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ṃsāra (윤회:輪回) (1)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도시.
오피스텔 지하 4층 주차장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고,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한 남자가 크게 하품을 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떡진 머리, 아직 피곤이 잔뜩 묻어 있는 얼굴을 한 국정원 요원 김승섭이었다.
김승섭은 머리가 깨질 것 같다는 표정으로 구석에 주차된 차량을 향해 다가갔다.
김승섭이 다가가자 메르세데스 벤츠에서 나온 C클래스 카브리올레가 마치 주인을 알아보는 강아지처럼 전조등을 반짝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샀어.”
김승섭은 잠시 차량을 바라보다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차 문을 열었다.
김승섭은 태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붕이 열리는 컨버터블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컨버터블이 김승섭의 목표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태국에서 죽을 뻔한 경험을 하고 나니, 인생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이 들자, 지붕이 열리는 오픈카가 떠올랐다. 단지 그 이유뿐이었다.
타이밍 좋게, 청와대에서 금일봉을 받았다. 2천만 원. 계약금으로 딱 적당한 액수였다.
운명이구나. 질러 버리라는 하늘이 뜻이구나.
그렇게 계시를 받은 김승섭은 벤츠 전시장을 찾아가 2천만 원이 적혀 있는 수표를 C클래스 카브리올레의 계약금으로 지급했다.
물론 4천만 원이 넘는 할부금을 60개월 동안 나눠 내야 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삼각별이 달린 차 열쇠가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다지 고민 없는 결정이었지만, 막상 차를 받으니, 훌륭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 좋은 날, 뚜껑을 따고,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바람을 맞으며 교외의 도로를 달려 보니, 이게 사람 사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나, 그런 후회도 들었다. 이제 더 즐기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컨버터블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서울은 지중해성 기후의 캘리포니아 말리부 바닷가가 아니었다. 겨울은 추웠고, 여름은 너무 더웠다. 봄에는 황사와 미세먼지가 심해 뚜껑은커녕, 창문도 열 수 없었다.
또 지붕을 여는 것이 그다지 좋은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뚜껑을 열면 자연스럽게 외부 소음이 들어왔고, 외부 소음을 막기 위해 음악을 크게 틀어 놓으면 양아치 소리를 들었다. 사실 양아치 소리를 들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뚜껑을 따는 게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거지.”
김승섭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동 버튼을 눌렀다.
반년 전, 그날, 야밤의 그 사건이 있고 얼마 후, 태국에서 돌아온 후 계속 대기 상태에 있던 김승섭은 발령을 받았다.
새롭게 만들어진 위장 기업, 위치는 경기도 하남시 외곽.
“젠장. 그 양반은 하필 또 그런 곳에 회사를 차려서.”
김승섭은 투덜거리면서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았다. 매끈한 유선형의 컨버터블 차량이 특유의 엔진 소리를 내면서 움직였다.
* * *
하남시는 크게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된다.
일단 신장로를 중심으로 구성된 하남 구도심, 하남종합운동장 인근의 미사강변신도시, 검단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연녹지, 그리고 43번 국도를 따라 펼쳐져 있는 하남시 외곽지역이 그것이다.
검단산 서측 사면, 하남시 중심가에 사는 사람들은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하산곡동 산 18번지에 샌드위치 패널로 만들어진 공장과 창고가 몇 동 자리를 잡고 있었고, 43번 국도와 하산곡동을 연결하는 좁은 시멘트길 끝에 ‘동원 석재 유통’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미사강변도시의 오피스텔에서 출발한 김승섭의 카브리올레가 바로 그 좁은 시멘트 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간판 밑으로, 허름한 창고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김승섭의 차가 모습을 드러내자, 창고 한쪽에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는 그렇게 얼굴을 찡그린 채로, 김승섭의 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고, 차에서 나온 김승섭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형님, 나도 담배 한 대 줘요. 아, 진짜. 대가리 뽀개지겠네. 어제 술을 너무 처먹었나 봐.”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 홍성민은 그런 김승섭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김승섭에게 담뱃갑을 건네며 말했다.
“너 계속 저거 타고 다닐 거야?”
홍성민의 시선이 주차되어 있는 김승섭의 컨버터블로 향했다.
홍성민 옆에 쭈그리고 앉은 김승섭은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여기 지하철이 있습니까? 버스가 다닙니까? 저거 안 타면 출근을 어떻게 한대? 형님이 나 데리러 올 겁니까? 모셔 오고, 모셔다드리고?”
김승섭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입에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김승섭도 뭔가 수를 쓰기는 써야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벤츠는 이곳에 어울리는 차량이 아니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시선을 끈다는 이야기였고, 그들은 시선을 끌어서는 좋을 것이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팔아. 팔고, 딴 거 사면 되잖아. 쪽팔려서 뚜껑도 못 딴다며.”
홍성민이 말했다.
“차라리 차를 한 대 더 사고 말지, 저놈은 못 팔아.”
“왜?”
“감가상각이 어마무시해서.”
“보증 남았는데도?”
“보증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외제 차는, 사서, 일단 시트에 앉으면 3할 깎고 간다니까. 더군다나 쿠페나 컨버터블은 더 하고.”
김승섭이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타고 다녀라. 정신 나간 사장 아들이라고 생각하겠지.”
“그 양반을 아빠라고 불러야 하나?”
“다행히 성도 같네. 가서 아빠~ 아들 출근했어요. 그렇게 말해 봐.”
홍성민은 그렇게 말하고,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듯, 웃음을 지었다.
“홍가 형님.”
“응?”
“나 진짜 한 대만 때려도 돼요?”
