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62화 (362/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45)

* * *

팔레스타인 간호대학(Palestine College of Nursing)에 재학 중이던 나딘 쉬이라가 이스라엘 국적의 시민운동가를 만난 것은 졸업을 반년 정도 앞둔 때였다.

나딘을 가르치던 대학교수의 부탁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의 화해와 공존이라는 목표를 가진 시민운동가가 가자 지구의 빈민들을 위한 기초 의료지원 사업을 계획하고 있고, 시민운동가를 도와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나딘은 교수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인을 돕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존경하는 은사의 부탁이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처음 인연을 맺은 시민운동가가 바로 다비드 바이츠만이었다.

물론 당시의 나딘은 그 남자의 본명이 다비드 바이츠만이라는 것도, 그가 이스라엘의 첩보 기관 신 베트의 요원이라는 것도, 가자 지구에서 자신을 위해 정보를 수집할 첩자를 심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나딘이 그런 바이츠만의 거미줄에 걸렸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1년 정도 이스라엘 출신의 시민운동가를 도우면서, 나딘 쉬이라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바이츠만은 가자 지구 빈민가의 어린아이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위험을 무릅쓰고 아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의약품을 국경을 통해 몰래 들여왔다. 수술이 필요한 아이들을 직접 이스라엘로 데려가 수술도 받게 해 주었다.

남자도 나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나딘은 아이를 임신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남자는 아이가 태어난 후에 조촐한 결혼식을 열자고 속삭였다.

나딘은 딸을 낳았다. 그리고 딸이 태어난 그 순간, 나딘을 바라보던 남자의 사랑스러운 눈빛도, 결혼 약속도, 행복한 미래도 모두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다비드 바이츠만은 시민운동가의 가면을 벗어 버렸다. 그리고 신 베트 요원이라는 본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나딘은 딸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라다 쉬이라. 그것이 축복받지 못한 딸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이었다.

아랍 국가인 팔레스타인에서 미혼모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기 힘들었다. 지역사회의 핍박 속에서 죽는 것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만약 나딘이 간호대학을 졸업한 간호사가 아니었다면, 그녀 또한 다른 미혼모들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자 지구에서 간호사는 꼭 필요한 직업이었다. 이스라엘군의 총격과 폭격, 그리고 폭탄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녀가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다비드 바이츠만은 그녀의 직업을 이용했다. 아니, 애초에, 그녀가 간호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바이츠만이 접근한 것이다.

병원에는 환자와 더불어 정보가 모였다.

누가 아픈지, 누가 다쳤는지, 누가 죽었는지, 누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모였다가 흩어졌다.

다비드 바이츠만은 나딘에게 그러한 정보를 수집할 것을 지시했고, 나딘은 정보를 모아 다비드 바이츠만에게 전달했다.

조국을, 민족을, 이웃을 배신하는 짓이라는 것을 나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비드 바이츠만이 딸 라다의 목숨을 쥐고 있었다.

나딘은 딸을 지키기 위해, 하나뿐인 딸이 생부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 내기 위해, 다비드 바이츠만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날,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공습경보 사이렌이 온 동네를 울려 퍼지던 그날, 나딘과 라다의 집 인근에서 이스라엘의 비행기에서 투하된 폭탄이 터진 그날 밤.

엄마 품에 안겨 떨고 있던 열한 살의 라다는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읽었다.

문장을 본 라다는 나딘이 가지고 있는 영어로 쓰여 있는 간호학 교재와 의학 서적을 읽었고, 티브이에서 나오는 프랑스 방송을 이해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나딘은 갑자기 발현된 딸의 이능력이 딸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이면 절대로 안 된다고, 몇 번을 반복해서 엄하게 당부시켰다.

라다는 고개를 끄덕였고,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열한 살의 라다는 단 한 사람에게는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다. 엄마만큼 라다를 사랑해 주는, 그리고 라다가 엄마보다 아주 조금 덜 사랑하는 학교 선생님에게만큼은.

라다가 학교 선생님과 비밀을 공유하고 며칠이 지난 후, 다비드 바이츠만이 가자 지구를 찾아왔다.

태어나고 단 한 번도 찾지 않은, 그리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능력을 갖게 된 자신의 딸을 돌려받기 위해서.

* * *

라다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성장했다. 정확히 말하면 다비드 바이츠만과 신 베트가 그녀를 아주 아름다운 여성으로 키워 냈다.

그렇게 잘 만들어진 그녀가 카멜리아라는 코드명을 선택한 것은 그녀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줄 알았던 아빠를 따라 이스라엘에 온 지 8년째 되던 해였다.

라다 쉬이라라는 이름을 버리고, 카멜리아라는 이름을 선택한 그날, 이제는 아버지가 아닌 상관으로서 그녀의 앞에 선 바이츠만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모든 예후딤(유대인)에게는 민족의 중흥이라는 의무가 있다.”

그리고 카멜리아에게 역할을 부여했다.

카멜리아는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옷을 벗고, 몸을 허락하고, 목표의 목숨을 빼앗았다.

