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54화 (354/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37)

* * *

내비게이션에서 판교에서 가락시장까지 가는 경로를 검색하면 대부분 분당수서간고속화도로를 이용하는 경로를 안내했다.

가장 편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경로였다.

하지만 분당수서간고속화도로가 가장 빠른 경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만큼, 출퇴근 시간과 관계없이 상시 교통 체증이 발생했다.

저녁 9시 반이 가까워지는 시간임에도 분당수서간고속화도로에는 차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차들 중에서 한규호가 탑승한 택시도 있었다.

택시의 위치는 흔히 동부구치소라고 불리는 동부 준법 지원센터 근처였다.

가락시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꽉 막힌 도로 때문에, 택시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택시 안에서 한규호는 신체 제어 능력을 사용해 억지로 맥박수를 늦추고 있었다.

맥박수를 늦추지 않으면, 심박수가 분당 120을 가볍게 넘어 버렸다.

꽉 막힌 도로 때문에 조바심이 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규호는 흥분하고 있었다. 그답지 않게 긴장하고 있었다.

이번 만남이 중요하다고 그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베드로 신부와 지금까지 네 번 만났다.

방콕 통로에 있는 외국어 학원, 파타야 외곽에 자리 잡은 요트 수리 조선소였다. 신도림역 인근의 호텔, 그리고 가톨릭대학교의 오래된 연구실.

약속하지 만남이 아닌 파타야를 제외한다면, 베드로 신부는 만남에서 단 한 번도 한규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한규호는 서용석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했고, 의뢰를 받은 베드로 신부는 서용석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세 번째 만남에서 서용석이 입국 심사를 받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여 주었고, 네 번째 만남에서 서용석을 에스코트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여자, 사라 아이젠하우어라는 명의의 독일 여권을 사용하는 여자를 찾아냈다.

그리고 오늘, 다섯 번째 만남에서 베드로 신부가 서용석과 관련된 무언가를 알려 줄 것이다.

결정적인 무언가를 확보했기에, 만나자고 한 것이다.

한규호는 그렇게 확신했다.

조금 전 전화에서 신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 여자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말이다. 그리고 더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여자의 위치. 그것밖에 없었다.

만약 여자가 한국에 없다거나, 또는 서용석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면, 한규호를 호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용석을 보살피는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리고 위치도 알아냈다.

그곳에 서용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추측이 한규호의 심박 수를 끌어 올리는 원인이었다.

* * *

오후 10시가 가까워지는 시간, 가락시장 서북 문은 사람과 차량의 통행이 가장 드문 출입구였다.

새벽 경매장으로 농수산물을 나르는 대형 윙바디 트럭들은 남문이나 남1문을 이용했고, 늦은 밤, 떨이 상품을 구매하려는 고객들은 동문을 통해 가락몰로 향했다.

반대로 주간에만 영업하는 건어물 상점이 밀집된 서북 문에는 사람도, 차량도 찾아올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한산하다 못해 스산한 가락시장 서북 문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추었고, 한 사람이 택시에서 모습을 보였다.

한규호였다.

한규호를 내려준 택시가 떠나자, 그림자에 숨어있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규호는 처음 보는 한국인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시겠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한규호는 말없이 남자를 따라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가 안내한 장소는 서북 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오래된 건물이었다.

‘가공처리장’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는 건물 3층, 구석에 있는 불 꺼진 공장이 최종 목적지였다.

김치 양념을 만드는 공장인지, 고춧가루를 비롯한 김칫소 재료들이 입구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 재료가 쌓여 있는 구석에, 한규호를 이곳으로 호출한 베드로 신부가 앉아 있었다.

공장으로 한규호를 안내한 남자는 베드로 신부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는 남자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발소리마저 완전히 사라지자, 공장 안에는 한규호와 베드로 신부, 두 사람만이 남았다.

“모시러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외국인이 있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장소라, 사람을 보냈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베드로 신부가 그렇게 말하며 의자를 권했다.

한규호는 의자에 앉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누구입니까?”

한규호를 안내한 남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우리 쪽 사람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규호는 더는 질문하지 않고, 베드로 신부가 지정해 준 의자에 앉았다.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의자에 앉은 한규호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여자는 누구입니까?”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었다.

한규호에게는 여자의 정체, 한국에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했다.

한규호의 직접적인 질문에 베드로 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동안 한규호의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규호도 평소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베드로 신부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확실히 무언가 있군.

베드로 신부의 눈을 바라보면서 한규호는 확신했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베드로 신부였다.

“크레디트 에우로파. 들어 보셨습니까?”

한규호는 잠시 동안 베드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벌지 브래킷.”

한규호가 대답했다.

한규호는 당연히 크레디트 에우로파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을 지배하는 세계 구급 투자은행, 유럽계 벌지 브래킷 중 하나였으니까.

“귀하는 크레디트 에우로파와 관련이 있습니까?”

베드로 신부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질문을 받으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닌데.”

한규호의 대답이었다.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으며, 동시에 경고였다.

베드로 신부도 한규호의 대답에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베드로 신부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답을 해 주지 않으시면 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은 한규호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누구지?”

“크레디트 에우로파와 관련이 있습니까?”

“여자는 어디 있지?”

“베르그만 가문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를 향한 질문만이 반복되었다.

