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55화 (355/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38)

“기프티드……입니까?”

베드로 신부가 물었다.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베드로 신부는 한규호의 침묵에서 긍정의 신호를 읽어 냈다.

“증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한규호가 말했다.

“마지막 질문이 될 테니까요.”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마지막 질문’,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규호는 알았다.

여자의 정체는 이미 알려 주었다. 남은 것은 여자의 위치 정보뿐이었다.

한규호가 기프티드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면 위치 정보를 알려 주겠다.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원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한규호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한규호의 미소를 본 베드로 신부는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완전 기억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베드로 신부의 기억 속에 한규호가 미소 짓는 장면은 없었다.

미소 짓는 쪽은 언제나 베드로 신부 쪽이었다. 한규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런 한규호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좋지 않은 징조처럼 느껴졌다.

그런 베드로 신부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한규호가 입을 열었다.

“에우로파 프룩스라고 했지.”

베드로 신부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국에 그 회사 관련 시설이 있겠군. 그리고 그 시설 중 어딘가에 여자가 있을 테고. 서용석이 한국에 있다면 같이 있겠지.”

한규호가 베드로 신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베드로 신부는 한규호에게 한 수 밀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싸우겠다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서용석을 추적하다 크레디트 에우로파의 이름이 나왔고, 한규호가 연관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상황이 주도권 싸움으로 흘러갔고, 그리고 지금 주도권이 한규호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도권 논쟁에서 베드로 신부가 밀린 것은 그의 생에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베드로 신부는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걸리겠지요.”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한규호의 지적은 정확했다.

여자는 에우로파 프룩스 극동종자연구소의 관리자였다. 한규호가 찾으려고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베드로 신부가 알려 주는 것에 비교하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베드로 신부는 그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한규호는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바로 말을 받았다.

“시간이 걸리겠지. 과연 얼마나 걸릴까? 하루? 반나절? 아니면 한 시간?”

그렇게 말한 한규호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베드로 신부는 한규호의 휴대전화를 바라보면서, 그의 말이 허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한국의 국정원, 미국의 CIA, 그리고 식양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 신부도 알고 있었다.

한규호가 알고자 한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여자는 어디 있지?”

한규호가 물었다.

“어쩔 수 없군요.”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품 안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한규호는 메모지를 보았지만 바로 손을 뻗지는 않았다. 아직 베드로 신부의 손가락이 메모지에 걸쳐 있었다.

한규호는 베드로 신부에게 마지막 발언을 허락한 것이다.

“베르그만 가문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들어 보지 못한 이름.”

한규호가 답했다.

메모지에서 베드로 신부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한규호는 메모지로 손가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여전히 베드로 신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콕에서 당신이 말했지. 기억력이 좋다고.”

한규호가 말했다.

베드로 신부의 표정이 다시 한번 더 굳었다.

“기억하나?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설명하면서, 기억력이 좋아서 박물관연대가 뿌린 내 사진을 기억해 두었다고 했었지.”

한규호가 말했다.

“그런 말을 했었죠. 귀하는 믿지 않으셨지만.”

베드로 신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

“믿었다는 말인가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단 말이지.”

“제가 진실을 말했다고 어떻게 확신하시는지 궁금하군요.”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한규호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검지로 베드로 신부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동공에는 두 개의 근육이 연결되어 있지. 동공 수축근과 동공 확대근. 그중에서 동공을 여는 확대근은 교감신경의 영향을 받지. 긴장이나 당황, 거짓말 같은 스트레스 요인이 발생하면 교감신경이 자극되고 확대근이 영향을 받아, 동공이 열리지.”

한규호가 말했다.

“그때 제 동공이 확대되지 않았군요.”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기억력과 관련된 능력인가?”

한규호가 물었다.

“감각과 관련된 능력입니까?”

베드로 신부가 물었다.

서로에게 질문을 던진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베드로 신부였다.

“이야기가 길어지겠군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할까요? 서로에게 여유가 있을 때, 오랜 시간 동안 누구의 방해도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

“왜 나를 도왔지?”

한규호가 물었다.

“저번에 말씀드렸죠. 그때 제 동공이 거짓을 말한다고 하던가요?”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지?”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도 말씀드렸죠.”

“등 뒤에서 칼이 꽂힐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말인가?”

“베르그만 가문과 손을 잡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귀하를 적대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 동공이 열렸습니까?”

한규호는 베드로 신부의 눈동자에서 어떠한 거짓의 징후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눈동자도, 한규호의 본능도,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긴 이야기를 마저 이어 가도록 하지.”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테이블에 놓인 메모지로 손을 뻗었고, 집어 들었다.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송둑리.

메모지에는 한글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에우로파 프룩스 극동종자연구소입니다. 현재는 연구소의 기능을 하고 있지 않지만, 현재까지 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에우로파 프룩스의 자산입니다.”

베드로 신부가 주소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바로 가실 생각입니까?”

베드로 신부가 물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드로 신부는 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사용하시죠. 1층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습니다.”

한규호는 잠시 베드로 신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차 열쇠를 집어 들었다.

메모지와 자동차 키를 챙긴 한규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소를 얻었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일어선 한규호는 베드로 신부를 내려다보았다.

“그 남자, 서용석을 죽일 생각입니까?”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그는 이미 예전에 죽었어.”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한규호가 막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 그의 몸이 멈추었다.

공장 안에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잠시 멈칫한 한규호는 전화벨 소리가 들려오는 위치를 확인한 후, 첫 번째 발을 디뎠다.

전화벨 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규호의 전화기가 아니었다. 베드로 신부의 전화였다.

