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22)
“그래도 좀 아쉽군. 당신이 하는 국장 욕을 듣고 싶었는데.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볼까?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한규호가 말했다.
“……어떤 식으로든 액션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맞아. 그랬지. 그러다가 밀러 국장 이름이 나왔고.”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누구의 반응이 있을 거라고 예상한 거죠?”
트레이시가 물었다.
“프랭크 보머. 당신 대통령.”
한규호가 마치 옆집 아저씨의 이름을 말하듯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세계 최강국 대통령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트레이시는 한규호를 돌아보았다. 화난 표정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얼굴에 놀라움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카멜리아가 그러더군. 이스라엘은 절대 잊지 않는다고.”
한규호가 설명을 시작했다.
“나도 이쪽 세계의 사람이니 이스라엘 놈들이 얼마나 지독한지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지. 귀를 씻고 싶을 만큼 지저분한 이야기였어. 아무튼, 그 지독한 놈들이 자기 식구가 누군가에게 잡혀 있다면 가만히 있을까? 그럴 놈들일까? 트레이시 양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가만히 있지 않겠죠.”
트레이시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절대로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니지. 하지만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지금은 보통 상황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중간에 미국이, CIA가 껴 있으니까. 안 그렇습니까? 테일러 요원?”
가벼운 말투로 트레이시의 이름을 부르는 한규호의 말에, 이번에는 트레이시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제법은 물론 타국 영토에서 그 나라 현지법도 가볍게 무시하는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미국이 중간에 껴 있는데 함부로 난장을 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어. 절대로 요원을 포기하지 않는 이스라엘인데, 아무리 미국이 중간에 껴 있다고 해도, 손을 놓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면 누가 자랑스러운 민족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겠어. 그러니 방법을 찾아야지. 사실 방법은 하나밖에 없고.”
“돌려달라고 요청하겠죠.”
트레이시가 말했다.
“우리 요원 돌려주세요. 그렇게 징징거리겠지. 아무리 요원이 소중하다고 해도, 미국인데. 그 방법밖에 없지. ‘돌려주세요.’라고 하든가, ‘데려가게 허락해 주세요.’라고 하든가. 자, 여기서 아까 문제를 다시 풀어 보자고. 밀러 국장은 이스라엘이 징징거리면 들어줄 사람일까?”
트레이시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규호가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밀러 국장이 어떤 생각을 할지 나는 모르겠군. 아까 말했던 것처럼 나는 그 사람과 친분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이스라엘이 그런 요청을 했다고 바로 돌려주지는 않을 거야. 뭐라도 하나 얻어 내면 모를까.”
트레이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치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특히 선거를 앞둔 당신네 대통령이라면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재선을 못 할까 봐 손톱을 물어뜯으며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에이팩이 지폐 다발을 흔들면서 우리 요원을 내놓으면 이 정치후원금을 드리죠. 이렇게 유혹하면. 과연 위대한 프랭크 보머 대통령은 헐리우드 영화 속의 다른 멋진 미국 대통령들처럼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트레이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트레이시는 한규호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인지했다. 그래서 표정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그런 의도가 더 이상한 표정을 만들어 버렸다.
트레이시의 얼굴을 본 한규호는 다시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명분도 충분해. 선거 자금이 필요해서 이스라엘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야. 최우방국인 이스라엘과의 동맹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것은 대통령의 의무 중 하나야.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도 편해지지. 자, 이제 판이 다 만들어졌어. 고작해야 독립요원 하나, 그리고 최우방국 이스라엘. 플러스 선거 자금. 고민할 필요도 없지. 밀러 국장을 백악관으로 불러. 그리고 지시를 내리는 거지.”
트레이시는 얼굴 근육에 힘을 주었다.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
“아니지. 나라면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리지는 않을 거야. 유대인 정치자금 때문에, 이스라엘 요원을 풀어 주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을 테니까. 잘못하면 눈앞까지 다가온 선거에서 치명타가 될 수도 있어. 아니, 이번 선거는 어찌어찌 넘어간다고 해도, 나중에 문제가 될 씨앗이 될 수도 있겠지. 나도 이런 생각을 하는데 평생을 정치라는 전쟁터에서 싸워 온 당신네 대통령이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겠지. 다시. 밀러 국장을 백악관에 불러. 일단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고, 적당한 타이밍에 말을 꺼내는 거지. 서울에 이스라엘 요원이 잡혀 있지? 계속 잡아 둬야 할까?”
표정을 유지하려는 트레이시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트레이시는 놀라움을 얼굴에 드러낸 채,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눈앞에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남자, 한규호에게 이미 몇 번이나 놀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신체 능력이 아니었다.
그가 놀라운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신체 능력을 직접 그녀의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었다.
