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56화 (356/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39)

* * *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목련마을 5단지.

차에서 내린 박종연은 트렁크에서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두 팔로 박스를 소중히 안고, 천천히 아파트 단지 안 보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가 품에 안은 박스 안에는 장어가 들어 있었다.

박종연이 평택에서 가장 장어구이를 잘한다는 식당에 직접 찾아가 양념해 초벌 하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포장해 온 귀한 장어였다.

너무 많은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아파트 단지를 걸어가는 박종연은 품에 안은 박스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포장한 장어의 양은 5kg이었다. 세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양만큼 가격도 비쌌다.

유명한 식당이었고, 유명한 이름값만큼 장어 가격도 비쌌다. 1kg에 7만 8000원, 거의 40만 원 돈이었다.

돈이 아깝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양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부족한 것보다는 남는 게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박종연은 이요한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요한. 박종연의 옛 상사였던 진도0 이규철 대위의 아들.

어쩌면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워낙 장어를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주말 동안 이 정도는 가뿐하게 먹어 치울 것이다.

지난해 부산대학교 의예과에 합격해 부산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이요한에게 박종연은 며칠 전 전화를 걸었다.

“너 여자 생겼냐? 요즘 왜 이렇게 안 올라와? 엄마가 걱정하더만.”

-안 그래도 이번 주에 올라가려고요. 그리고 여자는 언제나 끊이지 않았죠. 아시면서.

“서울에 있는 학교도 합격했으면서 일부러 부산으로 간 이유가 그거냐?”

-서울은 사립. 부산은 국립! 등록금 차이가 얼만데요. 그거 6년이면…….

“아주 좋은 핑곗거리네. 알았어. 아무튼 이번 주에 올라온다고? 뭐 먹고 싶은 거는?”

-장어요. 구운 거. 양념 발라서.

“또 장어? 지겹지도 않냐? 그놈의 장어?”

-요즘 기력이 딸린단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어린놈이 벌써부터 기력이 딸린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참 나, 의대 공부가 얼마나 많은지 못 들어 보셨어요?

“들어 봤지. 본과부터 죽어 난다고, 그래서 예과 2년 동안 죽을 만큼 놀아야 한다고. 네가 말했잖아. 예과 2학년 짜식아!”

-쓸데없는 걸 기억하고 계시네.

망할 녀석.

박종연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이를 위해 이렇게 장어를 들고 가는 것이, 내일 올라올 그 녀석이 장어를 보고 기뻐하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박종연 얼굴의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미소가 사라진 자리에 무거운 표정이 떠올랐다.

행복감이 가득했던 그의 마음속에도 죄책감이 파고들었고, 행복감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이 행복을 가질 자격이 있을까?

팀장님이 누려야 했을 행복을 내가 도둑질한 것이 아닐까?

언제나 이 길을 걸을 때마다 그를 괴롭혔던 생각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떠올랐다.

북한에서 한규호와 살아 돌아온 박종연은 줄곧 진도팀 전우들의 유가족을 챙겼다. 그리고 그 유가족들 안에는 진도0 이규철 대위의 미망인인 정지혜와 아들 이요한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작은 채무감이었다. 북에 두고 온 전우들을 대신해야 한다는 채무감 때문에 유가족들을 돌봤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채무감은 어느샌가 다른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박종연을 가장 먼저 가족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이요한이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사춘기 시절의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해 준 박종연을 이요한은 진작 가족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박종연과 엄마인 정지혜 사이에 쌓인 10년이라는 시간이 서로에 대한 ‘정’이라는 감정으로 발전했다는 사실도.

-앞으로는 제가 집에 없으니, 대신 삼촌이 우리 엄마 좀 맡아 줘요.

작년 초, 부산대 의예과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세 사람이 괜찮은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먹던 그날, 이요한이 박종연에게 한 말이었다.

엄마의 옆에 있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지인이 아닌 가족으로서. 남자로서.

박종연은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그 척박한 땅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진도0 이규철 대위의 마지막 모습을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리고 모르핀에 취한 상태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로 죽음을 맞이한 이규철 대위의 마지막 모습을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고맙다고 생각할 거예요.

주저하는 박종연에게 이요한이 한 말이었다.

그날 이후, 박종연이 주말을 정지혜의 아파트에서 보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요한의 말이 있기 한참 전에, 세 사람은 이미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행복했다. 고마웠다. 그리고 그만큼 죄책감을 느꼈다.

이규철의 마지막 모습은 절대 잊을 수 없었고, 그리고 이 죄책감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박종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마음과 무거운 표정으로 정지혜의 아파트에 도착해 문 앞에 선 박종연은 초인종을 바라보았다.

-가족은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요.

이요한이 카드 키와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 주면서 했던 말이었다.

박종연은 얼굴에 다시 미소가 작게 피어올랐다.

정지혜도 소중했지만, 이제 이요한도 정지혜 못지않은 귀한 선물이었다.

박종연은 작게 웃음을 짓고는 주머니에서 카드 키를 꺼내 현관문에 가져다 댔다.

문을 연 박종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불 꺼진 거실이었다. 모든 것을 가리는 어둠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랐다. 정지혜가 이미 귀가했을 시간이었다. 언제나 거실에서 박종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불이 꺼져 있다고?

