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49화 (349/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32)

***

신시아 챔버는 시애틀에 있는 도버 아메리칸 본사,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책상에는 언제나처럼 보고서와 서류 파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살펴보면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책상에 올려진 서류 대부분이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와 관련된 서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CIA 관련 파일이 없었다.

신시아 챔버는 CIA와 관련된 모든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밀러 국장을 경원시하고 있었다. 밀러 국장의 낙마설이 정가에 떠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가 다음 CIA 국장이 될 것인지에 대해 베팅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밀러 국장 직속이라고 할 수 있는 신시아 챔버도 몸을 사려야 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모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신시아 챔버에 대해 아는 사람이 CIA 내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신시아 챔버를 아는 사람 대부분은 밀러 국장의 측근이었다.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범주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신뢰할 만한 사람들 중에서 그녀가 기프티드 관련 업무를 담당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신시아 챔버가 단순히 위장 기업을 관리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언제 돌아설지 아무도 몰랐다. 신시아 챔버는 잠시만 방심하면 등 뒤에 언제 칼이 꽂힐지 모르는 세계에 살고 있었다.

신시아 챔버는 그런 생각에서 최대한 시선을 멀리한 채, 손에 들고 있는 서류에 집중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눈으로 서류를 읽던 신시아 챔버는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요 며칠 동안 그녀를 감싸고 있던 불안감이 그녀의 집중력을 저하시켰기 때문이다.

잠시 쉬어야 되겠어.

그렇게 생각한 신시아 챔버는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젖히고 몸을 기댄 다음 눈을 감았다. 딱 10분만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머리를 식혔다가 다시 시작하자. 그렇게 마음먹으면서.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며칠 전 밀러 국장과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

“내가 앤디라면 테일러 요원을 만나고 싶어 할 것 같아요.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을 거예요.”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어떤 이야기?”

밀러 국장이 물었다.

“국장님이 무엇을 꾸몄는지.”

그 말을 들은 밀러 국장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신시아 챔버는 어색함을 느꼈다.

미소, 웃음, 꼭 분류하자면 그런 종류의 표정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밀러 국장을 만나 왔지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 변화였다.

“트레이시가 앤드류에게 기프티드에 관해서 이야기해 줄지도 모르겠군. 신임 국장의 사랑을 받으려면 그 정도 정보는 건네줘야 하겠지.”

처음 들어 보는 밀러 국장의 농담이었다.

신시아 챔버는 밀러 국장의 농담에 웃을 수 없었다.

밀러 국장은 농담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농담하는 것을 본 적도, 농담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었다.

“신임 국장의 줄을 타려면. 트레이시보다 먼저 앤드류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지 않을까?”

밀러 국장이 말했다.

“국장님은 농담 같은 거 하지 마세요. 어울리지도 않고, 재미도 없으니까. 괜히 분위기만 망칠 분이에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요. 테일러 요원에게 알려 줘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상황에 대해서?”

신시아 챔버가 물었다.

밀러 국장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유를 듣고 싶어요.”

신시아 챔버가 물었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의 밀러 국장은 답을 주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날은 어쩐지 밀러 국장이 설명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드류는 국장 자리를 욕심내고 있을까?”

밀러 국장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모르죠. 나는 앤디와 그다지 친하지 않으니까요.”

“아는 대로 말해 보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앤드류에게 국장 자리는…….”

신시아 챔버는 그렇게 입을 열면서, 앤드류 로이즈를 떠올렸다.

말단 현장 요원 출신인 그가 CIA의 세 번째 자리인 수석작전요원에 오른 것은 정치를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물론 정치질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겠지만, 작전을 기획하고, 수행하고, 마무리하는 데 특화된 능력만으로 그만의 능력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작전의 스페셜리스트. 그게 앤드류 로이즈였다.

앤드류 로이즈가 CIA 국장이라는 왕좌를 바라고 있을까? 그럴지도 몰랐다. 왕좌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니까.

하지만 앤드류 로이즈는 왕좌에 앉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왕좌를 수단으로 사용하면 사용했지, 그것을 목적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수단이 되겠죠. 목적이 아닌.”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그의 목적은?”

“그는 대통령이나 자리가 아닌 국가와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에요. 국장님이 무언가를 꾸몄다고 한다면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고, 앤디가 생각하기에 합중국과 CIA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폐기하려 하겠죠.”

“트레이시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태워 버리겠죠.”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burn. 태운다는 의미가 있는 단어. 정보 세계에서는 해고, 또는 제거를 의미했다.

밀러 국장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시아 챔버는 국장의 끄덕임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운 좋으면 해고, 최악의 경우에는 신변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국장도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트레이시에게 알려 주지 않겠다는 국장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스튜가 서울에 있지.”

밀러 국장이 말했다.

신시아의 눈이 커졌다.

스튜, 기프티드 한규호가 트레이시의 곁에 있다. 그러니 트레이시에게 상황을 알려 줄 필요가 없다.

국장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신시아 챔버는 국장의 말속에 담겨 있는 의미도 이해했다.

한규호가 트레이시를 지켜 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앤드류 로이즈가 트레이시를 태워 버리려고 할 때, 한규호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보겠다는 의미였다.

***

“미친 인간.”

