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47)
서울 북부에서 집화된 택배 물량을 경기도에 위치한 허브터미널로 간선 수송하는 14톤 윙바디 트럭 한 대가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연결되는 신갈분기점으로 진입하면서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차량이 램프로 접어들자 트럭 기사는 핸들을 잡은 양손에 힘을 주었다.
트럭 기사는 간선 운송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하루에 두 번씩 신갈분기점을 지났지만, 나들목 램프를 지날 때는 언제나 긴장 상태로 들어갔다.
운전하는 직업을 사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익숙함과 익숙함에서 오는 방심이었다.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간선 기사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다녔고, 어디에서 브레이크를 밟고, 어느 시점에서 얼마나 운전대를 꺾어야 하고, 어디에서부터 가속페달을 밟아야 하는지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믿었다.
거기에서 오는 익숙함은 만성 염증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잠식했고, 염증이 곪아 가듯, 방심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동료기사가 그러한 익숙함과 방심으로 사고를 냈다.
단순히 사고에서 끝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는 장애를 입거나, 감옥에 가거나, 아니면 목숨을 잃었다.
트럭 기사는 그 사실을 알기에, 인터체인지에 접어들면서 충분히 속도를 줄인 것이다.
그렇게 속도를 줄인 트럭 기사가 뒤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차량을 발견한 것은 인터체인지를 거의 다 빠져나갈 때쯤이었다.
가능할까 싶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인터체인지의 램프를 달려오던 차량은 순식간에 트럭을 스치고 추월해 버렸다.
그렇게 트럭을 추월하고도, 마치, 아직 부족하다는 듯 굉음을 내면서 영동고속도로로 진입한 후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렸다.
“미친 새끼…….”
트럭 기사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지만, 운전을 업으로 삼고 있는 트럭 기사는 차종을 알아볼 수 있었다.
벤츠에서 나온 하얀색 C클래스 카브리올레, 흔히 오픈카라고 불리는 컨버터블이었다.
늦은 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꼭 저런 놈들이 하나둘은 있었다.
외국산 스포츠카를 타고서, 마치 레이서라도 된 듯,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려가는 미친놈들.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뒤집힌 스포츠카를 10년 동안 스무 대도 넘게 보았다.
하지만 인터체인지의 회전 램프에서 저런 속도로 차를 몰아가는 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저 새끼는 조만간 뒈지겠군.”
트럭 기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김승섭의 하얀색 벤츠 C200 카브리올레는 시속 110km 가까운 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왔다.
운전대를 잡은 남자는 램프를 다 빠져나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전에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아 버렸다.
남자의 동작에 따라 스포츠 모드로 세팅된 1991cc, 직렬 4기통 싱글터보, 최대 토크 30.6kgm의 벤츠 엔진은 굉음을 내면서 회전수를 6000rpm까지 높였고, 엔진의 힘을 전달받은 뒷바퀴 타이어가 강렬한 힘으로 도로를 밀어냈다.
후륜구동의 특성상 뒷바퀴가 살짝 밀렸지만, 남자는 재빨리 차량을 제어하고, 앞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청와대에서 받은 2천만 원 수표로 선납금을 지급하고, 나머지 금액은 60개월 할부로 처리한 김승섭이 자신의 애마가 이렇게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았다면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김승섭은 자동차를 인도받은 후, 단 한 번도 가속페달을 강하게 밟아 본 적이 없었다. 가속페달을 강하게 밟기는커녕, 시속 110km, 엔진 회전수 4000rpm을 넘겨보지도 않았다. 아니, 비가 오는 날은 물론, 미세먼지 농도가 높은 날에는 차를 모셔 둘 정도로 소중하게 모셨다.
한규호가 베드로 신부가 마련해 준 차량 대신 김승섭의 벤츠를 빌린 이유는 하나였다.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베드로 신부가 마련해 준 차량으로 가락시장에서 판교까지 이동하면서 신호와 속도제한을 무시하고 차를 몰았다.
가능성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경찰이 붙는다면 귀찮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게 차를 바꾼 이유였다.
김승섭의 마음을 모르는 듯, 한규호는 김승섭의 애마를 발정 난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몰아가고 있었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한규호는 속도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160이라는 숫자를 넘어서자, 속도 게이지 올라가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아무리 스포츠 세팅이 되어 있다고 해도, 2000cc 엔진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최대한 가속페달을 쥐어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한규호는 작게 인상을 쓰고는 내비게이션을 힐끗 바라보았다.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송둑리에 위치한 에우로파 프룩스 코리아 극동종자연구소까지 남은 거리는 115.5km, 예상 도착 시각 1시간 31분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한규호의 시선이 센터패시아의 시계로 향했다.
11시 53분이었다.
제한속도를 훌쩍 넘은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으니, 내비게이션에 표시된 예상시간보다는 일찍 도착할 것이다. 일반국도 구간을 포함한다고 해도, 목적지까지는 대략 한 시간 정도, 대략 새벽 한 시 전후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고 한규호는 예상했다.
한 시간.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찾아다녔던 서용석을 만나기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트레이시는 구했다.
