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40)
통화 버튼을 누른 한규호는 전화기를 얼굴로 가져갔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불길한 예감이 그를 찾아왔고, 한규호는 그저 전화기를 얼굴에 대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은 전화기 너머의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결투 직전, 대치하는 두 사람처럼, 한규호와 전화기 너머 상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상대방의 분위기를 읽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한규호가 단순히 전화기를 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청각을 최대한 끌어 올려 전화기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청각 신호를 확인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숨소리가 들렸다.
전화기를 든 상대의 규칙적인 숨소리, 그리고 전화기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누군가의 불규칙한 숨소리, 긴장과 공포에 잠식된 신체가 빠르게 호흡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둘, 어쩌면 셋.
한규호가 그렇게 분석을 한 그 순간 전화기에서 말소리가 파고들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전화기 너머의 상대였다.
-전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박종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규호는 얼굴에서 휴대전화를 떼어 낸 다음, 다시 한번 누구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규호는 그러지 않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박종연의 이름, 박종연의 번호를 확인했다. 불필요한 동작이었다.
“아니.”
한규호가 말했다.
-그런 것치고는 침착하군.
전화기 너머의 상대가 말했다.
“누구지?”
한규호가 물었다.
-누군지 모르겠나?
한규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안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침묵에서 그라고 생각했고, 첫마디에서 그라고 확신했다.
서용석, 북방 쪽 방언 특유의 억양이 묻어나는 말투, 한규호를 알고 있고, 박종연을 찾아갔을 만한 사람은 서용석밖에 없었다.
“한국에 들어온 것은 알고 있었지.”
한규호가 말했다.
-알고 있었나?
서용석이 물었다.
“그래.”
한규호의 대답이었다.
-알면서 왜 찾아오지 않았지?
“얼마 전에 알았지. 예전부터 알았다면 만나러 갔을 거야.”
-그런가.
“그러는 당신은 한국에 들어온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왜 나를 찾아오지 않았지? 나를 만나려고 온 것 아닌가?”
-찾기가 쉽지 않더군. 외국에 자주 나가더군.
“찾기는 찾았나?”
-찾아다녔지.
“누가? 당신이? 아니면 에우로파 프룩스가?”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많이 알고 있군. 그 사실도 최근에 알았나?
“몇 분 전에.”
그 말을 들은 서용석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누가 알려 주었는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규호는 그 침묵을 통해서 서용석과 에우로파 프룩스와의 사이에 신뢰 관계가 그다지 두텁지 않다는 것을 파악했다.
-만나 줄 텐가?
“그래. 나도 만나고 싶군.”
-듣고 싶은 것이 있지.
“나도 묻고 싶은 것이 있고.”
-만나러 올 텐가?
“어디지?”
-여기는 목련마을이라고 하더군.
한규호는 눈을 감아 버렸다.
분당구 야탑동 목련마을 5단지, 진도팀의 팀장이었던 이규철 대위의 미망인인 정지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이름이었다.
박종연의 전화기, 정지혜의 아파트.
최악의 상황이었다.
한규호는 다시 청각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숨소리, 맥박수가 올라가고, 그렇게 높아진 맥박이 호흡계를 자극했을 때 들려오는 빠르고 짧은 숨소리였다.
세 명으로 파악됐다.
아마도, 서용석, 박종연, 정지혜.
요한이도 있을까?
정지혜의 아들인 이요한까지 그 집에 있었다면, 서용석은 적어도 세 명의 인질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몇 명이지?”
한규호가 물었다.
-두 명.
서용석의 대답이었다.
요한이는 없다. 박종연과 정지혜. 두 사람이 확실하다.
“무사한가?”
한규호가 물었다.
-목숨은 붙어 있지. 아직까지는.
서용석의 대답이었다.
목숨은 붙어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자네가 얼마나 빨리 오느냐에 따라 상황이 바뀌겠지.
서용석이 덧붙였다.
한규호는 머릿속으로 정지혜의 아파트까지 가는 최단 경로를 그렸다.
길이 막히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신호를 무시하면서 송파대로와 성남대로를 달려간다면, 2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한규호만이 가지고 있는 감각을 활용한다면 그보다 더 이른 시간에 도착도 가능하다.
지금 바로 간다. 늦어도 20분 안.
그렇게 말해야 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랬다.
첫 번째 이유는 서용석이 원하는 것은 한규호라는 부분이었다.
한규호는 서용석을 찾아다녔지만, 서용석은 한규호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백금산의 개자식이 최종 목표였다.
마찬가지로 서용석의 최종 목표는 박종연이 아니라 한규호였다. 서용석의 등허리에 칼을 찔러넣은 사람이 한규호였으니까.
아니, 서용석은 자신에게 칼침을 놓았다는 이유만으로 한규호를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용석이 받고자 하는 것은 부하들의 목숨값이다.
박종연에게 목숨값을 받아 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정지혜의 아파트를 알아냈으니, 정지혜가 이규철 대위의 아내라는 사실도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두 사람에게서 목숨값을 받아 내려 할지도 모른다.
서용석이 박종연과 정지혜에게 목숨값을 받으려 한다면?
몇 분, 아니, 몇 초 안에 그곳에 도착하지 않는 한, 한규호는 막아 낼 수 없다.
서용석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휘둘리면 안 된다. 두 사람을 확실히 살리기 위해서도,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러한 생각이 대답을 멈춘 첫 번째 이유였다.
