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50화 (350/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33)

“마지막 식사가 언제였죠? 저녁을 드시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들었나요?”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백인 여성이 채혈을 위해 카멜리아의 팔에 토니켓(Tourniquet : 압박대)을 묶으며 질문을 던졌다.

카멜리아는 압박대가 강하게 자신의 팔에 감기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건강 검진에 혈액검사가 포함되어 있고, 채혈을 위해 8시간의 금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은 카멜리아는 어제저녁부터 거른 상태였다.

압박대가 묶인 팔에서 혈관이 모습을 드러내자, 여자 의사는 알코올 솜으로 채혈 부위를 소독한 후, 바늘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조금 따끔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바늘이 제대로 혈관을 뚫고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 여자 의사 옆에 있던 백인 남자가 의사에게 Vacutainer라고 불리는 진공 채혈 도구를 건네주었다.

여자 의사가 채혈 도구를 바늘 홀더에 끼우자, 압력 차이에 의해 검붉은 피가 빠르게 진공 채혈기를 채워 나갔다.

침대에서 몇 발 떨어진 위치에 서 있는 트레이시는 카멜리아와 여자 의사, 남자 간호사의 모습을 한눈에 담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처음부터 건강검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피스텔로 찾아온 의사에게 건강 검진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관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만약 그런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건강검진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단서를 붙여 가면서.

트레이시로서는 당연한 요구였다. 무언가 상황이 발생한다면 트레이시가 즉각적으로 반응을 해야 했다.

예를 들어 의사가 카멜리아를 해치려 한다면? 건강검진을 받던 카멜리아의 신변에 위험이 발생한다면? 그 모든 책임은 트레이시가 져야 했다.

그러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트레이시는 카멜리아 방 한쪽에 서서 건강검진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특별히 이상한 장면은 없었다.

카멜리아를 만난 의사는 몇 가지 질문을 통해 문진을 마치고, 체온과 혈압을 쟀고, 지금은 채혈을 하고 있었다.

트레이시가 전문 의료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의사가 수상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있다면, 검진을 받고 있는 카멜리아였다.

건강검진이 이어지는 동안 카멜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질문에 답하고, 의사에 지시에 따를 뿐이었다. 지금도 마치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형처럼 자신의 팔을 내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트레이시는 카멜리아의 그 얼굴이 싫었다. 마치,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억울하게 이곳에 감금되어 있다고 항변하는 듯한 그 표정이 싫었다.

“이제 채혈은 다 끝났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부인과 검진인데…….”

채혈을 마친 의사가 무언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리를 비켜 드려야 하나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부인과 검진, 다시 말해 생식기 검진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치부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윤리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의료진이 아닌 트레이시는 검진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의미였다.

트레이시는 잠시 고민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두말없이 자리를 비켜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카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없어요.”

트레이시는 카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카멜리아는 여전히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의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얼마나 걸리죠?”

“외음부를 확인하고, 검체를 채취하는 데 5분가량 걸릴 것 같습니다.”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문은 열어 두도록 하겠어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 카멜리아의 방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언제나처럼 소파에 누워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있는 한규호의 모습이 보였다.

트레이시는 소파 쪽으로 걸어가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있는 한규호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한규호도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저 여자를 데려와서 일이 이렇게 되었어요.’

트레이시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무릎을 접어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트레이시는 그런 한규호를 잠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 한규호가 만들어 준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런 트레이시를 보면서, 한규호는 카멜리아를 어서 빨리 정리하는 게 좋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

트레이시가 자리를 비운 카멜리아 방에는 이상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카멜리아의 허리 부분에 설치되어 있는 가림막을 중심으로 그녀의 하복부는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었고, 검진을 하는 의사는 카멜리아의 하복부에, 가장 은밀한 곳에 머리를 가져다 대고 있었고, 가림막을 설치한 남자 스태프는 카멜리아의 머리맡에 서 있었다.

카멜리아는 거북함을 느꼈다. 의사에게 치부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거북한 것이 아니라, 방문이 열려 있다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는 카멜리아에게 하복부를 검사하던 의사가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 생리가 언제였죠?”

“……약 열흘 전. 그쯤이요.”

“주기는 정확한가요?”

“……네.”

“양이나 통증은 어떤가요? 변화가 있었나요?”

“그다지…… 변화는 없었어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하복부에서 느껴졌다.

“차가워요.”

의사가 말했다.

질경(膣鏡 : vaginoscope)이 그녀의 몸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카멜리아는 불쾌감을 느꼈다. 여자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 혐오감이었다.

“마지막 성관계는 언제였나요?”

의사가 물었다.

“……기억나지 않아요.”

카멜리아가 답했다.

