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35)
* * *
고치를 튼 애벌레처럼 이불 속에 몸을 숨긴 카멜리아는 스마트폰 화면에 떠오르는 글을 읽고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떠오른 문장은 단순했다. 아무런 미사여구 없이, 전달할 내용만 담겨 있었다.
내용도 단순했다.
카멜리아를 구출하기 위해 바이츠만 국장을 비롯한 작전팀이 한국에 들어와 있고, 조만간 작전을 개시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카멜리아는 어둠 속에서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 보았다.
그 문장을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었다.
구출팀이 움직인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만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이 그녀를 확보하기 위해 직접 움직인다는 의미였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없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곳을 지키는 CIA 요원이 있었다.
CIA 요원이 지키고 있는데 작전팀을 움직인다고?
카멜리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미국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카멜리아가 짐빔의 목숨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의 승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CIA 요원이 지키는 이곳에 이스라엘이 작전팀을 운용한다면 미국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그게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카멜리아는 조국이 그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믿고 있었다. 이 지루한 구금 생활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카멜리아는 그날을 상상했었다. 똥 씹은 표정의 CIA 요원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이곳을 걸어 나가는 그런 상상이었다. 작전팀이 이 장소를 습격하는 상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카멜리아는 휴대전화를 잡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냈다.
-랭리 요원이 있어요.
바이츠만이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여차하면 그녀 자신은 물론 바이츠만, 나아가 그녀의 조국까지 곤란한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다른 특이 사항은?
돌아온 답이었다.
CIA 요원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바이츠만은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알고 있지만, 작전팀을 움직이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카멜리아는 잠시 휴대전화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무언가 합의도 있었을 것이다.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알지 못하는 어떠한 합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바이츠만은 합의에 대해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알려 줄 필요도 없고, 카멜리아는 알 권한도 없으니까.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CIA 요원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지?
-그녀를 어떻게 할 거죠?
카멜리아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위에서 지시를 내리면 그녀는 따른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바이츠만과의 관계에서 지시와 이행이라는 구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어봐야 한다고,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고 그녀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처음 해 보는 월권이었다.
화면 너머에서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화가 났을 것이다. 한 번도 지시에 의심을 품지 않은 카멜리아의 이런 돌발 행동에 바이츠만은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야 해.
그녀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다.
-청소.
카멜리아는 눈을 감아 버렸다.
예상대로의 답변이었다.
청소, 제거한다는 의미였다. CIA 여자 요원은 이스라엘 작전팀에 의해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바이츠만 국장이 생각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카멜리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합의가 있었을 것이다. 신 베트와 CIA 사이에 어떠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 합의 내용 안에 여자 요원의 처리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카멜리아는 합의 내용을 알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어떤 내용인지 묻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불안감이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작전이 진행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 남자, 거실 소파에 누워 있는 그 남자가 위험하다고 카멜리아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다.
-다른 특이 사항은?
카멜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는 막을 수 없었다.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위에서 지시하고 그녀는 따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멜리아는 마지막 기대를 걸고 메시지를 보냈다.
-남자는 어떻게 할 거죠?
카멜리아의 메시지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다.
-정체는?
카멜리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 * *
-남자는 어떻게 할 거죠?
바이츠만 국장은 모니터에 떠오른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남자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전달하러 갔던 작전팀 요원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동양인 남자가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앤드류 로이즈는 남자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고, 바이츠만은 남자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작전에 영향을 주는 변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남자가 CIA 요원이라면? 앤드류 로이즈가 이야기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트레이시 테일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남자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을 것이다.
남자가 CIA 요원이 아니라면? 국정원 요원일 것이다. 국정원이 은신처를 마련했으니까. 국정원과 CIA 사이의 연락책, 관리 인력, 그 정도 역할에 불과할 것이다.
남자가 국정원 요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답은 나와 있었다. CIA 요원 트레이시 테일러를 제거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정원 요원을 남겨 둘 필요가 없다.
