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ṃsāra (윤회:輪回) (2)
* * *
흔히 대학 병원이라고 불리는 상급 종합병원에는 VIP등급의 환자를 위한 병동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하루 입원료로 적게는 100만 원에서 많게는 수백만 원이 들어가는 VIP 병동은 다른 1인 병실과는 달리 단순히 입원료를 많이 지불할 능력이 있다고 해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은 아니었다.
VIP 병동의 가치는 보안에 있었다. 누가, 언제, 어떠한 이유로, 얼마 동안 입원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 보안시스템, 과장되게 말하면 환자의 치료보다 프라이버시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로 VIP 병동은 보안을 중요시했다.
병원 측은 이러한 VIP 병동을 사생활의 보호를 최우선시하는 재벌 기업의 총수, 국회의원과 같은 고위 정치인, 유명 연예인 같은 특정 계층에게만 개방했다.
경기도 성남 분당에 위치한 한 대학 병원도 그와 같은 VIP 병동을 보유하고 있었다.
새벽 4시가 가까운 시간, VIP 병실이 자리하고 있는 11층에는 평소와는 달리 여러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남자가 병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고,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 앞에도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복도는 고요함 속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닫고 그저 주변을 경계하고만 있었다.
11층 복도에서 들려오는 유일한 소리라고는 의료 기구가 담긴 스테인리스 트레이를 들고 걸음을 옮기는 간호사의 걸음 소리뿐이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11층을 빠져나온 간호사가 한층 아래에 있는 간호사 스테이션에 도착하자, 야간 당직을 서고 있던 다른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귓속말로 물었다.
“김 선생, 김 선생, 누구야? VIP?”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 갑작스럽게 이송되어 온 환자는 빠르고 은밀하게 11층 VIP 병동으로 옮겨졌지만,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새벽 시간임에도 병원장과 정형외과 담당 교수가 호출되었고, 경찰이 11층을 봉쇄했다. 간호사들에게는 이동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VIP 병동을 전담하는 간호사들도 처음 겪어 본 상황이었다. 그녀들도 사람이었고, 궁금증이 일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받은 간호사는 잠시 주위를 살펴보면서 눈치를 보다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잘…… 모르겠어요.”
김 선생이라 불린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주변을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본 후,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에야 더욱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그쪽…… 같아요.”
“그쪽?”
“……어둠의 세계. 그쪽.”
“조직폭력배?”
그렇게 귓속말을 나눈 두 사람은 긴장감 서린 눈으로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김 선생이라는 간호사는 한 번 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더욱 목소리를 낮춰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환자는 팔과 다리에 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 외상은 일반적인 외상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관절이 역으로 꺾이는 외상이 낙상이나 교통사고 같은 일반적인 사고로 발생할 수 있는 일반적인 외상이 아니라는 것을 간호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병실 앞을 지키는 남자들의 모습도 평소와는 달랐다.
경호원이 VIP 병실 앞을 지키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병실을 지키고 있는 남자들은 사설 경호업체의 경호원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검은 양복을 입지도 않았고, 실내에서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를 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은 그동안 보아 왔던 경호원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마지막으로 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위암감이었다.
VIP 병실에 어울리지 않는 환자도, 환자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는 어떻게 넘어간다고 해도, 간호사가 환자의 바이털을 확인하는 동안 병실 한쪽 구석에 서서 환자와 보호자를 지켜보던 두 사람의 장년 남자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은 일반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매서웠다.
그 위압감을 간호사는 감지했고, 그들에게서 어둠의 세계, 조직폭력집단의 고위 간부라는 이미지를 떠올린 것이다.
* * *
조직폭력집단 고위 간부로 의심받은 두 사람의 장년 남성,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 정진웅, 그리고 정보위원회 위원장 김형원은 무거운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박종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병원장이 직접 찾아와서 대략 한두 시간 후에 수술에 들어간다고 알려 왔다. 수술을 집도하는 담당 교수가 빠른 수술보다 확실한 수술이 필요하다고 판단을 내렸고, 다른 병원의 교수까지 호출해 수술팀을 구성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병원으로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VIP 병실 수배를 요청해 온 곳이 청와대 직속 국가안보실이었고, 민정수석비서관이 직접 병원까지 찾아와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마약성 진통제를 맞고 잠들어 있는 박종연을 바라보던 민정수석 정진웅은 옆에 서 있는 김형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친구는?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정진웅의 질문이 김형원은 손목에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김형원이 시간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통제에 취해 있는 박종연을 제외한 사람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보였다.
국정원 요원 곽용신이었다.
“도착했습니다.”
곽용신이 그렇게 말하고 옆으로 한발 비켜서자 곽용신에게 가려져 있던 다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규호였다.
새로 등장한 인물이 한규호라는 사실을 확인한 정지혜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규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몇 시간을 참아 온 눈물을 터트렸다.
