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24)
오전 10시 20분,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을 이륙한 델타항공 83편은 대서양 항로를 따라 목적지인 애틀랜타 하츠필드-잭슨 공항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륙 직후 첫 번째 식사 서비스가 끝난 비행기 안은 조용했다.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던 승객들은 첫 번째 식사가 끝나자 다들 잠에 빠져들었다.
이코노미 클래스 23C 좌석에 앉아 있는 장년 남자도 다른 승객들과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쟝 갈라브뤼(Jean Galabru), 1958년 프랑스 남부의 옛 랑그도크루시용 레지옹에서 출생, 몽펠리에 대학(Université Montpellier)을 졸업하고, 대서양을 건너 도미(渡美), 현재는 애틀랜타에서 옥시타니 레지옹 특산 아르마냑 브랜디 수입 업체를 운영하는 프랑스계 미국인.
그게 23C 좌석에 앉아 있는 남자의 위장 신분이었다.
다비드 바이츠만,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 베트 대외협력국 국장. 그것이 23C 좌석에 앉아 있는 장년 남자의 진짜 정체였다.
신 베트의 대외협력국이라는 자리는 절대로 낮은 직위가 아니었다. 신 베트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자리이고, 행정부처 직제로 치면, 차관급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그런 그가 이코노미석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위장 여권을 들고, 혼자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정은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었으니까.
바이츠만 국장이 CIA 수석작전요원 앤드류 로이즈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약 30시간 전이었다.
바이츠만 국장은 앤드류 로이즈에게서 전화가 올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이 에후드 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앤드류 로이즈가 이번 일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총리는 바이츠만 국장을 관저로 불러 그 소식을 알려 주었다.
신 베트가 예상하고 있던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총리가 움직였고, 외무부 장관이 움직였고, 애이팩이 움직였음에도 밀러 국장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대통령은 밀러를 대신해서 새로운 담당자를 임명한다는 시나리오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 시간문제군.
총리는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바이츠만 국장도 총리의 생각에 일부 동의했다. 선거를 앞두고 있는 마음 급한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움직였다면 서울에서의 일이 곧 진척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담당자인 앤드류 로이즈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앤드류 로이즈입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둘이서만. 위치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앤드류 로이즈의 말이었다. 요청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명령이었다.
CIA는 신 베트의 상급 기관이 아니었고, 앤드류 로이즈는 바이츠만의 상사가 아니었다. 바이츠만은 앤드류 로이즈의 요청, 관례는 물론, 예의에도 어긋난 요청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바이츠만은 그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위장 신분을 준비하고, 파리를 거쳐 대서양을 넘고 있었다.
***
바이츠만 국장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중세 봉건제도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중세 봉건제도 아래에서 국왕과 봉건영주는 계약을 맺는다.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봉건영주는 충성에 대한 증거로 세금을 납부하고, 전쟁과 같은 위급 상황에서 군사력을 제공했다. 이것이 봉건영주의 의무였다.
그러나 이 상황을 두고 국왕이 영주를 ‘지배’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국왕에게도 의무가 있었다. 봉건영주가 위급할 때, 군사력을 동원함으로써 보호를 제공하는 의무, 그리고 봉건영주가 영지를 지배하는 데, 절대로 개입하지 않는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중세 봉건사회에서 국왕과 봉건영주의 관계를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닌 ‘쌍무적 계약관계’라고 불렀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중세 시대의 쌍무적 계약관계와 비슷했다.
2000년 만에 돌아온 약속의 땅은 목숨을 노리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7천 마일 떨어져 있는 우방, 미국은 이스라엘에 외교적·군사적 보호를 제공했다. 독립국 이스라엘은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충성을 맹세하고 세금을 납부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양국 관계는 정보기관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신 베트와 모사드, 그리고 아만(AMan : 이스라엘 군사정보부)은 CIA의 지시를 받지 않았지만, 영향은 받았다.
모든 작전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었지만, 해외에서 작전을 진행할 때, CIA와 협의를 진행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단순하게 말하면 일종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CIA를 중심으로 구축된 정보 세계에서 CIA 국장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한 기관의 수장이 아니었다. 정보 세계의 정점에 서 있는 왕좌(王座)였다.
앤드류 로이즈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차기 CIA 국장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구두 약속은 아닐지 몰라도, 간접적 언질은 있었을 것이다.