“안 돼.”
“젠장.”
김승섭은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담배를 땅에 비벼 껐다.
“그나저나. 그 양반은 오늘부터 출근 아닙니까?”
김승섭이 말했다.
“벌써 왔어. 지금 사장실.”
“아따. 그 양반. 빨리도 왔네. 그나저나 우리 사장님, 아니, 아버지는 몸도 성치 않은 양반에게 뭘 시키려고 그러나.”
“아버지 같은 소리 하네.”
홍성민은 그렇게 말하고, 피우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말했다.
“진도 출신이라더라.”
“진도? 전라남도 진도? 뭐야?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학연, 지연으로…….”
홍성민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김승섭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 진도? 백금산의 그 진도팀?”
“그래.”
홍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동원 석재 유통 사장실의 주인인 김형원은 손수 탄 믹스 커피를 소파에 앉은 남자의 앞에 놓아 주었다.
“그래. 오랜만이군. 반년 정도 지났나?”
“그 정도 되었습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 박종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믹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
“이사는?”
“다 끝냈습니다.”
“정지혜 씨였나? 전근은?”
“……다음 달 예정입니다.”
“그런가. 아다리가 잘 안 맞았나 보군.”
김형원은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박종연과 정지혜의 경호를 국정원에서, 정확히는 정보위원회에서 담당하라는 지시가 청와대로부터 직접 내려왔다.
김형원은 박종연에게 이번 기회에 아예 국정원에서 일을 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는 제의를 했다.
서용석의 죽음이 확인되었고, 북한에서 서용석의 행동은 단독 행동이었음을 확인해 주었지만, 혹시 모를 위험에서 박종연 자신과 정지혜, 그리고 이요한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직에 속해 있는 것이 더 좋다는 이유였다.
박종연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정보위원회는 박종연을 위해 하남 미사강변도시에 아파트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미사강변도시에 국정원 안전 가옥이 있었고, 김형원이 새로 만든 위장 기업의 위치도 하남시 외곽이었다.
박종연과 정지혜의 거처가 하남으로 결정되면서, 분당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정지혜를 미사의 초등학교로 전근하는 절차를 진행했는데, 행정상에 지연이 발생한 듯했다.
“몸은 좀 어떤가?”
김형원은 그렇게 말하며 앞에 앉아 있는 박종연을 바라보았다.
옷 위로 보기에는 그다지 이상해 보일 것이 없었다.
“일상생활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박종연이 말했다.
김형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종연은 팔꿈치와 무릎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조직이 괴사하는 최악의 경우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두 번의 큰 수술과 4개월이 넘어가는 입원 치료를 통해서 팔과 다리를 지켜 낼 수는 있었다.
“고생 많았겠군.”
김형원이 그렇게 말하며 커피 잔을 집어 드는 박종연의 손을 바라보았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박종연은 팔과 다리를 지켜 냈지만, 운동 능력을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걸음은 더 늦어졌고, 그의 팔은 믹스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어 올리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김형원은 이미 보고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김형원이 바라는 박종연의 역할은 실제 필드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요원이 아니었으니까.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믹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박종연은 잠시 김형원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무슨 일을 하게 됩니까?”
김형원은 박종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일단. 직책은 총무과장이지만, 알다시피 중소기업의 특성상 직책과 임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고, 당분간은 총무 일을 하면서, 여러 업무를 정확히 파악해 보도록 하지. 특히 도매 쪽 루트를 뚫는 데 박 과장의 인맥이 필요할 거야.”
김형원의 말에 박종연이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석재 회사에서 일을 했으니, 도매가 어떻게 돌아갈지는 잘 알고 있겠지? 안 그래도 전체적인 그림을 다시 그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니, 잘되었군.”
부상을 회복하고, 국정원 소속으로 출근하는 첫날이었다. 정확히는 국정원 산하 위장 기업에 출근하는 첫날이었다.
그런데, 위장 기업을 이끄는 김형원은 마치 진짜 석재 유통 회사의 사장이라도 된 것처럼 도매 쪽 루트를 확보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일하다가 모르는 거 궁금한 거 있으면, 나나 홍 과장에게 물어보고.”
박종연은 잠시 김형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종의 코드 같은 겁니까?”
김형원은 박종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간판만 걸어 놓은 위장 기업은 노출되기 쉽지. 그래서 진짜 매출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영업이익을 꼭 낼 필요는 없지만, 밖에서 보기에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의 손실이어야 하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나?”
“석재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서 저에게 함께하자고 하신 겁니까?”
김형원 사장은 작게 미소 짓고는 테이블에 있던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담배?”
“끊었습니다.”
박종연이 말했다.
김형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다음에 박종연에게 말했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몇 년 안에 팀을 하나 구성할 생각이지.”
“무슨 팀 말입니까?”
“긴급대응팀.”
“국정원에서 특수 부대를 보유한다는 의미……입니까?”
“국정원이 아니고, 정보위원회.”
김형원의 말에 박종연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정보위원회, 처음 들어 보는 단어였다.
“부대라고 말할 정도의 규모는 아니지. 특별한 상황에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팀, 진도 같은 그런 팀.”
“그 팀에 저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박종연이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경험은 대체할 수 없으니까.”
김형원이 말했다.
박종연은 잠시 김형원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녀석에 대한 소식은 없습니까?”
박종연의 말에 김형원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이 담겨 있는 그런 미소였다.
“살아 있다면 나보다 자네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않을까?”
김형원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벌써 반년이 지났군.”
김형원이 말했다.
박종연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런 박종연을 보면서, 김형원은 반년 전, 그 끔찍했던 밤을 다시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