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67화 (367/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50, 完)

한규호는 서용석을 바라보았다.

서용석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가슴에는, 정확히 심장이 위치한 부위에는 한규호의 손에 들려 있던 전투용 대검이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대검이 박힌 부위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서용석의 몸을 따라 흘러내려 체력 단련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단 한 동작이었다.

한규호는 낮고 빠르게 파고드는 서용석의 심장에 대검을 찔러 넣었다. 칼날과 손잡이를 구분하는 가드가 가슴에 닿도록 깊숙하게 찔러 넣었다.

단번에 목숨을 끊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에게 필요 없는 고통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서용석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예우였다.

한규호의 의도대로, 서용석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즉사했다.

하지만 그는 바닥에 쓰러지지 않았다.

심장에 칼이, 뚫고 들어간 그 순간에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마치 석상처럼,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숨을 거두었다.

한규호는 그런 서용석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서 이규철 대위와 안성종 상사, 정의성 상사, 윤재운 중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만족했을까? 먼저 떠난 전우들은 서용석의 죽음으로 만족하고 있을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전우들은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전우들이 만족했다고 해도, 한규호가 만족할 수 없었다.

서용석은 종착점이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통과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한규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렇게 서용석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더 이상의 생명 활동 징후가 느껴지지 않는 서용석의 시신도, 그 시신을 바라보며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지금의 한규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얀 베르그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를 만날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를 찾아낼 것이다.

CIA에게 의뢰할 수도 있다.

얀 베르그만을 만날 수만 있다면 랭리가, 밀러 국장이 어떠한 조건을 제시하든 한규호는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물론 조건의 이행은 얀 베르그만을 만난 이후가 될 테고, 한규호는 살아 있지 않을 것이기에, 약속은 공염불이 되어 버리겠지만, 한규호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바티칸 소속의 그 남자도 이용 가능한 카드 중 하나였다.

바티칸이 도울지, 돕지 않을지 지금에서는 알 수 없지만, 한규호가 바티칸이 말하는 테스티모니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절대로 한규호의 요청을 그냥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CIA가, 바티칸이 한규호를 돕지 않는다면?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들이 돕지 않는다고 해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 시티은행, 상하이 홍상은행(HSBC), 영국 바클레이스에 한규호의 차명 계좌가 있었다.

계좌에 들어 있는 돈을 모두 합치면 미화로 1천만 달러, 한화로 120억 원이 넘었다.

정보 상인을 움직이기에 부족하지 않은 돈이다.

설사 정보 상인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얀 베르그만이라는 이름과 크레디트 에우로파라는 조직을 알아냈으니, 한규호가 가진 신체 능력을 이용해 압박해 들어갈 수 있다.

크레디트 에우로파 본사를 폭파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위직 임원들을 하나하나 암살하는 방법도 있었다.

피해가 가중되면, 얀 베르그만은 어떠한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것이다.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하고, 이용할 수 있는 카드는 모두 이용해 그를 찾아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한규호의 머릿속에 완이 떠올랐다.

그러나 한규호는 빠르게 완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이곳으로 오면서 그녀에게 어떠한 의미도 두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에 따르면, 이미 숨이 끊어진 서용석처럼 완도 한규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설사, 그녀가 카드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해도 식양이 가진 네트워크는 동남아시아에 국한되어 있었다. 유럽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얀 베르그만을 찾는 데 그녀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지금 당장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빠르게 머릿속에 떠오른 완을 지워 버린 한규호는 문을 향해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때, 주머니에 들어 있던 전화기가 진동했다.

한규호는 진동을 느꼈지만, 발을 멈추지 않았다.

전화를 무시했다.

지금 한규호에게 해야 할 일은 여자, 서용석을 한국에 데려왔다는 다니엘라 노이도르프를 찾는 것이었다.

서용석은 한규호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려 주었다고 말했다.

만약 서용석의 말처럼 다니엘라 노이도르프가 이 시설에서 한규호의 도착을 확인하고 서용석에게 알려 주었다면, 그리고 그녀가 아직 이 시설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한규호는 찾아낼 수 있었다.

만약 한규호의 도착을 알려 주고 바로 시설을 떠났다면?

그녀를 추적해야 했다.

차를 이용했을 것이고, 도로를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따라붙어야 했다.

그녀가 한규호의 등장과 함께 도망쳤다면 추적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시도해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걸려 온 전화가 누구에게서 온 전화든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든, 지금 한규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규호가 문을 열고 복도를 따라 걷고 있을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멈추었다.

진동이 멈추는 것을 느낀 한규호는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여자를 찾기 위해 감각을 확대했다.

그때, 주머니에서 다시 진동이 느껴졌다.

짧은 진동이었다. 전화가 걸려 온 것이 아니었다.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진동이었다.