박종연은 현관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제야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정지혜의 모습을 확인했다.

“아니, 왜 불을 다 꺼놓고…….”

박종연은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박종연의 눈이 어둠에 조금 더 적응했고, 소파에 앉아 있는 정지혜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 * *

짧은 비명과 함께 눈을 뜬 신시아 챔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애틀 인근의 부촌(富村) 머다이나(Medina)에 위치한 챔버가(家) 1층, 그녀가 사용하는 침실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녀의 집, 그녀의 방, 그녀의 침대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신시아 챔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킨 후, 손을 뻗어 자신이 누워 있던 자리를 더듬었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마치 물이라도 쏟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침대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무언가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갑자기 깨어나는 바람에 어떤 악몽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끔찍하다는 느낌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의 끔찍한 악몽이라는 것을 흠뻑 젖어 있는 침대 시트가 증명하고 있었다.

신시아 챔버는 잔상처럼 남아 있는 끔찍한 감정을 떨쳐 내기 위해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침이 7이라는 숫자에 거의 인접해 있었다. 아침 7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 평소의 기상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리 이른 시간도 아니었다.

신시아 챔버는 다시 한번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신시아 챔버는 커튼을 걷고, 가볍게 몸을 풀고 나서야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밤사이 들어온 이메일 알람이 떠 있었다.

신시아 챔버는 손가락을 움직여 이메일을 확인했다. 대부분이 업무 관련 메일이었고, 유럽지사에서 보내온 메일이었다.

건성건성 화면을 스크롤 하던 신시아 챔버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에 홍콩에 있는 아시아 지부에서 보내온 메일이 보였다.

신시아 챔버는 손가락을 움직여 메일에 첨부되어 있는 보고서를 열었다.

지사 설립 진행 과정과 관련된 보고 사항이 적혀 있었다. 홍콩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이겠지만, 신시아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고서 끝에 적혀 있는 문장에서 신시아 챔버의 몸이 굳어 버렸다.

보안감사부문 마리 H. 스완슨 과장이 무단으로 결근 중이고, 연락도 안 된다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마리 H. 스완슨. 규가 홍콩에서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마지막 통화가 언제였지? 3일 전? 4일 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만큼은 확실했다.

규가 이유 없이 결근을 했을 리가 없다. 회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유가 있다면 신시아 챔버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신시아 챔버는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본토에서 조금 상황이 생겼는데, 규랑 직접적으로 상관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노파심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혹시 그 전화 때문에? 그 말 때문에?

신시아 챔버는 다시 머리를 가로저었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은 지금 상황에 있어서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신시아 챔버는 휴대전화의 전화번호부를 찾아 규가 홍콩에서 사용하는 번호를 눌렀다.

홍콩이 몇 시인지 알지 못했지만, 몇 시가 되었든 규는 신시아의 전화를 받을 것이다.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제발…… 규, 제발…….”

전화기를 얼굴에 붙인 신시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 *

“이스라엘 요원들이 판교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신부의 말이었다.

하필이면 지금.

그 말을 들은 한규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이었다.

이스라엘이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한규호의 예상과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바로 지금, 이 타이밍에 이스라엘 작전팀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규호는 무의식적으로 이빨을 꽉 깨물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화가 났다.

그렇게 이빨에 잔뜩 힘을 준 상태로, 판교에서 이곳, 가락시장까지 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를 생각했다.

오피스텔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았음에도, 길이 너무 막혔고, 거의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직도 길이 막히고 있을까?

길이 막히지 않으면 얼마나 걸릴까?

늦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한규호의 머릿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떠오른 생각과 생각들은 한규호의 머릿속 안에서 조각나고, 다시 결합하면서 계속 새로운 질문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한 화학작용을 거쳐, 머릿속의 생각은 하나의 결론으로 재조합되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시간만 낭비할 뿐,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한다.

그런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한규호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성이 한규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한규호의 이성은 판교로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안전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CIA 요원에게 신체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위해를 가한다고 해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단지 그뿐만도 아니었다.

설사, 트레이시의 신변에 위험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우선순위에서 트레이시보다 서용석이 앞선다고 말하고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한규호에게 있어서 트레이시를 구하는 것보다 서용석을 만나는 것이 중요했다.

서용석은 목표로 다가가는 유일한 열쇠였다.

한규호의 목표, 무표정한 얼굴로 이규철 대위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던 그 개자식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서용석이 필요했다.

정신을 잃은 박종연을 들쳐 메고, 진도0 이규철 대위와 진도1 윤재운 중사의 주검을 그 참혹한 땅에 버려 둔 채로, 정신없이 국경을 향해 달려야 했던 그날, 그 시간 이후, 한규호를 살아 움직이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트레이시가 목표보다 가치가 있나? 목표로 다가가기 위한 유일한 열쇠인 서용석이 눈앞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트레이시를 구하러 간다는 말인가?

한규호의 이성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규호는 결정을 내렸다.

서용석을 만나러 간다.

그렇게 마음을 정했을 때, 다시 전화벨 소리가 공장 안에서 울려 퍼졌다.

두 번째 전화벨 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한규호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전화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박종연의 이름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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