소말리아에서 불가능한 작전을 성공시켰고, 방글라데시에서 일반인이라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를 입은 상태로 여자 하나를 구출해 왔고, 베네수엘라에서 여자아이를 구하기 위해 카르텔 두 개를 공중분해시켰다는 사실을 트레이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아키타에서 날아와 깡패들을 순식간에 처리했을 때도, 그녀는 약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트레이시는 단 한 번도 그의 놀라운 신체 능력을 확인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한규호의 신체 능력이 아니라, 넓은 시야와 깊은 사고 과정이었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넓은 시야로 단서를 모았고, 그렇게 모은 몇 안 되는 단서 속에서 논리적 추론을 통해 가능성이 있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특히 일본에서 그가 보여 준 사고 능력은 아이비리그에서도 최상위권의 수재라고 자부하는 트레이시조차 놀라게 할 정도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고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을 시작하자, 엄청난 이야기를 쏟아 내고 있었다.
“여기서 세 번째 문제. 밀러 국장은 대통령의 지시 같지 않은 지시를 따를까요?”
이번에는 트레이시도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작게 흔듦으로써, 부정을 표시했다.
그녀도 밀러 국장에 대해서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밀러 국장이라면 이스라엘이나 카멜리아, 그리고 다가오는 선거보다 기프티드라는 이 남자의 존재에 더욱 무게를 두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눈앞의 남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뭐, 지금 이야기하는 건 다 소설이니까. 계속 소설을 써 봅시다. 밀러 국장은 지시를 따르지 않아. 그러면 대통령은 포기할까? 아니. 안 그러겠지. 선거가 없다면 모를까. 선거가 눈앞이야. 거기다가 밀러 국장을 쳐 낼 수도 없어. 왜? 선거가 눈앞이니까.”
트레이시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규호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포기는 못 해. 방법을 찾아야 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미국이 직접 움직이면 방법이야 무궁무진하지. 나에게 대놓고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나를 배제한 채로 그냥 데려갈 수도 있겠지. 아니면 이스라엘에게 직접 알아서 데려가라고 하든가.”
“내가 지키고 있는 데도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요원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미국은? 절대로 요원을 포기하지 않아?”
한규호가 물었다.
트레이시는 대답하지 못했다.
“뭐. 그건 최악의 가설이고. 선거가 관련되어 있다고 해도, 중동도 아니고 한국인데, 설마 그렇게까지는 안 하겠지. 나라면 당신에게 미리 지시를 내리겠지. 철수하라고 하든가. 적어도 언질은 주겠지. 그게 내가 생각했던 ‘액션’입니다.”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설명이 끝났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트레이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잠시 동안 놀란 얼굴로 한규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게…… 당신에게 어떤 이익이 되죠?”
한참을 바라만 보던 트레이시가 물었다.
“만약 나에게 데려가도 되겠냐고 물어보면 나는 대통령이 발급한 카드 한 장을 얻게 되는 거지. 재선에 성공했을 때 이야기지만. 나를 배제하고 직접 움직이면, 나에게 채무를 지게 되는 거고.”
“채무라고 생각할까요?”
“그쪽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지. 받아 내면 되니까.”
한규호는 마치 별것 아니라는 말투로 말했다. 채무를 받아 내는 상대가 미국 대통령이 아니라 마치 잘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
여전히 거실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카멜리아는 두 사람이 사라진 산책로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이제 없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여자는 화가 났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자의 뒷모습에서 그녀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같은 여자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었다. 여자는 화가 났고, 그래서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는 화가 난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다정한 목소리로 여자를 달랬다. 여자는 여전히 화가 났지만, 그 목소리에 마음이 조금 녹아내렸다.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어깨를 감싼 남자의 팔에 이끌러 앞으로 걸어 나간다.
그렇게 보였다. 그렇게밖에 보이질 않았다.
여자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 문장이 카멜리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문장이 떠오르자 카멜리아가 풀지 못했던 몇 가지 의문에 답이 풀렸다.
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상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지, 왜 여자가 남자를 보았을 때, 눈동자에 반가움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는지가 설명되었다.
남자와 여자. 고작 성 염색체 하나 차이로 갈라진 두 존재 사이에는 어떠한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성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카멜리아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그 가능성을 이용하는 일을 했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카멜리아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여자는 CIA 요원이었다. CIA 요원이 사랑에 빠진다? 그것도 일로 엮여 있는 사람하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나약한 정신 상태였다면 애초에 이쪽 세계에 발을 디디지도 못했을 것이다. 설사 운 좋게 요원이 되었다고 해도, 검증 과정에서 걸러졌을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CIA 검증 시스템을 빠져나왔을 리가 없다.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 보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망막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있을 수 없어.”
카멜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거실 소파가 보였다.
남자는 거실 소파를 점령하고 있었다. 거실이 자신의 영역이라고 선포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카멜리아가 아는 한 남자는 항상 그 모습이었다.
확신할 수 있을까?
카멜리아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깊은 밤, 카멜리아가 깊게 잠들어 있는 그 시간에, 남자가 여자의 방에 숨어 들어가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최대한 숨소리를 죽이고,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남자가 누워 있던 소파를 바라보며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