문제가 생긴다면?
미국이, CIA가, 앤드류 로이즈가 해결해 줄 것이다.
만약 미국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한국의 국정원 따위는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으니까.
바이츠만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정체는?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남자의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카멜리아가 무언가 할 말이 남았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다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모니터에서 글자가 떠올랐다.
-브랜든 허드슨
그 이름을 본 순간, 바이츠만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한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브랜든 허드슨, UC 데이비스 양조학 박사, 트레이시 테일러의 위장 신분이었던 에블린 길먼의 남편. 카멜리아의 마지막 목표.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만든 당사자, 그가 이곳에 있었다.
바이츠만 국장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앤드류 로이즈가 알았을까? 알았다면 왜 알려 주지 않았을까?
몰랐을까? 몰랐다면, 도대체 저 브랜든 허드슨이란 놈의 정체가 무엇일까?
몇 개의 질문이 빠르게 떠올랐지만, 어느 질문 하나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지금 상황에서 바이츠만이 답을 도출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바이츠만은 생각을 전환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계속 붙들고 있어 봤자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이츠만이 해야 할 일은 고민이 아니었다. 결정이었다.
이대로 계속 작전을 진행할지, 아니면 중단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남자는 변수(變數, variable)였다. 작전에 변수가 나타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변수가 생기면 변수가 끼칠 영향을 계산해 작전을 지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변수가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 * *
바이츠만을 고민에 빠지게 한 변수, 한규호는 머릿속으로 계속 퍼즐을 맞춰 가고 있었다.
다가오는 미국 대통령 선거, 자리에서 밀려난 밀러 국장, 한국에 들어와 있는 신 베트 작전팀, 연락할 수단을 전달해 주었을 수상한 간호사, 그리고 언제나처럼 방 안에 콕 박혀 있는 카멜리아.
퍼즐이 맞춰지고, 퍼즐 위에 그려진 그림이 조금씩 모습을 보였다.
한규호는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을 바라보면서 확신했다.
이스라엘이 직접 카멜리아를 데려갈 생각이다. 요원을 직접 움직일 생각이다. 그런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나리오가 영화화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트레이시, 이곳을 지키고 있는 CIA 요원.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은 크랭크인에 들어갈 수가 없다.
아무리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미국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규호는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을 하나 더 들어 올렸다.
트레이시 테일러, 밀러 국장 직속의 기프티드 전담 요원. 트레이시의 정체를 다른 이들이 알고 있을까?
밀러 국장이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치자. 누군가가 그의 권한을 물려받는다. 재선 때문에 마음이 급한 미국 대통령이 지시를 내렸다고 치자. 밀러 국장을 대신해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누군가는 기프티드에 관한 내용을 전달받았을까?
아닐 것이다. 만약 내용을 전달받았다면, 분명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멍청이들을 한국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밀러 국장을 대신해 이번 일을 총괄하는 누군가는 다음 국장 자리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움직이지는 않겠지. CIA 국장이라는 왕좌가 눈앞에 있는데, 전면에 나섬으로써 정치적 부담을 안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스라엘에게 직접 데려가라고 한 것이다. 대통령의 지시는 이행하고, 정치적 부담은 피하고, 이스라엘에게 채무도 안겨 줄 수 있는 묘수였다.
그렇다면 트레이시는? 어떻게 하기로 합의를 보았을까?
트레이시가 위험해질까?
한규호는 질문을 떠올렸고, 바로 그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CIA가 트레이시를 버릴 이유가 없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권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선진국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트레이시를 포기함으로써 미국이 얻는 이익이 없다. 만약 미국이 요원을 포기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기댓값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멍청이들이 이 장소를 습격해 온다고 하더라도 트레이시에게 신체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CIA의 승인 아래 트레이시를 납치하는 정도겠지. 납치한다고 하더라도 위해를 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저 트레이시와 카멜리아의 위치를 뒤바꾸는 정도, 그 정도일 것이다.
