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36)
수상한 간호사가 방문한 이후 3일째가 되었지만, 한규호를 포함한 세 사람이 있는 오피스텔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한규호는 언제나처럼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고, 카멜리아와 트레이시도 평상시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지금도 트레이시는 잔뜩 심각한 얼굴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 있는 한규호는 그런 트레이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경우는 있었어도, 저렇게 얼굴에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그다지 없는 트레이시였다. 그런 그녀가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이 한규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이다.
트레이시도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한규호는 트레이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한규호는 자신이 퍼즐 조각을 맞춰 도출한 결론을 트레이시에게 아직 알려 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비밀로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밀러 국장이 밀려난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밀러 국장의 직속인 트레이시가 한규호의 생각을 알았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트레이시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평상시와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가 한규호의 레이더에 포착된 것이다.
트레이시도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읽어 낸 것일까?
카멜리아는 언제나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방에서 두문불출한 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트레이시가 그런 카멜리아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감지해 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한규호는 가끔씩 얼굴을 보이는 카멜리아에게서 풍기는 미묘한 분위기를 읽어 낼 수 없었다.
한규호니까 가능한 이야기였다. 일반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된 그의 감각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만약 트레이시의 얼굴에 드러난 심각함의 원인을 찾는다면, 그뿐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한규호는 평소와는 달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트레이시의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할 말 있어요?”
자신을 바라보는 한규호의 시선을 인식했을까? 트레이시가 한규호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니. 그냥.”
“그냥 뭐요?”
트레이시가 되물었다. 확실히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뭐 화나는 일이 있나 싶어서.”
한규호가 물었다.
그 말에 트레이시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I’ve got cramps.”
트레이시가 말했다.
그리고 한규호는 그런 트레이시의 말을 이해하지 못 했다. 해석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cramp는 근육 경련, 한국말로 하면 ‘쥐가 났다’의 ‘쥐’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였다.
한규호는 그녀의 말을, ‘쥐가 났어요.’로 해석했다. 근육이 수축하면서 경련하고, 동시에 극심한 통증을 느낀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하지만 한규호의 눈에 보이는 트레이시의 모습에서 근육 경련이나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모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인상을 쓴 채로, 한 손을 허리에 대고, 다른 한 손으로는 커피를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쥐가 났다면, 커피를 따르기는커녕, 그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쥐가 났다고(got cramp)?”
한규호가 다시 물어봤다.
트레이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한규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Cramp가 아니라 Cramps. Period cramps.”
그제야 한규호는 트레이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미안.”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트레이시의 얼굴에 떠오른 심각함의 원인은 생리통이었다. 그리고 한규호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규호는 cramp라는 단어가 근육 경련을 의미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cramps가 생리통을 의미한다는 것은 몰랐다. 생리라는 단어로 많이 쓰이는 period가 없었다면 트레이시의 말을 듣고서도 몰랐을 것이다.
그거였군.
한규호는 다시 휴대전화로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신체에 대한 완벽한 통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세포 말단까지 하나하나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생리통은 한규호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당신이 모르는 것도 있네요.”
커피를 다 내린 트레이시가 한규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영어는 내 모국어가 아니니까, 모든 단어를 다 아는 것은 아니지. 더군다나 여성들이 사용하는 용어라면 더더욱 그렇고. 아무튼, 미안하게 되었군.”
한규호가 말했다.
“괜찮아요. 당신 잘못도 아니니까.”
트레이시는 한규호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커피 달라고 안 했는데.”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커피 잔을 들어 올리기 위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신 내 커피를 달라고 했겠죠.”
트레이시가 입술을 샐쭉거리며 말했다.
“고마워. 잘 마실게.”
한규호는 그런 트레이시에게 작게 미소를 지어 주고는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조금, 아니 평소보다 많이 진하다 싶은 느낌의 커피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규호는 생리통으로 고통받는 여자에게 커피 맛에 대해 불평할 정도로 분별이 없지는 않았다.
“괜찮군. 잘 내렸네.”
한규호의 칭찬에 작게 미소를 지은 트레이시는 자신의 커피 잔을 들고 거실 창문으로 다가가 창밖을 바라보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일부러 진하게 내렸군.
한규호는 아무런 미동 없이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는 트레이시를 보면서 그렇게 확신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 트레이시는 창문 밖을, 한규호는 창문 밖을 바라보는 트레이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거실 안에는 커피 향과 침묵만이 흘렀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트레이시였다.
“평화롭네요.”
트레이시가 오피스텔 뒤편 공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규호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가로 걸어가 트레이시의 옆에 섰다.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공원의 모습이 들어왔다. 비 때문인지, 산책로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가.”