한규호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선문답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려 하지 않는다면 말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테이블을 뛰어넘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뻗어 목을 틀어쥐고, 한규호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얻어 낼 생각이었다.

막 몸을 일으키려던 한규호의 귀에 다시 질문이 들려왔다.

“귀하가 찾는 서용석이 테스티모니움입니까?”

한규호의 몸이 멈추었다.

“서용석을 찾는 이유가 테스트모니움, 아니 기프티드이기 때문입니까?”

베드로 신부가 다시 물었다.

테스티모니움, CIA에서는 기프티드라고 지칭하는 이 능력 보유자. 그 단어가 서용석과 연결되어 베드로 신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슨 말이지?”

한규호가 물었다.

“귀하도 테스티모니움, 아니, 기프티드를 추적하고 다니는지를 묻는 겁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한규호의 본능이 이 대화를 계속 이어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용석은 기프티드가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

한규호는 답을 주었다.

“기프티드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까?”

베드로 신부가 물었다.

한규호는 본능이 권유한 대로 이 대화를 이어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일방적으로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내 차례.”

한규호가 말했다.

베드로 신부는 잠시 한규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서용석이 기프티드라고 생각한 거지?”

한규호가 물었다.

“그 남자와 크레디트 에우로파 사이에 선이 닿아 있습니다.”

베드로 신부가 답했다.

“북한에서 온 서용석이 어떻게 벌지 브래킷인 크레디트 에우로파와 연결된 거지?”

한규호가 물었다.

“제, 차례군요. 귀하는 테스티모니움, 또는 기프티드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드로 신부는 한규호의 침묵에서 긍정의 답을 읽어 냈다.

“어떻게 관련되어 있습니까?”

베드로 신부가 다시 물었다.

“내 차례. 서용석과 에우로파 크레디트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거지?”

“서용석을 수행한 여자가 그쪽 사람입니다.”

베드로 신부가 질문할 차례였다. 그러나 베드로 신부는 질문하는 대신, 사진 두 장을 꺼내어 테이블에 올렸다.

한규호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두 장의 사진으로 향했다.

첫 번째 사진은 지난 만남에서 베드로 신부가 보여 준 사진이었다. 사라 아이젠하우어라는 이름의 독일 여권으로 한국에 입국했을 때의 사진이었다.

한규호의 시선이 두 번째 사진으로 이동했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는 증명사진이었다.

첫 번째 사진보다 어려 보였지만, 동일인이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한규호에게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다니엘라 노이도르프, 1983년생, 독일 라이프치히 출생,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함부르크대학 부속병원에서 뇌혈관 전공으로 박사 학위와 전문의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11년 전, 병원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구했습니다. 에우로파 프룩스. 들어 보셨습니까?”

한규호는 반응하지 않았다. 베드로 신부는 그 침묵에서 부정의 신호를 읽어 냈다.

“에우로파 프룩스는 곡물 회사입니다. 그저 씨앗이나 농산물을 판매하는 작은 회사가 아니라, 금융시장을 지배하는 벌지 브래킷처럼, 세계 곡물 시장을 통제하는 5대 곡물 자이언트 중 하나입니다. 비상장 회사라 정확한 규모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시장에서는 시가총액을 2천억 달러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2천억 달러 규모의 시가총액이라면 석유 메이저인 엑손모빌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전 세계 기업 시가총액 순위 30위권 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에우로파 프룩스의 대주주, 아니 모기업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모기업이 바로 벌지 브래킷인 크레디트 에우로파입니다.”

베드로 신부의 설명을 요약하면 벌지 브래킷인 크레디트 에우로파가 곡물 회사인 에우로파 프룩스를 소유하고 있고, 에우로파 프룩스 소속인 여자가 서용석을 한국에 데려왔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한규호의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크레디트 에우로파와 서용석과 기프티드의 연관성이었다.

한규호의 의문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베드로 신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조금 더 말씀드리죠. 크레디트 에우로파는 17세기에 동인도 회사에 출자하기 위해 설립된 유럽 최초의 투자은행 중 하나이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유일한 회사입니다. 베르그만 가문이 창립했고, 현재도 베르그만 가문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베르그만 가문의 가주와 대를 이어 베르그만 가문에 충성하는 가신들로 이루어진 경영진에 의해 비공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제야 한규호는 베드로 신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래된 역사, 비밀에 싸인 수뇌부, 막대한 자금력. 크레디트 에우로파는 호사가들이 좋아할 만한 음모론 비밀단체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바티칸과 경쟁을 하고 있군. 기프티드를 가운데 두고.”

한규호가 말했다.

베드로 신부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규호가 베드로 신부의 침묵에서 긍정 신호를 읽어 냈다.

“그 여자가 지금 한국에 있나?”

한규호가 물었다.

“제가 질문할 순서입니다. 귀하는 기프티드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겁니까?”

베드로 신부가 물었다.

이번에는 한규호의 침묵이었다.

긍정과 부정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에, 베드로 신부는 한규호의 침묵에서 아무것도 읽어 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베드로 신부는 대답을 듣지 않으면 더 이상의 질문도, 대답도 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그런 베드로 신부의 눈을 한참 바라보던 한규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기프티드라면? 이 지루한 질의응답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까?”

베드로 신부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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