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27)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트레이시는 자연스럽게 화장대에 앉았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트레이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자신의 머리카락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푸석푸석한 느낌이 들었다.
트레이시는 손가락을 들어 머리카락을 매만져 보았다. 확실히 푸석푸석했다. 윤기도 부족했고, 머리카락 끝도 갈라졌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한국에 들어온 이후 제대로 된 관리를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한규호가 오고 난 이후는 조금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카멜리아와 단둘이 살고 있을 때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트리트먼트는 둘째 치고, 손상된 머리끝이라도 잘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카멜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어떤 머리를 하고 있었지?
버지니아 체스터필드의 안전가옥에서 만났던 그 여자,
그 여자가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현재 저에게 있어서 저 자신보다 소중한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에 대한 정보를 넘겨서, 그를 팔아서 제 삶을 유지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말하던 그녀의 얼굴만이 기억날 뿐이었다.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가득 품고 있는 얼굴이었다.
트레이시의 표정이 굳어졌다. 잔뜩 올라갔던 기분이 급속도로 내려앉았다.
“쓸데없는…… 생각.”
트레이시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 여자를 떠올린 것이 쓸데없는 생각인지, 아니면 한규호와 외출을 나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꾸미고 싶다는 생각이 쓸데없는 생각인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트레이시는 그렇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고는 선크림을 집어 들었다.
화장이 아니야. 피부 때문에 바르는 거지.
속으로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막 선크림을 짜내려던 그때, 트레이시에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한규호가 서 있었다.
한규호의 얼굴을 본 트레이시는 놀랐다. 너무 빨랐다. 이제 막 선크림을 바르려고 했는데.
벌써요? 아직 화장도 다 못 했어요.
하마터면 그런 말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한규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를 더 놀라게 했다.
“잠시 나갔다 와야겠어.”
트레이시는 순간적으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갔다 온다고? 어딜? 얼마나?
“저녁쯤에는 돌아올 거야. 못 들어오게 되면 전화 줄게.”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트레이시는 한 손에 선크림을 든 채로, 한규호가 사라져 버린 현관문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판교 오피스텔에서 나온 한규호는 택시를 타고 역곡에 있는 가톨릭대학교로 가 달라고 말했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한규호는 조금 전 걸려 온 전화 통화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흔적을 찾았습니다.
바티칸 출신의 정체불명의 남자. 그가 말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 나누도록 할까 하는데, 어떠하신지요.
한규호의 답은 하나였다.
바로 출발하겠다. 어디로 갈지를 말해 달라.
역곡에 위치한 가톨릭대학교로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곧바로 트레이시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이야기했고, 오피스텔을 나왔다.
한규호의 생각이 트레이시의 얼굴을 떠올렸다.
몇 분 전, 그녀의 방문 앞에서 보았던 마지막 얼굴에는 놀라움, 당황함, 황당함, 그런 감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끝까지 지켜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던 놀라움, 당황함, 황당함 같은 감정들은 지금쯤 분노라는 감정으로 융합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분명히 화가 났을 것이다. 나가서 점심을 먹자고 권유한 것이 한규호 자신이었고, 그 약속을 깨 버린 사람도 한규호 자신이었으니까.
한규호도 알고는 있었다. 트레이시가 ‘호감’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누구보다 날카로운 감각을 지니고 있는 한규호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마음을 이용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트레이시가 싫지는 않았다.
미국과 CIA는 짜증 났지만, 트레이시는 마치 자주 들은 음악처럼, 익숙했고, 편했다.
만약, 다른 전화였다면, 이런 식으로 그녀를 바람맞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뒤로 미루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밀러 국장의 통화 요청을 거부하고 트레이시의 병실을 찾았던 것처럼, 뒤로 미뤄 두고 트레이시와 점심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용석에 대한 사안이었다. 홍콩에서 전화를 받자마자 완을 뒤로하고 서울로 가는 첫 비행기를 탄 한규호였다. 트레이시라고 해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두고 온 트레이시가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지금 트레이시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미쳐 가는군.
한규호는 자신을 그렇게 평가했다.
백금산의 그날 이후로, 한규호는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보고 살아왔다. 마치, 정면으로 시야를 제한당한 경주마처럼, 눈앞의 목표만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독립요원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국정원과 일을 하면서 점점 활동 범위를 확대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덕분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서용석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랬는데, 요즘 들어 자꾸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풍경을 보고,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를 맡았다. 달리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싫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완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안했다. 그렇게 그녀를 두고 온 것에 미안함을 느꼈다. 약속한 2주를 채우지도 못하고, 그렇게 돌아온 것이 마음 쓰였다.
