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16)
침대에서 일어난 트레이시는 거실로 나가기 위해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문을 열지는 않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손잡이를 잡은 상태로 멈추었다가 문손잡이를 놓았다.
거실에 그가 있었다. 막 일어난 모습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트레이시는 몸을 돌려 화장대에 앉았다.
어떻게 할까?
트레이시는 화장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화장을 하고 싶었다. 화장을 하기 위해서는 세안을 해야 했고, 세안을 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 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트레이시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화장대에 놓인 빗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밤새 흐트러진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트레이시는 머리를 빗으며,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거울 속 트레이시도 그 시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 시선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침울함이 담겨 있었다.
트레이시는 그 눈을 보면서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士爲知己者士, 女爲悅己者容.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
동아시아 지부로 이동하기 전,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교육을 받을 때 배웠던 문장이었다.
강사는 극동아시아의 3개국, 한국, 중국, 일본에는 아직 목숨을 바쳐 국가에 충성하는 문화가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트레이시는 야만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목숨을 걸고 누군가에게 충성하는 것도,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하는 여자의 마음도, 현대 미국 사회에서 성장한 트레이시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관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트레이시가 지금 머리를 빗고 있었다. 거실 밖의 남자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정돈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트레이시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우습고, 조금은 처연하다고 생각했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하는 여자.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그랬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남자도 아닌데.
트레이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는커녕, 대부분 그 눈으로, 마음 깊은 곳을 직시하는 듯한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소말리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방글라데시의 시골 마을에서, 일본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그는 언제나 그 눈을 보여 주었다.
그런 그를 위해 트레이시는 머리를 빗고 있었다.
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트레이시는 다시 거울 속의 자신에게 물었다.
왜 머리를 빗고 있는 거지?
거울 속의 트레이시가 되물었다.
***
트레이시는 머리만 빗은 채로 방문을 열었다. 가볍게 팩트라도 바를까 생각했지만,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고, 맨 얼굴로 나오기로 결정을 내렸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온 트레이시를 제일 먼저 반긴 것은 거실에 은은하게 풍겨 오는 커피 향기였다.
인스턴트 캡슐 커피 특유의 강한 커피 향이 아니라, 드리퍼를 이용해 직접 내린 커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은은하고, 깊은 원두의 향기였다.
트레이시는 고개를 돌려 거실 소파를 바라보았다.
한규호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창가 쪽으로 둔 머리를 왼팔로 받친 모습으로, 오른손에 들린 스마트폰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자연스럽다. 딱 그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마치 자신의 집 거실 소파에 누워 휴일 오전의 여유를 즐기는 남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한규호가 만들어 준 저녁 식사가 끝나고, 한규호는 거실 소파에서 지내겠다고 말했다.
당연했다. 침실은 두 개뿐이었고, 각 침실마다 이미 한규호와는 다른 성별을 가진 주인이 있었다.
그가 머물 장소는 거실 소파가 유일했다.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트레이시는 한규호가 소파에서 지내겠다는 말을 했을 때, 이유 모를 섭섭함을 느꼈고, 그런 섭섭함을 느끼는 자신에게 화가 났었다.
그녀가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트레이시의 귀에 한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 보통 이 시간에 일어나나 보지?”
한규호가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트레이시도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일어나는 시간에 대해 무언가 변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억지로 참아 냈다. 할 만한 변명도 없었고, 변명을 하면 더 비참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트레이시는 그런 느낌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부엌을 바라보았다.
식탁에 놓여 있는 커피드립 서버에 커피가 담겨 있었다. 머그컵으로 한 잔 정도, 애매한 양이었다.
트레이시는 다시 시선을 돌려 소파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빈 머그컵이 놓여 있었다.
한규호가 직접 커피를 내렸고, 이미 한 잔을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트레이시는 식탁으로 다가가 커피가 담겨 있는 서버를 만져 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한 트레이시는 싱크대에서 머그컵을 가져와 커피를 따랐다. 350ml 용량의 머그컵 5분의 4 정도를 채우고서야 서버는 바닥을 보였다.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았을 것을.
