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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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리아는 거실에 서 있었다. 거실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통창에서 두어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 서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공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멜리아는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을 좋아했다.
야트막한 산, 잘 정비된 산책로,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촘촘히 심겨 있는 오피스텔 뒷산 공원의 모습은 넓은 평지에 여기저기 호수가 펼쳐져 있는 텔아비브의 하야르콘 공원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달랐다. 언제 어디서 폭탄이 터질지 모른다는 근원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는 텔아비브 시민들의 표정과, 그러한 공포를 모르는 이 나라 사람들의 분위기가 같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이질감이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거실 창을 통해 공원을 바라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정확히는 그 남자가 이 집에 나타난 이후 처음이었다.
사실, 거실에 나오지 않고서도 언제든 공원을 바라볼 수는 있었다. 그녀가 머무는 방의 창문도 거실 창문과 같은 방향을, 오피스텔 뒷산 공원을 향해 있었다.
두 창문 사이의 거리는 고작 몇 미터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방 작은 창문을 통해서 바라보는 공원의 느낌은 거실 통창에서 바라보는 공원의 풍경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창문의 크기였다. 그녀의 방 창문도 그리 작은 크기는 아니었지만, 거실 통창과 비교하면 어딘가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그 남자가 오기 전까지, 거실의 통창을 통해서 공원을 바라보는 것이, 카멜리아가 이 집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작은 즐거움이었다.
그랬는데, 그 남자가 거실을 점거한 이후, 그 같은 소소한 즐거움을 더 이상 즐길 수가 없게 되었다.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잠깐씩 거실을 나오고는 했지만, 용무 이외에 쓸데없이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거실에, 정확히는 거실 소파에 항상 그 남자가 누워 있었으니까.
그와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카멜리아는 그를 죽이려 했고, 그는 카멜리아를 구속하고 있었다. 불편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단순히 불편한 관계 때문에 그를 피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그 남자와 엮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카멜리아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이, 지금까지 그녀를 지켜 왔던 본능이, 그와의 거리를 좁히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거실을 꺼렸던 카멜리아가 오랜만에 거실의 통창을 통해 공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물을 마신다는 핑계로 거실로 나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거실을 차지하고 커다란 창문을 통해 공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카멜리아의 얼굴에는 작은 즐거움을 만끽한다는 표정은 없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 조금 전 이 집을 나간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걸음으로 공원 산책로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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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텔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한규호와 카멜리아, 두 사람은 오피스텔 단지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 뒷산 공원으로 향했다.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산책로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트레이시가 금발 머리를 한 외국인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외국인이 늦은 오후에 동네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 자주 있는 일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던 길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바라볼 정도로 드문 일도 아니었다. 백현동 주민들은 그러한 행위가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상식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그냥 ‘외국인이네’하고 지나치기에 트레이시는 너무나도 아름다웠으니까.
화장기 없는 얼굴, 대충 질끈 묶은 머리, 집에서 편하게 입던 티셔츠와 레깅스. 이 모든 요소가 원래 미인상이었던 트레이시의 얼굴과 조화를 이루어 마력 같은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
공원을 걷던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그런 트레이시의 마력 같은 매력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실례가 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트레이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레이시의 얼굴을 본 남자들은 그녀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 하나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눈썹, 일자로 굳게 닫힌 입술.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남자들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녀의 화를 풀어 주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녀의 옆에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남자가 있었다.
트레이시의 화난 얼굴을 확인한 남자들은 백이면 백, 같은 동작을 수행했다.
저런 미녀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놈이 누구인지, 도대체 얼마나 잘난 놈인지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런 평범한 남자 옆에 저런 미녀가 붙어 있는지, 그리고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화가 나 있음에도, 남자는 어떻게 저런 여유 있는 표정을 하고 있는지, 남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분노를 불러왔다. 저 남자가 미녀를 화나게 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미녀를 달래 주지 않고 있다. 이런 생각들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정의로운 남자들의 가슴속에서 불타올랐다.
분노에 불이 붙었다고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남자를 한번 노려보고, 여자에게 안타깝다는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
한규호는 지나가는 남자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날 선 시선을 느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일반인보다 월등히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는 한규호에게 악의로 가득 찬 남자들의 시선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괜히 나오자고 했나.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규호도 트레이시가 화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녀의 화가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규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카멜리아를 맡겨 두고, 몇 달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그대로 방치한 모양새가 되었다. 트레이시는 화가 났을 것이다. 한규호라도 화가 났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한규호라면 그렇게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겠지만.
문제는 한규호의 등장이 트레이시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는 것이다. 한규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트레이시의 눈동자에서 반가움을 보았다. 그녀가 보여 준 반가움 안에는 한규호를 다시 만났다는 반가움도 있었지만, 드디어 이 이상한 동거 생활이 끝을 맺는다는 기대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기대를 한규호가 저버렸다. 한규호는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5일 동안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만 보고 있었으니까.
