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38화 (338/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21)

***

거실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대한 통창. 카멜리아는 그 통창에서 두어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산책로를 걸어가는 남녀 두 사람의 뒷모습이 있었다.

알 수 없는 관계.

카멜리아는 멀찍하게 보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정의했다.

여자가 CIA 소속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여자와 말 한마디 섞어 보지 않았지만, 몇 달이라는 시간 동안 같은 지붕 아래에서 생활하면서 그녀가 CIA 소속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남자도 CIA 소속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일본에서 한 팀으로 활동했기에 그렇게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상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상하 관계에서 남자가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가 CIA 소속이라면, 여자보다 우위에 있는 남자도 CIA 소속이어야 했다.

흔히 미국의 정보공동체(United States Intelligence Community)라고 말하는 미국 정부 산하의 20여 개의 정보기관 중 최상위에 CIA가 있었다. 정보공동체 안에서 각 정부 부처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기관은 국가정보장실(ODNI)과 CIA뿐이었다.

연방수사국(FBI)과 정보부(BI), 마약단속국(DEA), 국가안전정보부(ONSI)는 법무부, 정보조사국(INR)은 국무부, 정보방첩국(OICI)은 에너지부, 정보분석국(I&A), 해안경비대 정보부(CGI)는 국토안보부, 테러금융정보국(TFI)는 재무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최근 들어 음모론 극장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떠오른 국가안보국(NSA)도 국방부 산하의 9개 정보기관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 말은 독립기관인 CIA가 정보공동체 내의 다른 기관들보다 우월적 지위에 서 있다는 의미였다. CIA가 필요에 따라 정보조사국(INR) 요원을 동원할 수는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한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 남자가 여자보다 직급이 높은 CIA 소속 요원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하지만 카멜리아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도출한 결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남자가 CIA 소속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증거 같은 것은 없었다. 느낌이 그랬다.

물론 단순한 육감은 아니었다. 그렇게 느껴지는 근거는 있었다.

남자는 현장 요원이었다. 일본에서 브랜든 허드슨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직접 필드에서 뛰었다. 카멜리아마저 속아 넘어갈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 주었다. 아주 잘 훈련된 현장 요원이라는 증거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끝난 후, 그에게서 풍기는 아우라가 바뀌었다. 지시를 수행하는 현장 요원이 아니라, 작전을 기획하고 지시하는 관리자의 아우라가 풍겼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한국에 온 것도, 여자가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도 모두 남자의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서 첫 번째 모순이 발생한다.

랭리는 작전을 기획하고 지시를 내리는 관리자와 지시를 수행하는 현장 요원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머리는 행동하지 않았고, 손발은 생각하지 않는다. 작전을 기획하고 지휘하는 관리자가 직접 현장에서 뛴다는 것은 인력풀이 풍부한 CIA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남자가 이제 막 관리자 등급으로 올라선 현장 요원이라고 억지로 이야기를 맞출 수는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의 등급이라면 최우방국인 이스라엘 요원을 구금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또 다른 근거도 있었다. 남자에게서는 랭리에 소속된 엘리트 특유의 오만함이 없었다. 그의 말과 행동에서는 자신감이 가득했지만, CIA 요원 특유의 오만함과는 결이 달랐다. 조직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남자를 대하는 여자의 태도도 이상했다. 상관이라기보다는 지인을 대하는 느낌이 강했다. 며칠 전 남자가 갑자기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반가움’이라는 감정이 대표적인 예였다.

카멜리아는 산책로를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디지? 당신 소속이 어디지?

카멜리아는 남자의 뒷모습에 질문을 던졌다.

그때,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오피스텔 쪽으로 향했다.

남자가 오피스텔을 방향을 바라본 그 순간, 카멜리아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남자가 서 있는 공원 산책로에서 카멜리아가 서 있는 오피스텔 최상층까지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50m가 넘었다.

50m라는 거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정도만 파악할 수 있는 거리지,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하물며 눈이 마주친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단순히 거리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아무리 거실에 볕이 들어온다고 해도, 자연광에 완전히 노출된 공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밝은 공원에서 거실 창문을 올려다본다고 하더라도, 마치 거울처럼 외부 풍경을 반사하고 있는 거실 창문밖에 볼 수 없었다.