첫 번째 이유는 합당했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못한 두 번째 이유는 한규호로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트레이시, 대답을 하려던 그 찰나에 트레이시가 떠올랐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본인이 트레이시를 떠올려 놓고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트레이시를 떠올릴 이유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서용석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용석을 제외한다고 해도, 박종연과 정지혜를 구하는 것이 트레이시보다 우선순위에서 앞섰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서용석과 달리 트레이시에게 목숨값을 받아 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그런 결론을 도출했음에도, 한규호는 트레이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떠오른 트레이시는 마치 지울 수 없는 각인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한규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송둑리.”
한규호가 말했다.
“에우로파 프룩스의 연구소가 있다고 하더군. 그곳에 계속 있었나?”
-정확한 주소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맞는 것 같군.
서용석이 말했다.
“다섯 시간.”
한규호가 말했다.
“최대 다섯 시간, 늦어도 새벽 4시까지 내가 그곳으로 찾아가지.”
한규호가 제안했다.
그 제안에 서용석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서용석이 말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나 보군.
서용석이 말했다.
“아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신이지.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찾아간다. 두 사람에게 손대지 말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두 사람을 건드리면, 두 번 다시 나를 볼 수 없을 테니까.”
한규호가 말했다.
다시 서용석의 침묵이 이어졌다.
한규호는 서용석의 침묵이 고민을 보여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용석은 한규호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박종연이나 정지혜로는 부하들의 목숨값으로 부족할 테니까.
“그날 이후,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나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살아왔겠지. 나와 만나는 날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을 테고, 죽은 부하들의 원망을 들으면서 꿈에서 깨어났겠지.”
-잘 알고 있군.
“그래. 누구보다도 나는 잘 알고 있지.”
한규호가 말했다.
-네 시.
“그래. 늦어도 네 시.”
-기다리지.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한규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베드로 신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탁할 것이 있어.”
* * *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서용석은 잠시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에 두 사람의 인질이 잡혀 있는 데도 한규호는 시간을 요구했다.
연구소로 내려가 있으면 직접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무슨 생각일까?
서용석은 휴대전화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벌여 놓고 국정원이나 경찰을 동원할 생각일 수도 있었다.
아니,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서용석은 어쩐지 한규호의 말이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한규호가 서용석을 피하려 했다면, 다섯 시간의 여유를 줄 필요도 없었다. 바로 이곳으로 오겠다고 하고, 경찰이나 국정원을 동원하면 그만이다. 가장 빠르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한규호는 시간을 버는 방법을 택했다.
서용석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실 한구석에 쓰러져 있는 남자와 그 남자를 옆에서 보살피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한규호의 말대로 기다려 볼까? 아니면 부족하지만, 저들에게서라도 목숨값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서용석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저 두 사람을 처리한다면? 한규호가 찾아올까? 내가 한규호라면, 나는 복수를 위해 찾아올까?
-누구보다도 나는 잘 알고 있지.
한규호의 말이었다.
한규호의 말처럼, 한규호가 서용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면, 그는 절대로 서용석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게 서용석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머리를 잘 쓰는군.
서용석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실에 쓰러져 있던 두 남녀에게로 한 발 다가갔다.
* * *
서용석이 다가오는 모습을 본 박종연은 몸을 일으키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몸은 전투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불 꺼진 거실에 정지혜와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박종연은 재빨리 손에 든 스티로폼 박스를 놓아 버렸다. 동시에, 문 옆에 있던 장우산을 집어 들고 재빨리 정체불명의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군더더기 없는 지르기였다.
군을 떠난 지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뼈에 각인된 전투 감각과 기술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치, 그렇게 공격할 것을 알기라도 한 듯, 상대방은 단 한 합에 박종연을 제압했다. 그나마 멀쩡한 다리의 무릎뼈가 박살이 나고, 오른손 팔꿈치가 반대로 꺾여 버렸다.
두 다리가 성했다고 해도, 계속 군에 있었다고 해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을 만큼 현격한 실력 차이였다.
그렇게 쓰러진 상태로, 정지혜의 품에 안겨, 서용석이 자신의 휴대전화로 한규호에게 전화하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다.
죽는다. 서용석이 마음을 먹으면 박종연도, 정지혜도 확실히 죽는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박종연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일으켜야 했다.
이규철 대위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안성종 상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할, 아니, 1푼의 가능성이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살기 위해 마지막 발버둥을 쳐야 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의족은 어긋나 있었고, 그나마 성한 다리는 무릎뼈가 박살이 나 버렸다.
무엇보다 정지혜가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맹수 앞에서 아이를 보호하는 어머니처럼, 박종연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의 몸을 강하게 껴안고 있었다.
그런 정지혜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박종연의 눈앞에 서용석이 무언가를 툭 하고 던졌다.
* * *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가는 서용석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주는 박종연이었다.
서용석은 박종연이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서용석 자신이었다.
하지만 박종연이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몸 상태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종연의 몸을 감싼 여자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서용석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향했다.
여자는 서용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두려움 따위는 없다는 듯, 강렬한 시선으로 서용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눈이 아니었다.
서용석은 여자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면서, 한 남자를 떠올렸다.
전우를 부축한 채로, 무릎 높이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나가던, 남자의 등을 떠올랐다.
그 남자의 아내라고 했지.
서용석은 잠시 여자를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박종연 앞에 툭 하고 던졌다.
박종연이 성한 팔을 들어 정지혜의 앞을 막았다.
서용석은 그런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명확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가 느끼는 이 더러운 기분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규호와 대면하는 것뿐이었다.
-누구보다도 나는 잘 알고 있지.
서용석은 한규호의 그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