그런 한규호의 태도가 트레이시의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 집고 있던 감정들, 한규호를 기다리며 느꼈던 초조함과 답답함, 한규호가 나타났을 때 느꼈던 반가움과 기대감을 분노로 융합했을 것이다.
그렇게 화학작용을 일으킨 감정들이 화산 폭발 직전의 마그마처럼, 그녀의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것이다.
한규호는 그런 기류를 느꼈고, 폭발을 막기 위해, 그녀를 달래기 위해 산책을 나오자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녀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거기에 트레이시의 미모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규호는 조금 더 한적한 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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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는 여전히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표정만큼 화가 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규호에게서 산책을 권유받고, 두 사람이 이렇게 산책로를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 전 그녀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분노가 마치 상온에 노출된 얼음처럼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한편으로 트레이시는 그게 분했다. 고작 같이 걷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분노가 사그라지는 자신이 부끄럽고, 또 분했다.
그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 트레이시는 화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억지로 얼굴에 분노를 담고 있었다.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참고 참아 왔던 질문을 할 생각이었다. 꼭 답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한 가지만이라도, 트레이시 자신이 얼마나 참아 왔는지, 지금도 얼마나 참고 있는지를 한규호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트레이시에게 한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괜찮은 것 같아.”
트레이시는 고개를 돌려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마치, 진짜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얼굴을 한 채로, 여유롭게 주변을 돌아보며. 느린 걸음으로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뭐가 말이죠?”
트레이시가 물었다. 목소리에 어쩔 수 없는 퉁명함이 묻어 있었다.
한규호의 발이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저기.”
한규호의 시선이 그들이 걸어온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위치가 좋아.”
한규호가 말했다.
트레이시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규호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끝에는 국정원이 구해 준 오피스텔이 있었다.
“급하게 구했을 텐데, 그런 것치고는 괜찮아. 공간도 그럭저럭 적당하고, 교통편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이 공원이 마음에 들어.”
한규호는 마치 자신의 집을 자랑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트레이시의 시선이 오피스텔에서 한규호를 향해 움직였다. 한규호는 여전히 오피스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뭐지?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왔다. 카멜리아에게 들리지 않도록 하려고 일부러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그녀를 끌고 나와서는 국정원이 구해 준 집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갖고 싶다는 듯, 오피스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레이시의 마음속에서 녹아내리던 분노가 다시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말없이 오피스텔을 바라보고 있는 한규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트레이시는 다시 분노를 느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나를 비참하게 만들 생각이지?
한규호는 오피스텔을, 트레이시는 그런 한규호의 옆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 이상한 대치를 끝낸 것은 한규호였다.
“어떻게 구했을까? 저 정도의 집이면 공실이 그리 많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국정원 놈들, 누가 정보기관 아니랄까 봐, 아주 좋은 물건을 잘 찾았네.”
한규호가 오피스텔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서서, 조금씩 멀어져 가는 한규호를 노려만 보고 있었다.
두어 걸음 앞서 걸어가던 한규호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 자리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드나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응?”
“저 집이 마음에 드나요? 갖고 싶나요?”
트레이시가 한규호에게 물었다.
한규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면서 천천히 트레이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뭐 갖고 싶다는 말은 아닌데…….”
그런 한규호의 걸음이 트레이시의 말에 멈추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으면 되나요? 지금처럼 저 집을 지키고 있으면 되나요? 집을 지키는 개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 한 채로, 그저 당신이 언제 올까를 기다리면서, 언제 떠날지를 걱정하면서, 그저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나요?”
트레이시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녀의 눈에 담겨 있는 감정의 반의반도 목소리에 담기지 않았다.
하지만 한규호는 그 차분한 목소리가 위험신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르는 것이 바보였다.
한규호는 다시 트레이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다가가서 트레이시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일단 걸을까?”
그러나 트레이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대답을 듣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한규호의 눈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 트레이시를 바라보다 한규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는 팔을 뻗었다. 그리고 트레이시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트레이시는 어깨에 걸리는 한규호의 팔을 느꼈다. 그 팔에 부드럽게 힘이 들어가는 것도 느꼈다.
“이해해. 당신이 왜 화가 났는지. 아니, 이렇게 말하면 당신이 더 화가 나겠지. 미안해. 내가 무신경했어.”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트레이시의 어깨에 두른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일단 좀 걸을까?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네. 더군다나 트레이시 당신은 필요 이상으로 예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고.. 계속 이러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한 오해를 할지도 모르겠네.”
한규호의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힘이 들어갔다고 해도, 아주 미약한, 마치 깨지기 쉬운 크리스털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는 정도의 미약한 힘이었다.
“어물쩡 넘어가려는 게 아닙니다. 조금만 더 한적한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한규호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트레이시의 발걸음이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한규호는 작게 웃음을 지어 주고는 트레이시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춰 앞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