백번 양보해서 창문을 통해 거실 안을 보았다고 해도, 공원에 비해 어두운 거실에 서 있는 카멜리아를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천 번, 만 번 양보해서 카멜리아를 보았다고 해도, 눈이 마주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카멜리아는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선이 얽혔다는 확실한 느낌을 받았다.

카멜리아는 시선을 피했다. 생각하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본능이 의도와 상관없이 시선을 옮겨 버렸다.

그렇게 시선을 피한 카멜리아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이 마주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선을 피한 자신이, 그렇게 지시를 내린 본능이 부끄러웠다.

나를 보고 있을 리가 없어.

카멜리아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남자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남자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다시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다시 시선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머리를 들어 올리려 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을 리가 없어.”

카멜리아는 직접 소리 내어 말했다. 스스로에게 직접 목소리를 들려주어 확신을 주려는 의도였다.

그렇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눈싸움은 남자가 몸을 돌려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남자가 뒷모습을 보였을 때, 카멜리아는 그제야 자신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느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카멜리아는 이대로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현관까지 몇 발자국을 걸어가,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택시를 잡고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가 달라고 하면 끝이었다. 택시를 잡는 시간까지 고려해도, 10분을 넘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였다.

하지만 카멜리아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이지 못했다.

기회는 예전에도 있었다. 여자는 가끔씩 집을 비웠고, 여자가 집을 비우면, 지키는 사람도,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카멜리아가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여자가 있든 없는 상관이 없었다. CIA라는 보호막 아래에서 화초같이 키워진 여자 요원쯤은 카멜리아에게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카멜리아가 이 집에 계속 붙어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지시. 신 베트로부터 지시를 받지 못했다. 지시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요원을 포기하지 않는다. 카멜리아는 자신이 번트(burnt : burn의 과거분사, 조직에 버림받았다는 의미)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직은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굳건하게 믿고 있었다.

카멜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 안에 공기를 가득 담음으로써,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천천히 찍어 눌렀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카멜리아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을 때, 그녀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남자가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그렇게 팔을 두르고, 두 사람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연인. 그 단어가 어울리는 뒷모습이었다.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죠?”

트레이시가 물었다.

트레이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던 한규호는 웃음기 담긴 눈으로 트레이시를 보며 물었다.

“계속 걸어가겠다고 약속해 줄 때까지.”

트레이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정면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불편했다면 미안. 다른 뜻은 없었어.”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트레이시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풀었다.

그렇게 조금 거리를 벌린 두 사람은 말없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까지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그렇게 10여 분을 걸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한규호가 입을 열었다.

“나도 예상하지 못했어.”

트레이시의 시선이 잠깐 한규호에게 향했다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왔다.

“아니지. 일단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하겠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몇 달 동안 당신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생각해.”

한규호의 사과에 정면을 향했던 트레이시의 시선이 한규호에게 고정되었다.

“뭐가 말이죠?”

트레이시가 물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한규호가 말했다.

“그거 말고. 무엇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트레이시가 물었다.

한규호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용서해 줄지 말지, 일단 들어 보고 판단하겠다. 트레이시의 질문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이지. 어떤 방식으로든 액션이 있으리라 생각했거든.”

한규호가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국장이 말인가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딱 한 번 만나 봤지만, 아니, 그건 화면을 통해서였으니,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다고 하는 게 정확하려나. 아무튼, 당신네 국장이 저 여자를 돌려 달라고 말할까?”

한규호가 말했다.

“무슨 의미죠?”

“내가 카멜리아를 한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본인이 허락해 놓고, 이제 와서 상황이 바뀌었으니, 돌려 달라고 말할 사람이냐는 의미지. 이건 비꼬는 게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그래도 당신이 나보다 당신네 국장에 대해서 잘 알지 않겠어?”

한규호가 그렇게 말했다.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질문에 밀러 국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과연 감정이라는 것이 있는지 의문스러운 기계 같은 국장이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그런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미안. 내가 이상한 걸 물었군. 외부자인 내가 그런 걸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대답 없는 트레이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한규호가 말했다.

트레이시는 대답 없이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한규호의 말이 맞았다. 한규호는 외부인이었고, 밀러 국장은 내부인, 그것도 그녀의 조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상사였다.

일반 회사도 아니고, CIA 요원이 국장에 대한 평가를 외부인에게 표출하는 것은 조직에 대한 ‘반역 행위’라고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트레이시가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그런 오해가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직 화가 나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 들어 보는 한규호의 부드러운 말투를 계속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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