그런 미안함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홍콩을 다녀온 이후, 그녀를 떠올리는 빈도가 높아졌다.
진짜 미쳐 가는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려는 완을 지우기 위해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
한규호의 최종 목적지는 비르투스관이라고 불리는 오래된 건물 안에 있었다.
1979년에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이 기부했다는 명패가 붙어 있는 이 건물은 새로 지어진 다른 건물들에 비하면 초라하고 서글픈 느낌을 주었다.
그 건물 2층 복도 끝,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연구실에 다가간 한규호는 문 앞에 붙어 있는 명패를 보았다. 명패에는 ‘파비오 콘티’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한규호는 문을 노크했다. 그러자 들어오라는 대답 대신 문이 열렸다.
“반갑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한규호는 남자의 분위기가 또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콕에서 보았을 때는 강사, 여대생들에게 인기 있을 법한 젊은 강사의 느낌을 주었다. 신도림 쉐라톤 호텔에서 만났을 때는 비즈니스맨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속세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중년 학자의 모습이 느껴졌다.
“누추한 곳이라 부끄럽습니다. 교환 교수에게 배정하는 임시 연구실이라 어쩔 수가 없네요.”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말하며 연구실 한쪽에 놓여 있던 모카포트를 집어 들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한규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베드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베드로 신부는 보일러에 물을 담고, 바스켓에 원두를 담은 다음 보일러와 바스켓을 결합했다. 그리고는 삼발이가 장착된 휴대용 버너에 모카포트를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에스프레소, 괜찮으십니까?”
베드로 신부가 다시 물었다.
“상관없습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물이 끓어오르고, 커피가 추출되면서 모카포트로 추출한 에스프레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향기가 연구실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베드로 신부는 불을 끄고, 잠시 기다린 후, 추출된 에스프레소 두 잔을 따라 한 잔을 한규호 앞에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연구실 안에는 커피 향기와 침묵만이 가득했다.
“여자를 찾았습니다.”
침묵을 깬 것은 베드로 신부였다.
베드로 신부는 사진 한 장을 한규호에게 건네주었다.
공항 CCTV 화면 캡처 사진이었다. 마른 몸매를 가진 백인 여자였다.
“8년 전, 서용석이 위조 여권으로 한국에 들어온 그날, 같은 비행기로 입국했습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한규호는 고개를 들어 베드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서용석이라는 사람은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뒤를 봐주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뒤를 봐주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서용석이라는 자가 이동한 경로에 모든 CCTV를 확인했고, 공통적으로 사진 속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누구입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아직 모릅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한규호는 아무런 반응 없이 베드로 신부의 눈을 바라보았다.
“CIA라면 얼굴 대조 프로그램을 통해서 금방 찾아낼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그 정도의 능력은 없습니다. 시간이 필요하지요.”
베드로 신부가 쑥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티칸이 가지고 있는 휴민트가 CIA의 컴퓨터보다 떨어진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한규호가 말했다.
베드로 신부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그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사람들은 과장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지요.”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어차피 말해 줄 생각이었다. 가톨릭대학교로 부른 이유도, 파비오 콘티라는 이름을 노출한 이유도 바티칸이라는 이야기를 해 줌으로써 한규호와의 거리를 좁혀 볼 의도였다.
그런 베드로 생각을 마치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한규호가 먼저 바티칸이라는 단어를 꺼낸 것이다.
식양이 이야기해 주었을까?
베드로 신부는 한규호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식양이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면, 식양이 이 남자에게 그 정도의 정보를 주었다는 것은, 한규호라는 이 남자, 식양, CIA, 이스라엘, 한국 국정원과 얽혀 있는 이 남자가 베드로 신부가 생각한 것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베드로 신부에게 한규호가 물었다.
“얼마나 걸립니까?”
“확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흔적을 찾았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베드로 신부는 그렇게 말하며 사진 한 장을 더 꺼내어 한규호에게 건네주었다.
첫 번째 사진과 같은 공항 CCTV 사진이었고, 같은 여자가 찍혀 있었다.
“6개월 전 사진입니다, 독일 국적의 사라 아이젠하우어(Sara Eisenhauer)라는 이름으로 입국했고, 그 이름이 한국에 입국한 것은 기록상으로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
8년 전 서용석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여자가 6개월 전 다른 위장 신분으로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저 여자가 서용석을 한국에 데려왔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한국을 드나들고 있다면, 서용석을 관리하고 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서용석이라는 남자가 아직 한국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 신부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