유대 민족의 중흥을 위해, 그리고 아버지이자 상사인 바이츠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단지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카멜리아가 신 베트의 지시에 따라 역할을 잘 수행함으로써, 그녀의 엄마는 새로운 거처를 얻게 되었다.

공습경보 사이렌도, 언제 어디서 누가 쏘았는지 모를 총알도, 출퇴근 버스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두바이 외곽의 고급 주택.

카멜리아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라는 남자가 엄마를 위해 그 집을 마련해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의도가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손을 내밀어 주었고, 아버지의 조국이 그녀를 원하고 있었고, 엄마가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 * *

카멜리아는 한규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남자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더는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지 않아도, 이유도 모른 채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 기회를 주려 했다고?

트레이시의 말을 곧 씹던 카멜리아의 눈에 천천히 독기가 차올랐다.

“당신이 뭔데…….”

카멜리아가 씹어 삼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에 차오른 독기가 더욱 짙어졌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를 판단해! 무슨 자격으로 나를 동정하는데! 당신이 뭔데 내 인생에 참견해!”

카멜리아는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마치 가슴속에 오랫동안 묵혀 왔던 한을 품어 내듯, 발악적으로 소리를 쳤다.

그런 카멜리아를 바라보는 트레이시의 눈에도 다시 분노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카멜리아는 그녀의 조국에, 조직에 정신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는 그녀의 모습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트레이시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같은 사람으로서, 같은 여자로서, 카멜리아를 참을 수 없었다.

카멜리아의 입을 닥치게 만들기 위해 다시 한번 더 발길질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트레이시가 한 발 앞으로 나섰을 때, 그녀의 앞을 무언가가 막아섰다.

한규호의 팔이었다. 한규호의 팔이 그녀를 막아선 것이다.

트레이시는 그런 한규호에게도 화가 났다.

카멜리아를 이곳에 데려오겠다고 결정한 것 때문에, 자신에게 카멜리아를 부탁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들개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한규호가 카멜리아를 이곳에 데려오겠다고 결정한 데에는, 그 여자가, 한규호가 방글라데시에서 구출해 온 그 여자가 작용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게 가장 참을 수 없었다.

트레이시의 시선이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규호는 트레이시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주저앉아 있는 카멜리아를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한규호는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관으로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었다.

트레이시가 한규호의 시선을 따라 막 뒤를 돌아보려던 그 순간,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녀를 데려가도 되겠나?”

* * *

한규호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본능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복도를 따라 누군가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한규호의 감각에 포착되었다.

한규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려 있었다. 조금 전, 한규호가 처리한 두 명의 요원 중 팔꿈치가 꺾이고, 관자놀이를 두들겨 맞은 남자의 팔이 문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감색 양복을 입은 백인 남자, 조금 전 한규호가 밖에 주차되어 있던 승합차에서 보았던 그 남자였다.

“내가 그녀를 데려가도 되겠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바이츠만 국장이 말했다.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바이츠만 국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츠만 국장은 한규호가 대답하지 않으리라고 예상하기라도 한 듯, 허리를 굽혀 현관문 옆에 쓰러져 있든 두 명의 요원의 상태를 확인했다.

팔꿈치가 꺾인 요원은 숨이 끊어져 있었다. 턱이 어긋나고, 입 주위에 피와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작전팀 선임 요원의 숨은 붙어 있었지만,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을 확인한 바이츠만 국장은 허리를 펴고,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 거지?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저 무감정한 눈으로 그런 바이츠만 국장의 눈을 마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시선을 마주친 바이츠만 국장은 신발을 신은 채로 트레이시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트레이시에게 목을 조르던 스타킹이 아직 목에 감겨 있는 요원이 살아는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한규호에게서 세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발을 멈추었다.

멈춰선 바이츠만의 시선이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카멜리아에게로 향했다.

다쳤는지는 모르지만 특별한 외상이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눈으로 봐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바이츠만의 시선이 트레이시에게로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한규호에게로 향했다.

아까 그 느낌이 맞았군.

바이츠만 국장은 한규호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신 베트 정예 중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작전팀 요원 셋이 목숨을 잃어버렸다. 아니, 지금 사망이 확인된 요원은 한 명뿐이었지만, 다른 두 요원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요원으로서는 이미 죽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남자가 한 것이다. 이 남자 한 명이 지금 상황을 만든 것이다.

조금 전 그에게서 느꼈던 맹수의 느낌이 맞았다는 증거였다.

“내가 우리 요원을 데려가도 될까?”

바이츠만이 말했다.

“싫다면?”

한규호가 대답했다.

“세상에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지.”

바이츠만은 그렇게 말하면서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사진이었다.

바이츠만이 사진을 잡은 손가락을 놓자, 사진이 춤을 추듯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바라본 트레이시의 눈이 커졌다.

사진에는 트레이시의 얼굴이 인화되어 있었다. CIA 인사 파일에 등록된 그녀의 증명사진이었다.

“누가 이 사진을 주었다고 생각하나?”

여전히 한규호에게 시선을 고정한 바이츠만이 말했다.

“누가 주었지?”

한규호가 물었다.

“누가 이 작전을 승인했다고 생각하나?”

바이츠만이 다시 말했다.

“랭리.”

한규호가 말했다.

바이츠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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