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48화 (348/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31)

식양이라는 단어를 들은 한규호는 다리에 조금 힘을 불어넣었다.

여차하면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남자를 제압할 수 있도록.

“저의 전임자는 식양이라는 존재를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정부가 동남아시아 화교들을 감시하고, 그들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 기관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한 개인이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하지만 조직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돈의 흐름 같은 것 말이죠. 예산의 집행 없이는 조직이 운영될 수 없고, 돈이라는 것은 어떠한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니까요. 하지만 그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떻게 생각하냐는 눈빛으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자카르타에서 그 끔찍한 사건이 있고 난 뒤, 저의 전임자는 가설 하나를 세웠습니다. 혹시 식양이라는 존재는 단체가 아닌 것이 아닐까? 소수, 흔적을 남기지 않을 정도의 소수가 아닐까? 어쩌면 한 사람이지 않을까? 일반적인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테스티모니움이 아닐까? 그래서 제가 방콕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식양, 그리고 원 아이드 잭이 테스티모니움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오해한다는 말이지?”

한규호가 조금 전 질문을 다시 던졌다.

“바티칸이 식양을 노리는 것이 아닐까? 잡아다 해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오해 말입니다. 식양이라는 존재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형제님께, 우리는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라는 마음을 설명해 드리려면 테스티모니움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먼저겠죠.”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그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오해를 피하려고 속내를 보였다고 하기에는 큰 비밀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그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CIA라면 기프티드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두 자릿수 정도의 목숨은 가볍게 처리할 것이다.

“누가 믿겠습니까?”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바티칸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테스티모니움이라고 부른다. 이런 말을 사람들이 믿을까요? 차라리 바티칸 은행이 자본을 가지고 유럽 금융시장에 침투하고 있다는 말이 더 현실성 있게 들리지 않을까요?”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형제님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라고 이유를 설명드리기는 어렵겠네요. 그저 좋은 사이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제가 마음을 연 이유라고 말씀드리면 형제님은 믿어 주시겠습니까?”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베드로 신부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의 눈에서, 그의 목소리에서, 그의 피부에서 어떠한 거짓의 징후도 찾아내지 못했다. 한규호의 감각은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점수를 따 볼까요? 사실 이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싶어 형제님을 직접 뵙자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한규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라엘, 정확히는 신 베트의 작전팀이 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

“187번 고객님! 포장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바티칸에서 온 남자와의 대화를 회상하던 한규호의 귀에 점원의 외침이 들려왔다.

한규호는 손에 들고 있는 영수증에 적힌 187이란 번호를 확인한 후, 픽업대를 향해 걸어갔다.

“많이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주문하신 맥 치즈프라이 세트 두 개, 치즈 뺀 루키 버거 웨지 프라이 세트 한 개. 포장 맞으시죠?”

점원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무표정한 표정의 한규호의 얼굴도 한몫했으리라.

“감사합니다.”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음식을 받아 들었다. 종이봉투 너머로도 따뜻한 번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렇게 포장된 햄버거를 들고 시장통 같은 백화점을 빠져나온 한규호는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걸이로 오피스텔을 향해 걸어갔다.

10분 만에 오피스텔에 도착한 한규호를 맞이한 것은 불 꺼진 거실이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오피스텔은 조용했다.

한규호는 신발을 확인해 보았다. 트레이시가 신고 다니는 스니커즈와 샌들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한규호는 문간에 서서 감각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각자의 방에 주인이 있음을 확인했다.

화났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고 온 햄버거를 식탁에 놓은 다음 거실 불을 켜고, 트레이시의 방문을 노크했다.

반응이 없었다. 분명 안에 사람이 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한규호가 다시 문을 노크하려던 찰나,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죠?”

화났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문을 열었다.

거실처럼 불 꺼진 어두운 방에 트레이시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저녁 먹자고.”

한규호가 말했다.

“생각 없어요.”

트레이시가 한규호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한규호는 고민했다.

그래. 알았어. 그렇게 말하고 문을 닫을지, 아니면, 이 햄버거를 사려고 얼마나 기다렸는지를 말할지를 고민했다.

“할 말이 있어.”

한규호가 선택한 문장은 이것이었다.

트레이시의 고개가 움직였고, 그녀의 시선이 한규호를 향했다.

트레이시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한규호는 트레이시의 눈동자에 담긴 갈등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안 먹어도 되니까 잠깐만 시간을 내줘.”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알았어요. 금방 나갈게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고마워.”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닫았다.

이게 다 며칠 전에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그런 거야.

문을 닫으며 한규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식탁으로 다가가 조금 전 내려놓은 포장 봉투에서 햄버거 하나와 웨지 프라이, 그리고 콜라 하나를 꺼내고, 카멜리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카멜리아가 허락도 없이 문을 연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들어오라고 안 했는데요.”

카멜리아가 말했다.

“햄버거.”

