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30)
판교역과 연결되어 있는 초대형 백화점은 그룹 내 매출 1위라는 위상을 증명하듯 평일 저녁임에도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백화점 식품관을 찾은 판교 주민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가를 찾은 판교 테크노벨리 직장인들, 그리고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찾아온 젊은 커플들이 백화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특히 지하 1층 푸드코트는 더욱 복잡했다. 쇼핑객과 저녁을 먹으려는 사람이 뒤섞여 그야말로 시장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아수라장의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최근 방송에 맛집으로 소개된 수제 햄버거집에는 빈자리는커녕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렇게 식당 안을 가득 메운 사람 중 한규호가 있었다.
한 손에 영수증을 들고 있는 한규호는 똥 씹은 표정으로 식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못된 결정이었어.
한규호는 식당 내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바티칸에서 온 남자와의 대화를 끝내고, 택시를 타고 판교의 오피스텔로 돌아가던 중, 트레이시에게 무언가를 사다 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첫 번째 잘못이었다. 사다 줄 무언가로 음식을 결정한 것이 두 번째 잘못이었고, 음식을 살 장소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판교 백화점을 선택한 것이 세 번째 잘못이었다.
그냥 바로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건데.
한규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트레이시는 화가 났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한규호 자신이 트레이시를 바람맞힌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화가 났다고 해서 한규호가 그녀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철저하게 업무적으로 엮여 있는 관계였으니까. 한규호는 트레이시를 이용해 CIA의 도움을 받았고, 트레이시도 한규호를 통해서 CIA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높였다. 개인적으로 감정적 교류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 한규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무언가 찜찜한 부분이 있었다.
한규호는 며칠 전 그녀에게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니까.
쓸데없는 말을 했어.
한규호가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규호는 고개를 돌려 다시 카운터를 바라보았다.
종업원들은 몰려드는 손님을 처리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런 종업원들 앞에는 기다림에 지쳐 조금씩 얼굴이 굳어 가는 손님들이 있었다.
마치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러시아의 맥도날드가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그냥 육개장이나 포장해 가는 건데.
또 다른 한규호의 후회였다.
맵다고, 입에 안 맞는다고 말하면서 안 먹으면 한규호 혼자서 먹으면 될 일이었다. 괜히 신경 쓴다고, 수제 햄버거를 선택한 것이 또 다른 바보 같은 결정이었다.
주문에만 10분 넘게 걸렸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최소 20분, 포장임에도 그 정도의 시간은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만뒀어야 했는데.
한규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바꿀 수 없는 과거에 심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결정한 한규호는 몇 시간 전 대화를 다시 기억 속에서 꺼냈다.
가톨릭대학교의 오래된 연구실에서 나누었던 대화였다.
***
“테스티모니움이 뭐지?”
한규호가 물었다.
“연상되는 단어가 있으십니까?”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Testify.”
한규호의 대답이었다.
‘Testify’, 법정과 같은 장소에서 증언을 하다. 어떠한 사실 증명하다, 또는 신앙을 간증한다는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였다.
“테스티모니움. 철자로는 Testimonium을 씁니다. 증명, 증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라틴어입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한규호는 갈증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갈증이었다. 다시 말하면 오랜만에 긴장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선을 지우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을 지우는 것을 넘어, 지근거리까지 다가오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님에 대한 증명, 기적의 증거. 그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기적?”
한규호가 물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파티마의 성모를 떠올립니다. 제일 유명한 사건이니까요. 성직에 몸담은 몸으로써 파티마의 기적의 진위 여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군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시대에 누군가가 성모님을 만났다고, 예언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해도 아무도 그 말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피눈물을 흘리는 성모상이나 성흔(聖痕 : stigmata)에 대한 보고는 일반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올라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나하나 찾아다니고 확인하기 위해서는 바티칸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달려들어도 처리할 수 없을 겁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기적의 증거가 뭐지?”
한규호가 물었다.
베드로 신부는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겠느냐는 듯한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한규호는 그런 베드로 신부의 눈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오늘 이 남자와 적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 일명 레오나르도 다 빈치. 화가, 시인, 의사, 해부학자, 천문학자, 역사가, 도시계획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그리고 요리에도 재능을 가졌던 천재. 그가 혼외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고 베드로 신부의 눈을 바라보았다.