한규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이스라엘과 CIA가 무엇을 합의했든, 한규호가 그 합의에 따를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어떤 시나리오를 썼든 간에, 한규호는 그들이 쓴 시나리오에 맞춰 연기할 생각은 없었다.
작전팀이 이곳을 습격해 온다면 한규호가 대응하면 그만이었다.
작전팀이 몇 명이든, 손에 무엇을 들고 오든, 한규호는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
제압하고, 국정원에 넘기면 그만이다. 복잡한 외교적 절차가 뒤따르겠지만, 한규호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오히려 CIA나 이스라엘에게 채무를 안길 수 있으니 한국이나 한규호로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한규호는 그다지 개운한 기분을 느끼지는 못했다.
젠장.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결론이 나자, 그런 후회가 찾아왔다.
카멜리아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미국 놈들이 이스라엘에 돌려주든 말든 두고 왔어야 했다. 그랬다면 카멜리아도, 트레이시도 한국에 올 일이 없었고, 이렇게 쓸데없는 데 심력을 소모할 필요도 없었다.
한규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완의 미소 띤 얼굴이었다.
다 당신 때문이야.
한규호는 머릿속에 떠오른 완의 얼굴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마치 부끄러움은 없다는 듯, 엉덩이를 드러낸 채로 소변을 보는 카멜리아를 보면서, 한규호는 완을 떠올렸다. 그리고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한규호는 머리를 저었다. 이제 와서 소용없는 후회였다.
타이밍이 중요한데…….
한규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규호에게는 트레이시나 카멜리아보다 우선시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티칸에서 온 남자가 찾아 줄 서용석에 대한 정보. 한규호에게는 그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사안이었다.
만약 두 사안이 같은 시간대에 충돌한다면, 한규호는 거리낌 없이 트레이시를 포기해야 했다. 아니, 그럴 생각이었다.
올 거면 빨리 와라.
한규호는 이 근처 어딘가에 숨어 있을 이스라엘 요원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 * *
작전은 진행한다.
바이츠만은 그렇게 결정했다.
브랜든 허드슨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남자는 변수였다. 변수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임의의 값이었다.
변수가 문제가 된다면 변에 특정값을 입력해 상수로 치환해 버리면 그만이다.
남자를 확보한다. 확보하고, 정보를 캐낸다.
미국에서 문제를 삼는다면? 앤드류 로이즈는 남자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다. 훌륭한 핑곗거리가 된다.
돌려달라면? 돌려주면 그만이다.
미국에서 문제 삼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이면 그야말로 바이츠만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상수가 되는 것이다. 치환이 아니라 값을 정해 버릴 수 있게 된다.
여자는 제거, 남자는 확보.
바이츠만은 속으로 그렇게 다시 한번 말하고는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 * *
이불속에서 초조하게 화면을 바라보던 카멜리아는 눈이 뻑뻑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불 속 어둠은 카멜리아의 홍체를 최대한으로 확장시켰고, 확장된 홍체를 통해서 스마트폰에서 뿜어 나오는 청색광이 그녀의 망막 시상 세포를 파괴하고 있었다.
카멜리아는 눈이 충혈되는 것을 느꼈지만, 스마트폰에서 눈을 뗄 수는 없었다.
한국에 온 이후,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카멜리아가 건조해지는 안구에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눈을 두어 번 깜빡였을 때,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다.
-3일, 17시.
3일 후, 텔아비브 시간으로 17시에 작전을 계시한다는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후, 손가락을 움직여 휴대전화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이불 속 유일한 광원이 사라지면서 카멜리아는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겼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텔 아비브가 17시면, 서울은 23시였다.
3일 후, 23시에 작전팀이 이곳을 찾아올 것이다.
어둠 속에 잠긴 카멜리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절차에 따라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화기를 공장 초기화 시켰다.
전화기가 초기화되고,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던 메신저 어플리케이션은 삭제되어 버렸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