거짓말이었다. 마지막 성관계가 언제였는지, 누구였는지 그녀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명 짐 빔,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무기를 중개하는 방산 브로커 제임스 붐이 그녀의 마지막 상대였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최근 누군가와 특히 거실에 있는 저 남자와 관계가 없다는 정보를 알려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자궁 경부 세포를 채취할 거예요. 불편할 수 있어요.”

가림막 너머에서 그런 말이 들려오고, 하복부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 순간 카멜리아의 몸이 심하게 한 번 떨렸다.

카멜리아의 몸이 떨린 것은 자궁경부를 긁어 대는 면봉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맡, 베개 속으로 들어온 남자의 손 때문이었다.

30대 백인 남자, 여자 의사를 도와 건강검진을 도와주던 남자는 자궁경부에 대한 검체 채취와 동시에, 카멜리아가 누워 있는 베개 밑으로 무언가를 집어넣은 것이다.

카멜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머리맡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카멜리아는 그 신호를 읽어 냈다.

카멜리아가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자신의 몸으로 다른 사람의 시야를 차단한 상태로, 카멜리아의 손을 이끌어 베개 속에 남자가 밀어 넣은 물건을 확인시켜 주었다.

얇고, 단단한 바(Bar) 형태의 물건이 카멜리아의 손에서 느껴졌다.

전화기. 남자가 베개에 숨긴 것은 전화기였다.

“자, 거의 다 끝났어요. 많이 불편한가요?”

다시 가림막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조금.”

카멜리아가 말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떨림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카멜리아는 가장 은밀한 부위를 노출하고 있었고, 가장 깊은 곳에 이물질이 닿아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고 해서 무언가 다른 상황이 생긴 것이라고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다 되었어요. 이제 다리 펴도 괜찮아요.”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하복부에서 거리를 벌렸다.

카멜리아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속옷을 챙겨 입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전화기를 숨긴 남자도 아무런 일 없다는 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가림막을 치웠다.

“일단 외견상으로는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아요. 일단 검사를 해 봐야 하겠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검체 채취용 면봉을 밀봉한 의사가 장갑을 벗으면서 카멜리아에게 말했다.

카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의사를 바라보았다.

누구일까? 누가 이 남자를 보낸 것일까?

***

갑작스럽게 건강검진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카멜리아는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하나는 진짜 건강검진이라는 가설이었다.

그녀는 신 베트의 요원이었고, 신 베트는 CIA의 협력 기관 중 하나였다.

그러니 CIA는 카멜리아를 신경 쓸 것이 분명했다. 만약 카멜리아의 신변에 위험이 생기면 CIA로서도 곤욕스러울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래서 말 그대로 진짜 건강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건강검진이라는 가설이었다.

또 다른 가설은 신 베트가 카멜리아에게 접촉하기 위한 의도라는 가설이었다. 카멜리아는 휴대전화가 없었다.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도 없었고, 외부와 연락을 취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 카멜리아에게 접촉을 하려고 한다면 이번 기회를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리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금 카멜리아를 구금하고 있는 주체는 미국, 그중에서도 CIA였고, 그녀가 소속된 신 베트는 절대로 CIA를 거스르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만약 국정원이었다면? 만약 저 백인 여자가 없었다면? 신 베트는 국정원이나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바로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 여자가 있는 이상, 신 베트가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카멜리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건강검진에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의사가 찾아오고, 문진을 하고, 체온과 혈압을 측정하고, 피를 뽑을 때까지, 카멜리아는 여자 의사에게서 정보원의 향기를 느낄 수 없었다.

의사처럼 행동했고, 의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베개 밑으로 휴대전화가 들어온 그 순간, 그녀가 생각했던 두 번째 가설이 현실이 되었다.

이번 건강검진은 카멜리아와 접촉하려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다.

카멜리아는 여자 의사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미국 쪽 사람이다. 그것은 확실했다. 미국의 동의 없이 이스라엘에서 사람을 이곳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카멜리아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볼 정도로, 무언가 증거를 남길 정도로 미숙한 요원이 아니었다.

“혹시 뭐 궁금한 것이 있나요?”

여자 의사가 카멜리아에게 물었다.

카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부탁할 것도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최선은 어서 저 두 사람을 이곳에서 내보내고, 다시 이 방에 홀로 남는 것이었다.

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이불속에 들어가서, 베개 밑에 숨겨진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것이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다.

“고생했어요. 그럼, 이만.”

자신의 짐을 모두 챙긴 여자 의사가 그렇게 말하고는 카멜리아의 방을 나갔다. 휴대전화를 베개 밑에 숨긴 남자도 여자 의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나간 두 사람이 거실에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카멜리아의 모든 신경은 베개 밑에 숨겨 둔 휴대전화를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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