누가 전화를 걸어왔든,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든, 한규호와는 상관이 없었다.

지금 한규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메모지에 적혀 있는 주소에 서용석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결정한 한규호가 두 번째 발을 내디뎠다.

그때, 한규호의 본능이 멈추라고 지시를 내렸다.

중요한 전화라고, 기다리라고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한규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지시였다.

지금 그에게 서용석보다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규호는 본능의 지시를 거부했다.

그리고 세 번째 발을 내디뎠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베드로 신부의 목소리가 다시 한규호를 붙잡았다.

“잠시만.”

한규호는 네 번째 발을 내딛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스마트폰을 얼굴에 대고 있는 베드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한규호에게 시선을 맞춘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이스라엘 요원들이 판교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 * *

신 베트 작전팀이 임시 거점으로 삼고 있는 수내역 인근 오피스텔을 빠져나온 시간은 정확히 22시 20분이었다.

세 명으로 이루어진 작전팀 요원은 계획에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했고, 준비된 차량에 탑승한 다음 바로 출발했다.

바이츠만 국장은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작전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작전팀이 타고 나간 2007년식 아반떼는 신 베트가 이스라엘 대사관을 통해 확보한 가짜 신분을 이용해 구입한 중고차였다. 그 차량을 이용해 작전팀은 22시 40분까지 판교 오피스텔로 가게 된다.

도착했다고 해서 바로 작전에 돌입하는 것은 아니다.

차량 안에서 18분을 대기하고, 작전을 중단할 만한 정도의 특이 사항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22시 58분에 오피스텔로 진입한다.

작전팀이 진입하면 신 베트와 계약한 독립 요원이 차량을 회수하고 200km를 남쪽으로 달려가 폐기한다.

여기까지가 작전 1단계였다.

작전팀이 오피스텔에 돌입하면 작전 2단계가 진행된다.

카멜리아를 구출하고, 브랜든 허드슨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남자를 확보한다. 그리고 트레이시 테일러를 처리한다. 오피스텔 문이 열리고, 10분 안에 2단계를 완료해야 했다.

3단계는 철수 단계였다. 2단계를 완료한 작전팀이 오피스텔을 나오면, 바이츠만이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에 탑승한다. 승합차는 바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물류회사 컨테이너 장치장으로 이동한다.

컨테이너 장치장에는 엔진 시동을 걸고 있는 트랙터(컨테이너 운반용 차량)와 연결된 40피트 컨테이너가 준비되어 있다. 승합차는 컨테이너에 몸을 숨긴다.

23시 45분 승합차를 품은 컨테이너는 심야의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남쪽으로 351km를 달려간다.

목적지는 양산 ICD(내륙 컨테이너 기지) 인근의 컨테이너 장치장. 도착 예정 시간은 03시 30분에서 04시 사이.

장치장에서 이번 작전을 위해 일본, 중국, 그리고 홍콩에서 넘어온 신 베트와 모사드 합동 작전팀을 만나는 것으로 3단계가 끝이 난다.

계획을 점검한 바이츠만 국장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렇게 깊게 심호흡을 하면서, 몇 달 전 기억을 떠올렸다.

카멜리아로부터 연락이 끊겼다. 아키타에 있던 요원들은 이탈 보고를 한 후, 현장에서 재빨리 몸을 감추었고, 바이츠만은 도쿄 치요다구 니반초에 위치한 주일 이스라엘 대사관 지하 상황실에서 막대한 양의 서류를 파쇄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의 인생에서 맞이한 첫 번째 실패였다. 수치스러운 기억이었다.

“빚을 갚아 줘야지.”

그렇게 중얼거린 바이츠만은 굳게 입을 다문 표정으로 3단계에 사용할 승합차에 몸을 실었다.

* * *

트레이시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방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천장을 향해 있었지만, 그녀의 사고는 몇 시간 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못 돌아오는 건가요? 안 돌아오는 건가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못 돌아올지도 모르겠어.

그의 대답이었다.

안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못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에는 돌아올 수 있으면 돌아오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트레이시는 그 대답에 만족했다. 그렇게 대답해 준 그가 고마웠다.

거기까지 생각한 트레이시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알고 있었다. 그를 마음에 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업무적인 관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에 그 여자가 있다는 것을 트레이시도 알고 있었다.

-그는 현재 저에게 있어서 저 자신보다 소중한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에 대한 정보를 넘겨서, 그를 팔아서 제 삶을 유지할 생각은 없어요.

행복한 미소를 얼굴 가득 담고서, 그렇게 말하던 그 여자가.

빼앗아 버릴까?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빼앗을 수 있을까?

그런 계산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트레이시가 알고 있는 한규호는, 쉽게 마음을 움직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저 지켜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시간은 지나간다. 이 감정도 분명히 옅어진다.

트레이시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그가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트레이시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음식이 포장된 봉지를 한 손에 들고, 같이 산책 가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보 같아.”

트레이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서 다시 중얼거렸다.

“진짜…… 바보 같아.”

말이 막 끝나는 그 순간에, 트레이시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 오토락이 열리는 소리였다.

트레이시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현관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가 왔다. 그가 돌아왔다.

포장된 음식이 담긴 봉지나, 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트레이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현관문을 열려던 트레이시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립글로스라도 바를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트레이시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무엇보다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렇게 결정한 트레이시는 방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문이 열렸다.

문 바로 앞에 남자가, 정확히는 남자들이 서 있었다.

한규호가 아닌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트레이시의 뇌가 인식한 그 순간에, 트레이시의 명치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트레이시의 숨이 턱 하고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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