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28)
반년 전, 사라 아이젠하우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입국한 여자.
실제로는 다니엘라 노이도르프(Daniela Neudorf)라는 이름과 에우로파 프룩스 극종종자연구소 소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여자. 얀 베르그만의 지시에 따라 서용석을 한국으로 데리고 오고, 보살피고 있는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여자는 막 서용석의 숙소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텅 비어 있는 방을 확인하고, 다시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서용석은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다. 멧돼지의 날카로운 어금니에 허벅지를 찔렸다.
허벅지는 두부나 흉부만큼 위험한 부위였다.
허벅지 안쪽에 위치한 동맥은 하체순환계의 핵심이었다. 크고 두꺼운 허벅지 동맥이 끊어지면 십중팔구는, 아니 백에 구십구는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었다.
서용석이 입은 부상은 그 정도로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몸을 피해 냈고, 동맥은 지켜 냈다.
하지만 멧돼지의 공격으로 좌측 허벅지 바깥쪽 근육, 외측광근(Vastus lateralis)과 대퇴직근(Rectus femoris) 일부가 찢어졌다.
가벼운 부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살점이 한 뭉텅이나 뜯겨 나갔고, 출혈도 적지 않았다.
단순히 외상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세균 감염의 위험성이 있었다.
아주 얕은 상처에서 시작된 세균 감염으로 사망하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았고, 야생 멧돼지의 어금니는 세균 덩어리라고 해도 무방했다. 제대로 된 치료 시설을 갖춘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서용석은 병원에 갈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용석에게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여자가 있었고, 이 연구소가 있었으니까.
복도를 걸어가는 여자,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을 졸업한 다니엘라 노이도르프는 유럽 전역에서 인정받는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주인인 얀 베르그만으로부터 서용석을 케어하라는 지시를 받기 전까지, 함부르크 의과대학 부설 병원에서 뇌혈관외과 전문의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에우로파 프룩스 극동종자연구소에는 간단한 외과적 수술 정도는 가능한 의료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멧돼지에게 입은 부상쯤은 그녀 혼자서 치료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문제없었다.
당사자인 서용석을 제외하고는.
여자는 의료실에서 3일 동안 서용석과 숙식을 함께하며 집중 치료를 시행했다. 3일이 지난 후, 서용석이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여자는 최소 2주는 무리한 신체적 활동을 하지 말라는 권고와 함께 허락했다. 지시를 내릴 수 있다면 지시로 내려졌을 강력한 권고였다.
하지만 서용석은 여자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비어 있는 그의 방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여자는 서용석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연구실 내에서 그가 갈 만한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그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체력단련실, 그곳밖에 없었다.
몇 개의 계단과 복도를 지나 목적지에 근접한 여자는 불 켜진 체력단련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바벨끼리 부딪히는 소리였다.
여자는 체력단련실로 다가가 창문을 통해서 체력단련실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체력단련실 안에 있는 두 사람을 확인했다.
허벅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서용석, 그리고 서용석의 운동을 도와주는 트레이너, 두 사람이었다.
서용석은 벤치프레스에 누워 두 팔로 봉을 잡고 있었다. 트레이너는 서용석의 머리맡에 서서, 혹시나 모를 사고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여자는 눈으로 봉 끝에 걸려 있는 바벨의 무게를 계산해 보았다.
25kg 원판이 두 개, 20kg 원판이 두 개, 한쪽에만 90kg의 무게가 걸려 있었다. 서용석이 잡고 있는 봉의 무게 20kg까지 더하면 총 200kg의 무게였다.
여자가 계산을 끝마친 그 순간, ‘흡’ 하는 소리와 함께, 서용석이 봉을 들어 올렸다.
200kg이 아무런 저항 없이 수직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여자는 마지막으로 잰 서용석의 몸무게를 기억해 냈다.
71.8kg의 몸무게를 가진 사람이 200kg의 무게를 들어 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소위 엘리트 레벨이라고 불리는 전문 역도 선수들은 자신의 몸무게의 3배를 들어 올리고는 했다.
하지만 서용석은 전문 역도 선수가 아니었다. 무거운 무게를 들어 올리는 데, 근육이 세팅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체중의 거의 3배에 가까운 200kg의 무게를 어려움 없이 들어 올린 것이다. 그것도 일주일 만에 제대로 된 운동을 하게 된 상황임에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한번 호흡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서용석이 200kg의 무게를 다시 한번 더 들어 올렸다.
여자는 문으로 다가갔다.
***
서용석은 다시 한번 봉을 잡은 손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셔 복압을 높인 다음, 숨을 멈추고, 흉근에서 손가락 끝까지 이어진 모든 근육에 힘을 주었다.
봉이 수직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일주일 만에 운동이었음에도 200kg을 들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서용석의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버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용석의 벤치프레스 최고 기록은 225kg이었다. 200kg이라는 무게는 버겁다는 느낌이 들면 안 되는 무게였다. 하지만 버겁게 느껴졌다. 210kg을 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일주일 동안 운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 신체 능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5킬로씩 더 올릴까.