한규호가 손에 든 햄버거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카멜리아의 시선이 한규호의 손에 들린 음식으로 향했다.

“소고기와 구운 양파. 치즈는 빼 달라고 했어.”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카멜리아의 시선이 다시 한규호를 향했다.

유대인들에게 치즈버거는 금지된 음식이었다. 육류와 유제품은 동시에 섭취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출애굽기에 쓰여있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도 안 된다’는 구절 때문이었다.

배려한 것일까?

한규호가 손에 들고 있던 햄버거를 조금 더 들어 올렸다.

카멜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규호의 손에서 햄버거를 받아 들었다.

“고맙기는. 천만에.”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방문을 닫았다.

방문을 닫은 한규호가 고개를 돌리자 트레이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났군.

한규호는 트레이시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할 이야기가 뭐죠?”

트레이시가 한규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 방에서 이야기할까?”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식탁에 놓인 햄버거 봉투를 집어 들었다.

***

트레이시는 손에 든 햄버거를 한입 물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빵, 두툼한 소고기 패티, 마카로니와 치즈, 그리고 후추의 맛이 그녀의 입안에서 버무려졌다.

트레이시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한 입만 먹으라고, 힘들게 사 왔으니 한 입만 먹으라고 계속 권유한 한규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는 시늉만 하려고 했는데, 맛이 괜찮았다. 아니, 맛있었다.

점심을 안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복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고려해도, 한규호가 사 온 햄버거는 한국에 들어와서 먹은 음식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맛이 나쁘지 않았다.

“입에 맞나 보네.”

그런 트레이시를 보며 한규호가 말했다.

한규호의 말에 트레이시의 커진 눈이 다시 작아졌다.

온종일 화가 나 있었다. 그런 화가 고작 이런 햄버거 하나 때문에 사그라지는 것이 부끄럽고 화가 났다.

한규호, 이 남자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찔러 왔다는 것에도 화가 났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야.”

그렇게 말한 한규호도 햄버거를 입으로 가져갔다.

“……뭐가 말이죠?”

트레이시가 다시 화난 표정을 지으며 한규호에게 물었다.

“나는 진짜로 당신과 점심을 같이 먹을 생각이었지. 일부러 당신을 도발하려고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야. 미안하다고 생각해.”

한규호가 햄버거를 우물우물하며 말했다.

미국의 엄마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Do not talk with your mouth full(입에 음식을 넣은 채로 말하지 마).’였다.

한규호의 모습은 실례였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입안에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하는 한규호의 모습이 어쩐지 싫지 않았다.

트레이시는 굳은 표정으로, 아니, 굳은 표정을 흉내 낸 얼굴로 다시 햄버거를 입에 가져갔다. 맥앤치즈 특유의 식감과 맛이 다시 그녀의 입안에 머물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손에 든 햄버거를 먹었다.

“할 말이라는 게 뭐죠?”

한규호보다 늦게 햄버거를 다 먹은 트레이시가 티슈로 입가를 정리하고 물었다.

“다비드 바이츠만. 이 이름을 들어 봤어?”

한규호가 물었다.

트레이시의 고개가 작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정확한 직책은 기억나지 않지만, 신 베트의 고위직 간부라는 것은 기억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그 높은 분께서 직접 한국으로 오고 계시다는군. 신 베트의 작전팀은 이미 들어와 있고.”

한규호가 말했다.

트레이시는 고개를 돌려 카멜리아의 방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한규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확실한 정보인가요?”

그렇게 물은 트레이시는 바로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막 자신의 실수를 정정하려던 트레이시에게 다시 한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

한규호가 말했다. 그의 말에는 섭섭함이나 분노 같은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트레이시는 그 정보를 누구에게 들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 냈다.

이미 한 번 실수를 했다. 첩보 업계의 불문율을 어기는 두 번째 실수를 그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랭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트레이시 자신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길한 느낌의 형태로 그녀의 척추를 타고 흘렀다.

“밀러 국장은 자리에서 밀려났다는군.”

한규호가 말했다.

트레이시의 눈이 커졌다. 태연함을 가장하기에 너무 큰 이야기였다.

“국장 자리는 유지하고 있지만, 권한은 빼앗겼다는 소문이 돈다고 하더군. 다음 국장 자리를 누가 차지할지 사람들이 베팅하고 있고, 수석작전요원이 가장 배당률이 낮다고 하더군.”

한규호의 말에, 트레이시는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CIA 수석작전요원 앤드류 로이즈.

“정리하자면 신 베트 작전팀은 진즉에 한국에 들어와 있고, 신 베트 고위간부는 한국으로 날아오고 있고, 밀러 국장은 목이 간당간당한 상태라고 하더군. 당신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한규호는 바티칸에서 온 남자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트레이시에게 전해주었다.

트레이시는 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마도…… 괜찮을 거예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리 뒤를 생각하지 않는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미국은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카멜리아의 방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분노가 들어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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