왕좌에 앉을 가능성이 높은 앤드류 로이즈가 바이츠만 국장을 호출했다. 거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바이츠만 국장은 단순히 그런 관계 속에서 형성된 실체 없는 권력에 의해 끌려가는 것은 아니었다. 바이츠만 국장은 앤드류 로이즈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 그를 만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비행기를 탄 것이다.
바이츠만 국장의 머릿속에 새로운 단어가 떠올랐다.
‘서열 정리.’
만약 앤드류 로이즈가 차기 국장이라는 꿈을 꾸고 있다면, 그래서 자신이 쓸 왕관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미리 사용해 보려는 의도로 바이츠만을 호출할 가능성이 있었다.
적어도 몇 년 이내에 신 베트를 이끌어 갈 바이츠만을 불러, 자신이 왕이 될 사람임을 일깨워 주고 충성 맹세를 받아 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바이츠만이 생각한 것처럼, 그가 국장이라는 자리에 취해 권력을 휘두르려 하는 것이라면 바이츠만 국장에게 있어서, 신 베트와 이스라엘에 있어서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신하라면 명군(名君)을 원하겠지만, 봉건영주에게는 암군(暗君)이 더 좋았다.
***
살인자의 수도(The Murder Capital of the United States)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미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볼티모어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은 볼티모어라는 이름에서 미식축구팀인 레이븐스, 야구팀인 오리올스를 떠올린 다음에는 범죄, 살인, 마약, 빈민가를 떠올렸다.
그렇게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볼티모어라고 해도 광역권에 300만 명 가까운 인구를 가진 대도시가 전부 빈민가일 수는 없었다.
도심 업무 중심 지역을 중심으로 높은 임대료를 자랑하는 고층 빌딩들이 입지해 있었고, 라이트 스트리트 100번지에 있는 40층 높이의 트랜스아메리카 타워도 그중 하나였다.
2009년까지 미국 부동산 개발 업체인 레그메이슨사(社)의 본사였던 이 빌딩은 레그메이슨이 볼티모어 하버 이스트에 새로 지은 레그메이슨 타워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USF&G에 의해 인수되었고 트랜스 아메리카 타워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세계 3대 인터넷 보안 업체 중 하나로 불리는 스쿠텀(Scutum) 시큐리티의 본사가 트랜스아메리카 타워에 있었고, 스쿠텀 시큐리티의 사장인 라이언 대길 김의 집무실이 이 건물 24층에 있었다.
집무실 자신의 의자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라이언 대길 김이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노트북 알람 소리를 들은 시간은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서류를 내려놓은 라이언 대길 김은 노트북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고 가볍게 키보드를 두르려 손님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미국 국토안보국은 국제선 항공편을 통해 입국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실시간 감시를 진행하고 있었다. ‘United States Visitor and Immigrant Status Indicator Technology Program’, 줄여서 VISIT 프로그램이라고 부르는 이 시스템을 통해서 입국자에 대한 실시간 신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라이언 대길 김은 VISIT 시스템의 보안 파트를 설계한 담당자였고, 그는 VISIT 시스템을 10만 페타플롭스의 성능을 가진 스쿠텀 시큐리티 슈퍼컴퓨터 위성 시스템에 연결해 놓았다. 그가 원하는 정보를 언제든 얻을 수 있는 백도어를 하나 심어 놓은 것이다.
스쿠텀 시큐리티의 슈퍼컴퓨터가 애틀랜타 하츠필드 공항에서 누군가를 발견했고, 라이언 대길 김에게 알려 온 것이다.
라이언 대길 김은 화면에 정보를 읽어 내려갔다.
백인 장년 남자의 사진, 쟝 갈라브뤼(Jean Galabru)라는 이름, 파리에서 출발한 델타항공 83편, 이코노미 클래스 23C 좌석.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에서 걸러 냈으니, 중요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라이언 대길 김은 국토안보부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쟝 갈라브뤼라는 이름의 정보를 찾아보았다.
프랑스 출신, 와인 수입업자. 특별할 것이 없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시스템에서 오류가 발생했거나, 아니면 위조 신분을 사용했거나.
라이언 대길 김이 직접 설계한 시스템이었다. 오류가 있을 수는 없었다. 위조 신분일 가능성이 컸다.