그런 생각을 하는 서용석의 귀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용석은 고개를 돌려 새로 등장한 인물을 확인하지 않았다. 이 시설에 상주하는 사람은 다섯 명뿐이었고, 지금 이곳에 올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한 번만 더 들어 보자. 그리고 무게를 더 늘릴지 결정하자.
그렇게 마음먹은 서용석은 호흡을 정리하면서 다시 봉을 손으로 잡았다.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말씀드렸을 텐데요. 최소 2주, 무리한 행동은 금물이라고.”
여자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트레이너였다.
전 유럽 역도 선수권 대회에서 81kg급 은메달리스트인 러시아 출신 트레이너는 긴장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트레이너에게 눈빛을 보냈다. 나가라는 지시였다.
그 눈빛을 읽어 낸 트레이너는 지체 없이 체력단련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트레이너를 잃어버린 서용석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 얀 베르그만의 지시에 따라 자신을 ‘사육’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무감정한 얼굴로 서용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 같은 감정은 없었다. 마치 물건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서용석을 보고 있었다.
서용석은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봉을 잡았다.
“충분한 것 같은데, 이제 그만하시죠.”
여자가 말했다.
“상체 운동일 뿐이오.”
서용석이 말했다.
소위 3대 운동이라고 말하는 벤치프레스, 스쿼트, 데드리프트 중에서 벤치프레스가 다리를 다친 서용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었다.
“상체만을 위한 운동이라는 것은 없어요. 회복을 더욱 더디게 할 뿐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대표적인 가슴 운동인 벤치프레스라고 해도 하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하체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200kg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서용석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트레이너도 없는 상태로 다시 봉을 잡았다. 그리고 온몸에 힘을 주어 다시 봉을 밀어 올렸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일주일 동안의 치료 기간 중 서용석이 내린 결론이었다.
***
부상을 입기 전까지, 서용석의 신체 능력은 최고조였다. 20대 청년 시절, 전성기의 신체 능력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나 서용석은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찾는 상대는 가슴에 칼이 꽂혔는데도 살아 날뛰는 괴물이었다.
그래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매일 바벨을 들어 올렸고, 매일 밤 산길을 뛰어다녔다. 그렇게 신체 능력을 조금씩 끌어올렸다. 1g이라도 더 들 수 있도록, 0.1초라도 더 빨리 뛸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서용석은 답보 상태에 빠져 있었다. 더 이상 무게가 늘지도, 시간이 줄지도 않았다. 노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이보다 더 노력할 수 없었다. 이보다 더 노력하기 위해서는 하루가 24시간 이상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인간의 신체가 감당할 수 있는 부하의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시속 45km를 넘어설 수 없었다. 일부 과학 논문에서는 최대 시속 65km까지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이론에 불과했고, 설사 65km의 벽을 넘어섰다고 해도, 사람은 다른 야생동물처럼 80km, 100km의 속도를 낼 수는 없었다.
인간의 신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한계였다.
서용석은 노력하고 또 노력해 220kg의 바벨을 들어 올리고, 일반인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어둠을 전문 산악마라토너보다 빠른 속도로 뛸 수 있었지만, 코끼리가 들 수 있는 무게를 들거나, 치타처럼 빠르게 달릴 수는 없었다.
부상을 치료하는 일주일 동안, 서용석은 그 사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고, 인정하기로 했다.
더 이상의 신체 능력 증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금이 최고의 조건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부상 회복만을 기다리며 침대에 누워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 시간 동안 신체 능력은 계속 저하될 것이 뻔하니까.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반면에 그렇게 끌어올린 능력이 사라지는 데에는 그 백 분의 1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서용석은 경험이 있었다. 칼에 등허리를 찔렸고, 오랜 기간 동안 침대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점점 얇아져 가는 근육을 하루하루 느끼면서 조바심 속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단순히 부상 때문에 느끼는 조바심만은 아니었다.
그는 늙어 가고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신체 능력이 저하되어 간다는 의미였다.
“의사 양반.”
봉을 내려놓은 서용석이 말했다.
여자는 말없이 서용석을 바라보았다.
“박종연이 아직 평택에 있소?”
서용석이 물었다.
***
여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박종연. 대북작전팀인 진도팀의 일원, 북한에서 살아온 두 사람 중 한 명.
한국에 온 서용석은 북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 했고, 여자는, 정확히 말하면 얀 베르그만은 두 사람 중 한 명, 의족을 착용하고 있는 남자, 박종연이 평택항 인근 석재 CFS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게 6년 전이었다.
하지만 서용석은 박종연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저 몸을 단련할 뿐이었다.
여자는 서용석이 왜 박종연을 찾아가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
서용석이 원하는 것은 한규호였지, 박종연이 아니었다. 일부러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박종연에 관해 물었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여자는 불안함을 최대한 감춘 채 서용석을 바라보았다.
서용석은 주인의 물건이었다. 주인의 물건을 소중히 관리하는 것이 여자에게 내려진 임무였다.
일주일 전에 물건에 상처가 났다. 그것만으로도 잘못이었는데, 물건이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려 하고 있었다.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시 서용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에다 물어보시오. 내가 박종연을 찾아가도 되는지.”
서용석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봉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