“토스카나 빈치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는 아버지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그저 빈농인 어머니의 손에 크는 그저 그런 보통의 어린아이였을 뿐이었죠. 그런 레오나르도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도시에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던 안토니오 피에로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 것이죠. 아버지에게 거둬지고, 숙부에게 교육을 받고, 열네 살에 델 베로키어 공방에서 그림을 배웠고, 서른 살부터 밀라노 공 루드비코 스로프차의 후원을 받아 유럽 제일의 화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때 나온 명작이 최후의 만찬입니다. 이것이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삶입니다.”
베드로 신부는 자신을 바라보는 한규호의 눈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숨겨진 진실이 있습니다. 바티칸 도서관 비밀 문서고에 봉인되어 있는 문서. 교황 성하와 허가된 몇 사람들밖에 볼 수 없는 문서에 재미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어린 레오나르도가 처음 아버지를 만난 그날, 그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앞으로 고기를 먹지 말아라. 그리하면 진리를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를 말이죠.”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텀을 주었다. 한규호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
한규호의 눈은 여전히 침착했다. 그 눈에서 어떠한 동요도 읽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의 일화 중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한 손으로 그림을 그리며, 동시에 다른 손으로 글을 썼다는 일화 말입니다. 그 글도 좌우를 반전시켜 쓰는 거울형 글쓰기를 아주 빠른 속필로 썼다는 일화. 들어 보셨습니까? 당시의 기록이 얼마나 신빙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둘째 치고, 기록이 진짜라고 가정한다면 레오나르도는 아버지와의 만남을 계기로 일반인을 뛰어넘는 뇌 기능이 발현됐고, 육류를 섭취하지 않음으로써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당신이 이야기한 테스티모니움이라는 이야긴가?”
“모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19년에 죽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고인이 된 지 500년이 지난 전설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누군가를 우리는 테스티모니움이라고 부릅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기적’이죠.”
한규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한규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능력을 기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만약 한규호가 가진 능력의 발현 조건을 신이 설계했다면, 그 신은 악신(惡神)임이 분명했다.
“외눈의 저격수가 눈을 잃고서 저격 능력을 얻었다는 이야긴가?”
한규호가 물었다.
“모릅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지 않았으니까요. 그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어서 그를 만나려 했고, 그래서 미얀마에 가게 된 것입니다. 제가 미얀마에 가게 된 이유가 설명되었는지요.”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그 저격수가 당신이 말하는 테스티모니움이 맞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해부라도 할 생각인가?”
한규호가 물었다.
“방금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성직자에게 해부라니.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이단 심문관들은 부유한 과부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마녀라는 낙인을 찍고, 고문하고, 불태웠지.”
한규호가 말했다.
“중세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거짓된 역사라고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의 가톨릭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 신부는 마치 준비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해부가 아니라면 무엇을 할 생각이지?”
“아무것도.”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아무것도?”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증거를 찾고 확인할 뿐입니다. 뭐, 사람을 저격해 생계를 이어 가는 저격수에게 다른 살길을 마련해 주는 일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그가 테스티모니움이라서가 아니라, 길 잃은 주님의 어린양이니까요. 하지만 테스티모니움을 이용해 무언가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 무언가를 했겠지요. 바티칸 갓 탤런트 같은 프로그램을 방영한다든가 말이죠.”
“그자에게 새로운 직업을 주선해 주었나?”
한규호가 물었다.
외눈의 저격수가 이미 고혼이 되었다는 사실을 한규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직접 그 남자의 목숨을 거두었으니까.
하지만 짐짓 모른 채 질문을 던졌다.
혹시라도 눈앞에 이 남자가 자신과 원 아이드 잭이라는 남자가 연관되어 있음을 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나지 못했습니다. 죽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 신부가 약간 허탈하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눈에 다른 징후, 예를 들어 한규호를 떠본다든가 하는 징후는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한규호는 그런 베드로 신부를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당신이 해 준 이야기는 비밀이겠지.”
“그렇습니다. 아주 높은 등급의 비밀이죠.”
“왜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거지?”
“부담스러우십니까?”
베드로 신부가 물었다.
한규호는 눈빛으로 대답을 요구했다. 그가 대답하지 않으면 물리력을 사용할 의사도 있었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만으로 형제님을 납득시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날 납득시키려 한 거지?”
“형제님이 오해하시면 안 되니까요.”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내가 무엇을 오해하지?”
한규호가 말했다.
“식양에 관해서 말입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