한규호의 품 안에서 정지혜의 등이 요동쳤지만, 울음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정지혜는 그렇게 소리를 죽인 채로, 한참을 울었다.
자신의 품 안에서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정지혜를 가볍게 안은 한규호는 병실 한쪽에 서 있는 민정수석 정진웅을 바라보았다.
한규호의 시선에서 자리를 비켜 달라는 의미를 읽어 낸 민정수석 정진웅은 김형원을 바라보았고, 김형원이 양해를 구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웅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금세 입을 다물고는 문 옆에 서 있던 곽용신과 함께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병실 안에는 한규호와 정지혜, 김형원,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박종연만이 남았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난 후, 한규호에게 안겨 있던 정지혜의 몸에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 한규호의 품 안에서 얼굴을 뗀 정지혜가 아직 눈물이 남아 있는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친 데는…… 없어요?”
한규호는 그런 정지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궁금한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 남자는 누구인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어떻게 집 주소를 알아냈는지, 지금 그 남자는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남자가 또는 그 남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다시 찾아오는 것은 아닌지, 더 궁금한 것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지혜는 무엇보다 한규호의 안부를 가장 먼저 물어보았다.
“괜찮아요.”
한규호는 정지혜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면서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이제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을 들은 정지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물을 훔쳐 내며 한규호의 품에서 벗어났다.
한규호는 그런 정지혜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분간은 다른 곳에서 지내야 할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죠?”
정지혜는 한규호의 말을 이해했다.
당분간 집에 돌아갈 수 없다. 국가에서 마련해 준 안전 가옥에서 신변 경호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전 남편, 이규철 대위가 작전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때도, 같은 경험을 했었다.
“그 남자가 다시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나요?”
정지혜가 물었다.
그녀가 말한 ‘우리’의 범주 안에는 박종연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규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서용석이 다시 정지혜를 찾아올 일은 없었다. 그는 살아 있지 않았으니까.
“요한이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겁니다. 그래도 걱정된다면 서울로 불러올리도록 하지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제는 괜찮으니까.”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지혜를 다시 가볍게 안아 주었다.
한규호의 품에서 정지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 좀 하고 와요.”
한규호가 정지혜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자리를 비켜 달라는 숨은 의미를 알아들은 정지혜는 고개를 돌려 잠들어 있는 박종연을 잠시 바라보고는 몸을 움직여 병실 밖으로 나갔다.
정지혜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제야 한규호는 김형원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한규호가 물었다.
“청와대.”
김형원이 대답했다.
한규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와대에서 직접 사람이 왔다는 이야기는 박종연과 정지혜의 신변을 청와대에서 직접 관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김형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을 보았음에도 한규호는 잠시 동안 김형원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두 사람 곁을 지키고 싶었다. 박종연과 정지혜가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곁에서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한규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김형원과 국정원, 그리고 청와대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김형원이 물었다.
“곽용신 요원에게 말해 놓았습니다. 그가 보고서를 작성할 겁니다.”
한규호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김형원은 한규호의 대답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규호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규호도 곽용신의 보고서로 정리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정리되기에는 하룻밤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북한 특수 부대 출신 서용석이 전직 대북작전팀 대원 박종연을 습격했다는 사실은 이날 밤 몇 시간 동안 일어난 사건 중에서 그다지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스라엘 첩보 기관의 작전 요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판교에 있는 국정원 안전 가옥을, 그것도 CIA 요원이 그곳에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습격해 왔고, 그들 중 이스라엘 첩보 기관 신 베트의 고위직 간부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판교 안전 가옥 습격 사건에는 국정원, CIA, 신 베트, 주한이스라엘대사관, 주한미국대사관, 주미한국대사관, 외교부, 미 국무부, 그리고 청와대와 백악관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모든 사건의 중심에 한규호가 있었다. 서용석도, 이스라엘 요원 카멜리아와 CIA 요원 트레이시도 전부 한규호와 관련되어 있었다.
한규호가 조금 더 설명을 보탰다.
“다음 대통령 선거와 대통령 자신, 그리고 CIA 수석작전요원 앤드류 로이즈가 이번 일에 깊숙하게 관여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문제를 크게 만들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설사 트집을 잡으려 해도 곽용신 요원이 작성하는 보고서로 대응할 수…….”
“무엇을 하려는 거냐?”
김형원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규호의 말을 끊었다.
한규호는 김형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문제를 일으킨 것을 질책하는 상사의 눈이 아니었다. 한규호를 걱정하는 눈이었다.
“……마지막 매듭을 풀어낼 겁니다.”
한규호가 김형원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김형원은 그런 한규호의 눈에서, 처음 독립 요원이 되겠다고 말하던 예전의 한규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습니다.”
한규호가 대답했다.
“다시 돌아오기는 하는 거냐?”
김형원이 물었다.
그러나 한규호는 김형원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