한규호는 이슬비에 촉촉이 젖어 가는 산책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규호는 전혀 평화롭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사람 없는 공원만큼 쓸쓸한 것이 없다. 거기에 비까지 내리니 어딘가 처연한 느낌까지 들었다.
백번 양보해서, 거실 밖 풍경만으로 보면 평화로운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거실 안, 정확히 말하면 거실과 카멜리아가 있는 공간에서는 기분 나쁜 긴장감과 고요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마치, 태풍이 다가오기 직전에 습기를 잔뜩 머금은 진득한 공기가 밀려들어 오는 것처럼.
“지겹다고 생각했어요.”
트레이시가 창밖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뭐가 지겹다고 생각했는데.”
한규호가 트레이시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어디도 못 가고,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 그리고 당신이 언제 올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곳이. 지겹고 답답하다고 느껴졌어요.”
한규호는 말없이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트레이시의 옆얼굴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느껴졌다라. 과거형이군. 지금은 아니라는 의미?”
한규호가 물었다.
“여전히 지겨워요.”
그렇게 말한 트레이시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심심하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지겹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이 공간이 조금 답답하기는 하지만.”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답답한 이 공간을 나중에 그리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트레이시의 말에 한규호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녀와 같이 걸었던 산책로를 바라보았다.
산책로에 우산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있는 노부부는 서로를 의지한 채로, 느린 걸음으로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중에,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아마도 은퇴했을 때? 미국 어딘가에서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지금 이 시간, 이 장소가 떠오르면, 참 지겹고 답답했다는 생각보다는 그립다는 느낌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트레이시도 한규호와 같이 걷던 산책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할머니 같은 소리를 하네.”
한규호가 말했다.
트레이시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한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요? 이해해 줘요. 생리 기간 동안 여자의 마음은 5월의 하늘과 같으니까요.”
“한국의 5월은 맑고 청명하지.”
“……한마디도 지지 않는군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입을 쌜쭉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중에 비가 그치면 같이 산책 가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그래.”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심각한 이야기 없는 진짜 산책.”
트레이시가 한규호를 보며 말했다.
한규호가 말했다.
“그래. 진짜 산책.”
한규호도 트레이시를 보며 말했다.
“약속했어요.”
트레이시가 한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두 사람은 결국 산책을 나가지 못했다. 아침부터 시작한 이슬비가 오후부터는 가랑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내리던 비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그쳤다.
비가 그쳤다고, 한규호와 트레이시가 산책하러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한규호에게 급한 약속이 생겨 버린 것이다.
한규호의 전화가 진동한 시간은 밤 9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산책하러 나가기는 애매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한규호는 테이블에 올려놓은 전화의 진동을 느꼈고, 몸을 돌렸고, 전화기를 들어 올렸고, 액정에 떠 있는 번호를 확인했다.
그리고 바티칸에서 온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남자가 전화를 했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서용석에 대한 정보, 그것뿐이었다.
한규호는 전화기를 들고, 감각을 확대해 트레이시와 카멜리아가 각자의 방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베드로 신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씀하시죠.”
한규호가 말했다.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신원을 확인했다. 서용석을 에스코트하던 여자의 신원을 확인했다는 의미였다.
한규호는 그게 내용의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여자의 신원을 확인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전화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한규호의 느낌을 확인시켜 주듯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아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뵈었으면 합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장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위치 정보가 담긴 메시지가 들어왔다.
베드로 신부가 지정한 장소는 가락시장 서북 문이었다. 판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위치를 확인한 한규호는 지갑과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 오피스텔에서 한규호의 물건이라고는 지갑과 휴대전화뿐이었다.
물론 속옷이나 칫솔 같은 잡다한 소모품이 있었지만, 한규호가 이곳을 영원히 떠난다면, 그가 챙겨야 하는 소지품은 지갑과 휴대전화가 전부였다.
만약 베드로 신부가 서용석의 위치를 확보했다면? 다시 여기에 올 이유가 없다.
지금의 한규호에게 있어서 서용석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없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막 발을 옮기려던 한규호의 눈에 트레이시의 방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트레이시는 놀란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한규호의 표정에서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지금 나가나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한규호는 말없이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 이곳에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카멜리아와 이스라엘에 관해서 이야기해 줘야 할까?
트레이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런 한규호를 트레이시는 참을성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오늘 밤 못 돌아올지도 모르겠어.”
한규호의 대답이었다.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말에 대답이 없었다.
잠시 동안 한규호의 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못 돌아오는 건가요? 안 돌아오는 건가요?”
한규호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트레이시의 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못 돌아올지도 모르겠어.”
한규호가 말했다.
트레이시의 고개가 위아래로 작게 움직였다.
“조심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한규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괜찮을 거야. CIA 요원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한규호는 현관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