박종연과 정지혜가 무사한 것도 확인했다. 이제 서용석을 만나러 가는 데 방해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정면을 향해 있는 한규호의 시선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선처럼 한규호의 마음도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한규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카멜리아에게서 들었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트레이시에게 복부를 가격당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은 카멜리아는 한규호를 원망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때문이야!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 말이 진실이었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오늘 일어난 모든 일이 한규호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카멜리아를 한국으로 데려오겠다는 한규호의 결정 때문이었다.
카멜리아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트레이시에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작전 팀이 한국에 올 일도 없었을 것이고, 판교로 다시 돌아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서용석을 기다리게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하지만 지금 한규호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근본적인 이유는 단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거나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달려왔던 한규호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예전에 그였다면, 서용석, 그리고 백금산의 개자식만을 바라보던 한규호였다면, 카멜리아를 한국에 데려오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다른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해 옷을 벗든, 유혹한 사람의 목숨을 거두든 한규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트레이시를 구하러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전의 한규호였다면, 트레이시를 CIA가 가진 정보력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녀가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한규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서용석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서용석을 만나는 것이, 그리고 그에게서 백금산의 개자식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한규호에게는 가장 중요한 목표였으니까.
하지만 한규호는 그러지 못했다.
카멜리아를 데려와 쓸데없이 일을 키웠고, 트레이시를 구하기 위해 서용석과의 만남을 미루었다.
예전의 자신과는 달라져 있었다. 그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한규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질문에 대한 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며칠 전 기억이 떠올랐다.
트레이시와 점심을 먹겠다는 약속을 뒤로한 채, 바티칸에서 온 남자를 만나기 위해 부천에 있는 가톨릭 대학교로 가던 그날, 택시 안에서 했던 생각이었다.
북한에서 진행했던 마지막 작전 이후, 눈가리개로 시야를 제한당한 경주마처럼 눈앞의 목표만을 위해 달리고 달렸다.
독립 요원이 된 것도, 영어를 배운 것도, 국정원과 일을 한 것도, CIA와 관계를 맺은 것도, 전부 다 서용석, 그리고 그 백금산의 그 개자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런 자신이 자꾸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풍경을 보고,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를 맡았다.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싫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완을 떠올렸고, 그녀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완, 그녀가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었다.
트레이시의 말처럼 카멜리아를 한국에 데려온 이유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밀러 국장에게 엿을 먹이고 싶은 의도도 있었고, 협상 과정에서 카드로 사용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트레이시에게 공적을 쌓아 준다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카멜리아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카멜리아에게서 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 *
트레이시에게 수작을 부린 일본 국회 중의원 시마다 아리히로의 왼쪽 엄지발가락, 아래턱뼈와 다수의 치아, 오른쪽 정강이뼈, 오른쪽 안구, 왼쪽 무릎 인대, 그리고 양쪽 고환에 영구적인 장애를 안긴 후, 아카사카에 있는 주일미국대사관으로 돌아온 한규호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카멜리아가 갇혀 있던 지하의 임시 구금시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한규호에게 카멜리아가 말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요.
그 순간 한규호는 완을 떠올렸다. 완도 같은 말을 했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요.
트라이앵글의 프라이멀 카지노 VIP 객실, 한규호를 살해하려는 의도로 유혹한 다음 날 아침,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이 마비된 상태로,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 차가운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며 완이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규호를 살해하려 했고, 그녀들의 몸을 수단으로 삼았다.
완이 위스키를 들고 찾아온 것도, 카멜리아가 일본주를 들고 찾아온 것도 한규호를 유혹하기 위함이었다.
완이 한규호에게 입을 맞춘 것도, 카멜리아가 노천온천에서 유카타를 벗을 것도, 한규호를 살해하기 위함이었다.
카멜리아가 한규호 앞에서 엉덩이를 드러낸 채로 소변을 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여자로서, 나신을 보이는 것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모습과 소리로써 한규호를 흔들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규호는 카멜리아의 그 모습에서 완을 떠올렸고, 완의 모습과 겹쳐 보였던 카멜리아를 그곳에 두고 오고 싶지 않았다.
* * *
한규호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눈동자에 분노와 혐오감이 스멀스멀 채워졌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혐오감이었다.
한규호는 치아가 상할 정도로 이빨을 꽉 깨물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자신에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형벌이었다.
잇몸에 피가 맺힐 정도로 강하게 이빨을 깨물면서 한규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살고 싶었나? 다른 사람들처럼?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렇게 살고 싶었나?
한규호가 질문을 던졌지만, 한규호의 마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는 자신의 마음에 다시 소리쳤다.
이제는 살고 싶으냐? 전우들의 시신을 그곳에 버려둔 채, 박종연을 들쳐 매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면서, 마음속에 피눈물로 새겼던 그 날의 맹세에서 눈을 돌리고! 이제는 살고 싶어진 거냐!
그제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왜 서용석 대신 트레이시를 선택했지?
마음속 깊은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진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왜 파타야에서 곽용신과 김승섭을 구하러 갔지? 왜 카멜리아를 한국으로 데려온 거지? 베네수엘라에서 베르나를 구한 이유가 무엇이지?
