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40화 (340/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23)

카멜리아는 침대에서 알몸으로 뒤엉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역겨움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왜 역겨움이 느껴지는지는 카멜리아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사춘기 소녀처럼 성적(性的) 행위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카멜리아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임무가 그런 행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니까.

카멜리아는 소파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역겨움을 기반으로 한 불쾌감을 떨구기 위해, 머릿속에 떠오른 두 사람의 나신을 지워 버리기 위해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보았던 두 사람의 잔상과 나신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카멜리아는 발을 움직여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끓이고, 티백을 꺼내 차를 한잔 우려냈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차 향기를 맡으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잠시 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후, 다시 머릿속에 실타래처럼 꼬인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카멜리아는 조금 전 자신이 부정했던 가설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여자가 남자를 좋아한다. 일단 그렇게 가정해 보자.

백번 양보해서 여자가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업무적으로 엮여 있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그렇게 가정한다면, 조금 전 공원에서 보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설명된다.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미묘한 관계가 설명된다.

그 사실만 설명이 된다. 다른 부분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그 사실을 CIA가 모르고 있을까?

그럴 리 없다. 이 부분은 확실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CIA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방조하고 있다는 의미다.

왜 방조하고 있을까? 요원이 사랑에 빠졌는데도 CIA는 여자를 그대로 두고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카멜리아는 조금 전 자신이 느꼈던 혐오감의 실체를 파악했다.

‘사랑.’ 그 단어에서 혐오감이 느껴졌다. 역겨움을 느꼈다. 그녀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카멜리아는 전제를 바꿨다.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는 ‘척’하고 있다.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여성성을 이용하고 있다. CIA가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전제를 깔자 꼬였던 실타래가 풀려 가는 느낌이 들었다.

말이 된다. 그런 상황이라면, 두 사람이 보여 주었던 모습도, 여자의 반응도, 두 사람의 관계도, CIA가 왜 묵인하고 있는지도 설명이 되었다.

카멜리아는 생각을 조금 더 진행시켰다.

왜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려는 것일까? 남자에게 가치가 있으니까. 그 남자가 가진 가치가 무엇일까?

카멜리아는 머릿속으로 남자를 떠올렸다.

동양인, 뛰어난 연기력을 가지고 필드에서 뛰었다. 이쪽 세계에 소속된 어딘가의 요원.

거기까지 생각하자 카멜리아의 머릿속에 스펠링 네 개로 이루어진 단어가 떠올랐다.

ODNI. 국가정보장실(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

9.11테러 이후 미국 정보공동체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기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자, 미국 정보공동체 내에서 CIA와 더불어 단 두 개뿐인 독립기관. 다시 말하면 CIA와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정보기관.

남자가 국가정보장실 소속 요원이고, 국가정보장실의 권한 확대를 경계한 CIA가 여자를 붙였을 가능성은?

카멜리아는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ODNI라는 네 글자에 취소 선을 그어 버렸다.

국가정보장실은 실질적인 정보수집 임무나 첩보 활동을 진행하지 않았다. 국가정보장실의 임무는 20여 개의 정보공동체 내 정보기관들의 관할을 조정하고, 원활한 공조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현장 요원을 운용하지 않았다.

설사 국가정보장실이 현장 요원을 운용하고 있고, CIA가 국가정보장실을 경계한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국가정보원 소속일까?

국가정보장실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큰 가설이었다. 타국 요원을 유혹해 정보를 빼내는 미인계는 정보 전쟁의 기본 중 기본이니까. 그래 봤자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었다.

한국이다. 정치인이라면 모를까, 고작 작은 나라 정보기관 요원에게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CIA 요원을 붙인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었다.

실타래를 풀어 내려는 생각들이 더더욱 머릿속에서 꼬여만 가고 있었다.

카멜리아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싱크대로 가서, 자신이 사용했던 컵을 씻었다.

컵을 씻으며, 카멜리아는 남자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했다.

현장 요원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 CIA는 아님.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음.

남자에 대해 카멜리아가 아는 것이 전부였다.

거기에 카멜리아는 한 문장을 추가했다.

향후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음.

***

트레이시의 걸음이 다시 멈추었다. 그런 트레이시에게 보조를 맞춰 한규호도 걸음을 멈추었다.

“언제부터였죠?”

트레이시가 한규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한규호가 되물었다.

“언제부터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던 거죠? 일본에서부터, 미국에 채권을 안겨 주기 위해 카멜리아를 데려가겠다는 계산식이 서 있었나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중요해?”

한규호가 물었다.

“중요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어떤 부분에서 중요하지?”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나에게 카멜리아를 맡아 달라고 한 것이라면, 당신이 카멜리아라는 카드를 통해서 이익을 얻기 위해 나를 이용한 것이 되니까요. 그저 이스라엘이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하는 인계 철선 같은 역할로.”

트레이시가 한규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한규호는 자신을 노려보는 트레이시의 눈이 어쩐지 싫지 않았다.

포인세티아의 화려한 포엽 속에 감추어진 진짜 꽃잎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용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

한규호가 말했다.

“납득시켜 봐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한규호는 분노가 서려 있는 트레이시의 눈동자를 보면서, 그녀를 조금 더 도발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치 나이 어린 여동생을 일부러 화나게 만들고 싶은 오빠의 마음처럼.

“당신 국장이 나에게 장난질을 치더군.”

한규호는 충동을 억제하면서 말했다.