그 순간 한규호는 문자를 확인해야 한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언제나처럼 그의 선택에 도움을 주는 직감이 문자를 확인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결국 발을 멈추고,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부재중 통화 한 건과 문자 메시지 한 건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모두 트레이시의 이름이었다.

한규호는 알림 버튼을 눌러 문자를 확인했다.

-그 여자가 실종되었어요.

문자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 * *

문자를 보낸 트레이시는 손에 든 전화기를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규호가 판교 오피스텔을 떠난 직후, 신시아 챔버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 여자, 한규호가 방글라데시에서 구출해 온 여자, 지금은 마리 H. 스완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그 여자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신시아 챔버가 전화를 건 목적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신시아 챔버의 목소리에서 그녀가 실종된 여자를 걱정하고 있고, 혹시 한규호에게서 무언가 들은 것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트레이시는 신시아 챔버에게 한규호에게서 들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한규호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트레이시의 말을 들은 신시아 챔버는 잠시 침묵했고, 한규호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당부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가 모르고 있다면 일부러 알릴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국정원 요원을 도와 다비드 바이츠만과 카멜리아를 케이블타이로 구속하고. 국정원 지원팀이 도착해 두 사람과 이스라엘 작전팀 요원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을 확인하고, 광화문에 있는 주한미국대사관으로 이동할 때까지 트레이시는 계속 그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사실을 한규호에게 말해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신시아 챔버는 표면상으로는 낮은 직급의 위장 요원 신분이었지만, 기프티드 전담 요원인 그녀는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권한을 가진 신시아 챔버조차 그 여자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여자가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트레이시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한규호에게 그 여자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트레이시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여자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고 있고, 한규호에게 그 여자의 실종에 대해 알려 주고 싶지 않다는 저열한 욕망을 품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명분은 있었다. 그에게 알려 주지 말라는 신시아 챔버의 당부가 있었다.

지시는 아니었다. 신시아 챔버와 트레이시는 각각 독립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지시를 내리고, 지시에 따르는 관계는 아니었다.

신시아 챔버의 말을 꼭 따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좋은 핑곗거리가 될 수는 있었다.

한규호에게 그 여자에 대해 알려 주고 싶지 않다는 저열한 욕망과 그런 욕망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혐오를 동시에 느끼던 트레이시가 한규호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결정한 것은 대사관에 도착하고 난 이후였다.

그 여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규호를 위해서 소식을 전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한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트레이시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규호는 국정원 요원의 차를 타고 어디론가 급하게 떠났다. 그에게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 무언가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전화도, 문자도 확인하지 못하는 것일까?

트레이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손에 든 전화기를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1분 정도를 기다리던 트레이시는 결국 다시 한규호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조금 전 들었던 통화 연결음이 다시 들렸다. 그리고 바로 끊어졌다.

전화가 연결된 것이다.

“여보세요, 들려요?”

트레이시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래.

한규호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그 목소리에서 얼음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한기가 느껴졌다.

몇 시간 전, 자신을 안아 주며 이제 괜찮다고 말해 주던 한규호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트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말했다.

“문자 확인했어요? 그 여자가, 당신이 데려온 그 여자와의 연락이 끊겼어요. 실종되었어요.”

트레이시가 빠르게 말했다.

하지만 전화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못 들은 것일까?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다시 말해 줘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한규호의 목소리가 다시 전화기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그래. 알겠어.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 * *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한규호는 잠시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마치 누군가 한규호의 운명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이 타이밍에 완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한규호는 다시 한번 이빨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움직이려 하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일단 그 여자, 다니엘라 노이도르프를 찾자.

그렇게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몇 발자국 걸어갔을 때, 한규호의 감각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하이힐의 뒷굽이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계단을 타고 전해지는 발소리는 한규호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의 주인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를 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색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자가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을 올라온 여자는 마치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한규호를 향해 다가왔다.

한규호는 그 자리에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온 여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를 들어 한규호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주인님께서 통화를 원하십니다.”

한규호는 여자에게서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액정에는 +41로 시작하는 번호가 입력되어 있었다.

한규호는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통화 연결음 뒤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전화기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규호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계속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침묵의 통화가 10여 초 정도 흐른 후에,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군.

세월이 잔뜩 묻어 있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한규호는 얀 베르그만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었다. 한규호가 들은 유일한 소리는 얀 베르그만의 비명이었다.

그럼에도 한규호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얀 베르그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지금 어디지?”

한규호가 물었다.

-스위스.

얀 베르그만이 말했다.

“어디로 가면 되지?”

-성격이 급하군.

“스위스 어디로 가면 되지?”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그 전에 바꿔 줄 사람이 있군. 잠시 기다리도록.

얀 베르그만은 그렇게 말했다.

뒤이어 전화기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완의 목소리였다.

MISSION 06 :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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