 베르그만을 찾았다. 진도팀을 대신해 한규호 자신이 빚을 갚아 줄 것이다.

그러니 박종연은 이제 자신의 인생을 살아라.

“항상 궁금했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던 박종연이 말했다.

가슴팍으로 다가가던 한규호의 손이 멈추었다.

“항상 궁금했었는데, 묻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뭐를 말입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한규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박종연의 가슴팍에 닿았다.

“나 때문이었는지. 그게 항상 묻고 싶었지.”

박종연이 말했다.

한규호는 박종연이 어떤 질문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을 피하고 싶었다.

손은 이미 박종연의 가슴팍에 닿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박종연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박종연이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한규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 때문이었냐.”

한규호도 박종연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자를 끝까지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나 때문이었던 거냐?”

박종연이 물었다.

한규호는 아무런 대답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박종연의 가슴팍에 손을 올린 상태로, 그저 박종연의 눈을 마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확실히 보았다. 총을 맞고도 꿈쩍도 하지 않던 그 괴물 같은 놈이, 너의 손에 들려 있는 칼에는 반응을 보이는 것을, 칼에 찔릴 때마다 고통 가득한 비명을 질러 대는 것을. 내 눈으로 분명하게 보았지.”

“…….”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분명히 그때 너는 끝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목숨을 거둘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때만큼 좋은 기회가 없었을 텐데, 그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그때 끝장을 내지 않았을까?”

“…….”

“나 때문이 아닐까?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

“그자의 목숨을 끊으면…… 너도 죽게 되는 거냐?”

“…….”

“그자의 목숨을 끊으면, 너도 죽기 때문에, 그러면 나를 살려서 데려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끝을 내지 못했던 거냐?”

박종연이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품어 왔던 질문을 꺼냈다.

한규호의 시선이 천천히 박종연을 향했다.

“그렇게 해야 했으니까.”

한규호가 말했다.

“그렇게 해야…… 했다고?”

“팀장님과 안 상사님의 마지막 명령이었으니까.”

“…….”

“기억합니까? 안 상사님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

“…….”

“11챠리를 발동하면서 안 상사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모두 살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

“윤 중사님이 쓰러졌을 때도, 팀장님이 우리보고 먼저 가라고 하면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납니까? 여기서 죽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 시간 후에 따라가겠다. 한 시간 동안 체력을 회복하고 따라갈 테니 최대한 길을 뚫어 놓아라. 모두 다 살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다.”

박종연과 한규호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모두 함경북도 무산군의 어느 야산을 향하고 있었다.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여 있던, 다른 진도팀원들과 함께 걸었던 그 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방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안 상사님, 그리고 팀장님처럼.”

박종연의 시선은 안성종 상사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한군의 추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11챠리를 발령한 안성종 상사가 한규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네가 진도5다. 팀장님을 끝까지 모셔라.

안성종 상사의 모습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 자리에 이규철 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죽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1시간 동안 체력을 회복하고 따라간다. 여기서 회복할 시간 동안 최대한 길을 뚫어라. 만약 체력을 회복하는 동안에 추적대가 따라붙는다면 우리가 여기서 발목을 잡는다. 그 정도까지 따라와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는 큰 차이가 없겠지. 그 부분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은 감안하지 않는다. 적들이 1시간 이내의 거리까지 접근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이게 가장 최선이다. 모두 다 살기 위해서는. 먼저 이동하면서 길을 뚫는다. 출발하고 1시간 안에 교전의 징후를 포착했다면, 최대한 빠르게 탈출한다. 그때 지휘권은 한규호가 가진다.

“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명령이었고, 설사 명령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규호의 말에 박종연은 다시 한번 더 눈을 감았다. 질끈 감은 그의 눈 사이로 물기가 배어 나왔다.

“왜…… 너 혼자서…….”

박종연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묻어 있었다.

박종연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눈물과 분노가 뒤섞인 눈동자로 한규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왜! 왜 너 혼자서 다 짊어지려고 하는 거냐!”

한규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박종연의 가슴에 닿아 있는 손에 천천히 진기를 주입했다.

박종연은 저항하지 못했다. 그의 눈꺼풀이 감기고, 금세 의식의 끈을 놓아 버렸다.

한규호는 잠든 박종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평온함과는 달리 옅은 고통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한규호는 그런 박종연의 얼굴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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