“서용석이라는 카드를 내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어 대더란 말이지. 마치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서용석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을 거야. 그런 뉘앙스를 풍겼어. 그게 짜증이 났지. 당신네 국장이 날 짜증 나게 만들었으니 나도 그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카멜리아를 데려가겠다고 한 거지.”

“계산하지 않았다는 의민가요?”

“카멜리아를 데려가면 당신 국장을 귀찮게 할 수 있다는 계산은 있었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 계산도 틀렸군. 정작 이쪽이 더 귀찮게 되어 버렸으니까. 당신이 날 귀찮게 한다는 의미는 아니야. 아무튼, 그런 순간적인 변덕으로 데려는 왔는데,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일단 사고는 쳐 버렸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해결 방법일까를 생각해 보았고,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이스라엘이 당신 대통령에게 징징거릴 거라고 생각을 했고, 마음 급한 당신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행동하리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액션은 없었고, 시간은 흘러갔고, 당신은 화가 났고. 나는 당신에게 사실은 이렇습니다 하고 해명하고 있는 상황. 납득이 되십니까?”

그렇게 설명을 마친 한규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한규호를 트레이시는 무언가 분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밀러 국장이 당신을 도발하지 않았으면 그녀를 데려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의미인가요?”

트레이시가 다시 물었다.

“모르겠군. 그때 대사관에서 이야기했지만, 당신 조국에게 이렇게 저렇게 스트레스가 쌓여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엿을 좀 먹이고 싶었을는지도.”

“카멜리아를 원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인가요?”

트레이시가 다시 물었다.

“나에게 그 여자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한규호가 말했다.

“아무런 감정도 없나요?”

“감정도 없지.”

“당신 목숨을 노렸는데?”

“브랜든 허드슨의 목숨이었지. 내 목숨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야. 지시를 받았을 뿐이잖아. 채무를 받아야 한다면 이스라엘로 갔겠지. 그리고 이쪽 세계에 살면서 그런 사소한 원한을 하나하나 갚겠다고 하면 너무 피곤하지. 물론 이스라엘 놈들은 별로 피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한규호가 트레이시에게 빙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트레이시의 눈에 담겨 있던 분노가 서서히 옅어졌다.

한규호의 설명을 이해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신을 인계 철선 역할로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당신 국장이 짜증 나게 했고, 그래서 단순한 변덕을 부린 거고, 기왕 일이 벌어졌으니 이스라엘이나 미국이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해 봤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일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고, 그 생각은 빗나갔고. 당신은 화가 났고. 나는 미안해하고 있고. 그렇게 정리가 되겠지. 질문이 또 있습니까?”

“그녀를 어떻게 할 거죠?”

“이런 말 하면 당신이 더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한다고 했으니, 그래야 하겠지. 고민 중이라는 말이 가장 정확하겠군. 이제 와서 더 이상 그녀는 필요 없으니 데려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모양새가 우습잖아. 그녀가 알아서 도망쳐 주면 편한데, 사실 그럴 것 같지는 않네. 지금 당장 목숨이 위험한 상황도 아니고, 미국이 중간에 껴 있으니 카멜리아는 조급할 이유가 없지. 절대로 잊지 않는 그녀의 조국이 포기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을 테고. 이렇게 말하니 정말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후회가 되는군. 다음 주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채권을 포기하고 그냥 데려가라고 할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대충 다 이야기한 것 같군. 질문이 남았습니까?”

한규호가 말했다.

트레이시에게는 질문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한규호가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주일 미국대사관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미국에 넘기면 이스라엘에 돌려줄 테니까.

한규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트레이시는 그 여자를 떠올렸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세요. 저를 통해서 그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약속드릴 수 있어요. 그런 일은 없어요.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가득 담고서 그렇게 말하던 그 여자.

그 여자 때문에 카멜리아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아닌가요?

트레이시의 마음속에 아직 그 질문이 남아 있었다.

“와 나였죠?”

트레이시가 물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문이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응?”

“왜 나에게 부탁한 거죠?”

“그 시간, 그 장소에 당신이 있었으니까.”

한규호가 별 이유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지 그뿐인가요?”

트레이시가 다시 물었다.

한규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더 이상의 대답은 없다는 듯.

“단지 그 이유 하나뿐인가요?”

트레이시가 다시 물었다.

한규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한규호가 말했다.

“무슨 그림을 말이죠?”

트레이시가 물었다.

“카멜리아를 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당신이 나를 설득했다는 그림.”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슬슬 들어가자고. 카멜리아가 도망갔기를 기대하면서.”

그런 한규호에게 다시 트레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 자격이 있나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한규호의 걸음이 다시 멈추었다.

“자격?”

고개를 돌린 한규호가 트레이시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볼 수 있는 자격. 당신의 솔직한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자격.”

트레이시가 물었다.

트레이시의 질문은 선을 넘는 질문이었다.

CIA 요원과 독립요원 사이에 그어져 있던 업무적인 관계라는 선. 트레이시는 그 선을 넘어, 사람 대 사람으로서 대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한규호는 트레이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에게 자격이 있나요?”

트레이시가 다시 물었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있다고 할 수 있겠지.”

한규호가 말했다.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있는 건가요?”

트레이시가 되물었다.

“자격이 있지.”

한규호가 말했다.

“그렇다면 말해 줘요, 왜 나에게 부탁한 거죠?”

트레이시가 물었다.

“당신은.”

한규호의 입이 열렸다.

“내가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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