마음속 진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트레이시를 구하러 가지 않았다면, 곽용신과 김승섭을 구하러 가지 않았다면, 카멜리아를 그곳에 두고 왔다면, 베르나를 구하지 않았다면. 후회하지 않았을까?
마음속 진실은 작정하기라도 한 듯 계속 말을 쏟아 냈다.
-국경없는의사회 소속으로 위장한 CIA 요원을 구출하러 소말리아 갔을 때 만났던 소년병의 얼굴을 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거지?
그 말을 들은 한규호의 머릿속에 소년병의 모습이 떠올랐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선잠을 자고 있던 경비.
기절을 시키고 나서 얼굴을 보았다.
많아 봤자 중학교 3학년, 그 정도 나이에 불과했던 소년병.
-알고 있었지. 해가 뜨고, 인질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면 소년병은 죽는다는 것을. 하지만 방법이 없었지. 두고 올 수밖에 없었어. 그래. 합리적인 선택이었지. 인질을 구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아이에게 기회를 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왜 아직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거지? 왜 그 아이를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는 거지? 왜 후회하고 있는 거지?
한규호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심장이 마치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완에 대한 마음도 마찬가지지. 거짓이 아니야. 잘 알고 있겠지만.
한규호의 머릿속에 완의 얼굴이 떠올랐다.
-행복했다. 완을 만나서, 그녀를 알게 되어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서, 그녀에게 사랑받게 되어서. 살고 싶어졌다. 그녀와 같은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그녀의 미소로 잠에서 깨어나고, 그녀가 만든 아침을 먹고, 그녀에게 손을 잡힌 채로 힘들고 지루한 쇼핑에 끌려다니고, 그녀를 품에 안고 밤바다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으스러질 듯 끌어안으며 살고 싶다.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공유하고 싶다.
그렇게 말한 마음속 진실은 잠시 침묵했다. 마치 한규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잠깐의 침묵 이후에 마음속 진실이 다시 말했다.
-둘 다 한규호다. 두만강을 건너며 피의 맹세를 가슴에 새기던 사람도. 소년병을, 베르나를, 카멜리아를, 곽용신과 김승섭을, 트레이시를, 그리고 완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도. 어느 쪽도 거짓이 아니다.
마음속 진실은 마치 선언하듯 말했다.
그래. 둘 다 거짓이 아니지.
한규호가 대답했다.
그 어느 모습도 거짓이 아니었다.
둘 다 한규호의 생각이었고, 마음이었고, 진심이었다.
다만 한쪽을 계속 외면하고 있었고, 그 사실을 마음속 진실이 알려 준 것이다.
-그래. 계속 외면하고 있었지. 나아갈 길은 하나뿐이라고, 하지만 이제야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지. 한쪽 길을 선택하면, 다른 길은 갈 수 없다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마음속 진실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이대로 서용석을 만나러 가는 길. 서용석을 만나고, 그 남자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고, 그 남자를 찾아가는 길. 아니면 차를 돌려 공항으로 가서, 가장 빠른 홍콩행 항공권을 구입하는 길.
마음속 진실은 거기에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홍콩에는 모든 것이 남아 있을 거야. 세 시간 동안 완의 손에 이끌려 다니면서 산 다섯 벌의 정장, 몇 벌인지도 모를 격식 없는, 각종 구두, 운동화, 슬리퍼, 남성용 화장품이 그대로 있을 거야. 단지 그뿐일까? 화장실에는 사용하던 칫솔이, 침실 옷장에는 입었던 속옷이 잘 개켜진 상태로 들어 있겠지. 완은 절대로 그 물건을 버리지 않을 테니까.
한규호는 마음의 소리가 전부 끝날 때까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이제 결정만이 남았어. 어느 길을 갈 것인지.
그렇게 말한 마음속 진실은 더는 자신이 할 말이 없다는 듯,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벤츠 C200 카브리올레가 영동고속도로 강릉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한규호의 눈에 표지판 하나가 들어왔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여주 분기점까지 1km’
한규호의 시선이 내비게이션을 향했다.
여주 분기점에서 오른쪽 첫 번째 진입로로 들어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라는 신호가 떠 있었다.
남은 거리는 76.5km.
한규호의 시선이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아무런 말없이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는 마음속 진실을 향해 입을 열었다.
11챠리가 발동되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그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안성종 상사와 정의성 상사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한규호가 말했다.
마음속 진실은 한규호가 말한 장면을 떠올렸다. 안성종과 정의성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윤재운 중사가 총을 맞았을 때도, 팀장님의 가슴에 칼이 꽂힐 때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마음속 진실이 바라보는 장면이 바뀌었다.
마치 잠든 것처럼 눈밭에 누워 있던 이규철 대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지. 해야만 하고.
어느 길로 걸어갈지를 결정한 한규호가 마음속 진실에게 말했다.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다 해도?
말없이 듣고 있던 마음속 진실이 물었다.
그래.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다 해도.
한규호가 대답했다.
마음속 진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규호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듯, 천천히 마음속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한규호는 그렇게 사라져 가는 마음속 진실을 바라보면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천천히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