눈을 감고 있는 신시아 챔버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밀러 국장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할 사람이었다. 부하, 동료는 물론 가족과 친구라도 가치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용할 것이다.

“친구가 있을 리가 없지.”

신시아 챔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지금 상황에서, 신시아 챔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몸을 잔뜩 움츠린 채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보는 수밖에.

신시아 챔버는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책상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때, 그녀의 책상 한구석에 놓여 있는 사진 액자가 신시아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책상에는 두 개의 액자가 놓여 있었다.

신시아 챔버를 가운데 두고, 앤과 규가 신시아의 좌우 팔짱을 끼고 있는 사진 하나, 그리고 앤의 품에 안겨 있는 마리아, 얼마 전까지 베르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챔버가의 막내딸과 신시아 챔버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신시아 챔버는 물끄러미 두 개의 사진을 한눈에 담고 바라보았다.

넷이서 같이 찍은 사진이 없네.

신시아 챔버는 각각 세 명씩 찍혀 있는 사진을 보면서 속으로 말했다.

CIA 요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하면서, 일반적인 여성의 삶을 포기했다. 기프티드 전담 요원이 되고, 일반인과는 다른 삶을 선택했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남편도, 자식도 허용되지 않는 삶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다. 핏방울 하나 섞여 있지 않았지만, 가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세 명의 딸이 있었다.

신시아 챔버는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다가, 서류 대신 책상에 놓여 있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1시 43분. 홍콩은 새벽 2시 43분이라는 의미였다.

신시아 챔버는 잠시 물끄러미 전화기를 바라보다, 무언가 결심한 듯, 전화기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

휴대전화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 완이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둠이었다.

어둠을 확인한 완은 자신이 들은 알람 소리가 기상 알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의 기상 시간은 오전 5시 30분. 어두웠지만, 어둠 속에서 새벽 미명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어둠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방을 가득 채운 어둠에서 한 줌의 미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깊은 밤,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완은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44분. 알람이 울리기에 적당한 시간이 아니었다.

완은 휴대전화 잠금을 풀고, 그녀의 잠을 깨운 무언가를 확인했다.

텍스트 메시지.

-확인하면 전화 줘.

신시아 챔버가 보내온 문자 메시지였다.

완은 잠시 메시지를 바라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통화 연결음이 들린 후, 바로 신시아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내가 깨운 거야?

그 목소리에 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신시아 챔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아니요.”

완이 말했다.

-지금…… 어딘데?

“집이요.”

-안 자고 있었다고?

“네.”

-진짜로?

신시아 챔버가 재차 물었다.

완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아니요. 사실은 자고 있었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깨웠네. 미안해.

“괜찮아요. 그나저나 어쩐 일이세요?”

완이 물었다.

-아니. 그냥. 요즘 어떤가 해서…….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저는 별일 없어요. 여전히 바쁘고, 뭐. 그렇죠. 저번에 오셨다 가신 이후로, 지사장이 못 살게 구는 것만 빼면요.”

-그 작자가 규를 괴롭힌다고?

“아니요. 저에게만 그런다는 것이 아니라. 아시잖아요. 저번에 된통 혼났으니, 직원들에게 더 엄격하게 한다. 그런 의미죠.”

-바꿔 버릴까?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뭐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바꿔도 나중에요.”

그렇게 말하며 완은 미소 지었다. 신시아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나저나 정말 그것 때문에 전화 달라고 하신 거예요?”

완이 물었다.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완의 입가에도 미소가 사라졌다.

-일이 좀 생겼어.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어떤 일요?”

-본토에서 조금 상황이 생겼는데, 규랑 직접적으로 상관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제가 뭘 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뭐랄까…….

“몸을 사리고 있어라?”

-그래. 그게 적당하겠다.

“그쪽은 괜찮아요?”

완이 물었다.

-여기는 괜찮아.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그저. 혹시나 해서. 어쩌면 다른 채널로 연락이 갈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황이면 바로 말해 주고.

신시아가 말했다.

완은 조금 더 캐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신시아와 앤, 그리고 마리아가 걱정되었기 때문에.

“네, 알겠어요. 무슨 변동 사항이 생기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완이 말했다.

-그래. 진짜 별일 아니야. 그저. 음, 뭐랄까. 당분간만 좀 조용히 있으면 될 것 같아서. 아, 그리고 혹시. 그 남자에게서 연락 온 적은 없었어?

신시아가 물었다.

그 남자가 지칭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특별한 연락은 없었어요. 그도 관련되어 있는 건가요?”

-아니.

“진짜로요?”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 줄게.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신시아가 말했다.

“……알겠어요.”

-그래. 일단은 지금처럼 그냥 지내면 돼. 알겠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알려 줄게.

“네.”

-깨워서 미안해.

“아니에요.”

-또 전화할게.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완은 잠시 통화가 끝난 휴대전화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의 전화 통화를 통해서 무언가 상황이 변한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상황을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완은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꺼내, 물을 한 잔 따랐다.

그리고 막 입으로 컵을 가져가던 그 순간에, 들려서는 안 될 소리를 들었다.

현관문 오토락이 풀리는 소리였다.

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문이 열린 틈 사이로 들어온 절단기가 안전 고리를 끊어 내는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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