쟝 갈라브뤼라는 이름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면, 얼굴로 신원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로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렸다. 2000년대처럼 며칠씩 걸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국토안보부나 정보공동체 내에 등록되어 있는 얼굴 데이터베이스를 전부 확인하려면 적어도 6시간은 필요했다.
“귀찮게 되었네. 뭐.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이가 좀 있다. 이거지.”
라이언 대길 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장년 남성이었다. 첩보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이든, 적색수배에 올라가 있는 범죄자든 6시간을 꼬박 채우지는 않기를 기대하면서, 손가락을 움직여, 데이터베이스 대조 작업을 진행했다.
프로그램을 작동시킨 라이언 대길 김이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막 서류를 다시 읽어 가려는 그의 귀에 알림음이 들려왔다.
채 30초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첩보원이든, 범죄자든 아주 거물이라는 이야기였다.
라이언 대길 김은 서류를 손에 든 채로, 노트북에 화면에 시선을 주었다. 스쿠텀 시큐리티의 슈퍼컴퓨터가 찾아낸 결과가 화면 위에 떠 있었다.
“거물……도 그냥 거물이 아니셨네.”
라이언 대길 김은 화면에 떠 있는 남자의 이름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
밀러 국장은 전화기를 얼굴에 대고 있었다.
전화기를 통해서 밀러 국장만을 위해 활동하는 독립요원 라이언 대길 김이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 베트 대외협력국의 다비드 바이츠만 국장이 쟝 갈라브뤼(Jean Galabru)라는 위장 신분으로 미국에 입국했다는 내용을 전해 주었다.
라이언 대길 김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오후 1시 43분 델타항공 83편을 통해 애틀랜타 하츠필드 잭슨 공항으로 들어왔습니다. 입국 심사에 한 시간가량이 걸렸고, 4시에 캔자스시티로 가는 델타 1277편에 탑승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캔자스시티라는 말에 밀러 국장의 표정이 변했다. 일반인들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미미한 변화였지만, 변화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계속 실시간 감시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라이언 대길 김이 물었다.
“아니. 일단 대기.”
밀러 국장은 그렇게 말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카멜리아를 돌려받고 싶어 하는 다비드 바이츠만이 캔자스시티로 갔다면,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뻔했다.
미주리주 녹스빌, CIA 수석작전요원 앤드류 로이즈의 본가가 있는 그곳이 바이츠만의 최종 목적지였다.
밀러 국장은 통화가 끝난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바이츠만을 불러들였군.”
“바이츠만? 신 베트의 바이츠만? 앤디가 그를 불렀다는 이야긴가요?”
밀러 국장 맞은편에 앉아 있는 중년 여성이 물었다.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경영감사 부사장직을 맡고 있는 신시아 챔버였다.
“연락을 주고받을 줄은 알았지만, 미국으로 불러들이기까지 할 것이라고는 예상 못 했네요. 무슨 의도일까요?”
신시아 챔버가 물었다.
밀러 국장은 신시아 챔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신시아 챔버도 밀러 국장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냥 풀어 주라고 지시를 내릴 줄 알았는데, 앤디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백악관 오리가 국장 자리를 약속했으니,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려는 걸까요? 아니면…….”
“아니면?”
대답 없던 밀러 국장이 신시아 챔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면, 이미 국장이 되었다는 생각에, 바이츠만을 불러들여 국장 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걸까요.”
“그런 사람인가?”
“……베팅을 하라면 아니라는 쪽에 걸고 싶네요. 하지만 사람은 모르니까. 몰래 짝사랑하던 국장 자리가 눈앞에 있으니, 자제력을 잃어버렸는지도. 뭐, 이건 너무 우습게 본 거네요.”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밀러 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단순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 자리에도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앤디랑 조금 더 친하게 지낼 것을 그랬어요.”
신시아 챔버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줄을 타기에는 늦었지.”
밀러 국장이 말했다.
“어머. 그 무슨 섭섭한 말이에요. 나는 앤디의 의중을 파악해 주겠다는 말이었는데.”
신시아 챔버가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앤디는 바이츠만을 대체 왜 불렀을까요?”
“트레이시 테일러.”
밀러 국장이 말했다.
갑자기 트레이시를 언급하는 국장의 말에 신시아 챔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 신시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밀러 국장이 말했다.
“서울에 있는 트레이시의 정체가 궁금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