트레이시는 머그컵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한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피 남았어?”
트레이시는 고개를 돌려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스마트폰을 향해 있었다.
남편.
트레이시는 그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휴일 주말 오전, 소파에 누워 있는 남편, 커피가 남았냐고 물어보는 남편.
그 문장을 떠올렸다.
트레이시는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지우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컵 보드에서 새 머그컵을 꺼내, 자신의 머그컵에 담겨 있던 커피를 나누었다. 무언가 심술을 부리고 싶다는 마음에 한규호의 머그컵에는 조금 부족하게 커피를 담았다.
그리고 한규호에게 다가가 소파 테이블에 새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한규호의 시선이 처음으로 트레이시에게 향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하는 한규호의 눈이 웃고 있었다.
남편.
트레이시의 머리에 그 단어가 다시 떠올랐다.
휴일 오전, 여유를 즐기는 남편. 그 남편에게 커피를 건네주는 아내.
“뭐 보고 있어요?”
트레이시는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지우기 위해 한규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뉴스.”
한규호가 말했다.
“어떤 뉴스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실제로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 문장을 지우기 위한 의도였다.
“대선이 얼마 안 남았군.”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목을 돌려 스마트폰 화면을 트레이시에게 향했다.
화면에는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프랑크 보머 현 미국 대통령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클리블랜드네요.”
트레이시가 사진 하단의 기사를 읽으면서 말했다.
“클리블랜드는 중요하지. 오하이오의 그네가 이번에도 자기 쪽으로 움직여 주길 바랄 테니까.”
한규호가 말했다.
트레이시의 시선이 스마트폰에서 한규호에게로 옮겨졌다.
“……잘 알고 있네요.”
트레이시가 한규호를 보면서 말했다.
한규호는 그네(swing)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상식이니까.”
한규호가 답했다.
상식? 상식일까?
트레이시는 한규호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평균적인 미국인들이 스윙 스테이트라는 용어를 상식으로 알고 있다고 트레이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 제도를 통한 간선제로 진행되었다. 해당 주에서 승리한 후보에게 선거인단의 표 전부를 몰아주는 승자독식제, 소위 말하는 Winner takes all 시스템이었다.
승자독식제 시스템 아래에서는 얼마나 많은 득표수를 얻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주에서 승리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상대방 후보보다 더 많은 득표수를 얻었음에도, 선거인단에서 밀려 대통령에서 낙선한 사례가 미국 역사에서 이미 몇 번이나 있었다.
그렇기에, 미 대선 후보들은 선거인단을 확보하는 데, 다시 말해 특정 주에서 승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선거 전략을 세웠다. 경합 지역에 가용한 모든 총력을 쏟았다.
인구 보유 상위 11개 지역인 캘리포니아, 텍사스, 뉴욕, 플로리다, 일리노이,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미시건,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 뉴저지의 선거인단 총합이 270이었다. 그리고 270이라는 수는 전체 선거인단의 과반수를 넘는 숫자였다.
이 11개 주에서 승리를 가져가면 나머지 38개 주에서 패배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 11개 주 중에서 공화당 우세 지역인 텍사스와 조지아주, 민주당 우세지역인 뉴욕, 뉴저지, 일리노이, 캘리포니아를 제외한 오하이오, 미시건, 노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펜실베니아를 스윙 스테이트(경합주)라고 불렀다. 마치 그네처럼, 선거 때마다 공화당과 민주당 우세가 뒤바뀌는 지역이었다.
스윙 스테이트의 그네(Swing)가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백악관의 주인이 바뀌었다. 프랑크 보머 대통령도 지난 선거에서 오하이오와 플로리다, 펜실베니아에서 승리를 가져옴으로써 백악관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조금 전 한규호의 말, 대통령이 오하이오의 그네가 자기 쪽으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는 말 안에는 한규호가 미국 대선 시스템에 대해, 스윙 스테이트라는 용어에 대해, 경합주 중 하나인 오하이오주의 중요성에 대해, 그리고 지난 선거에서 오하이오 주가 프랑크 보머 현 대통령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해 한규호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미국 대통령 선거는 전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주요 이벤트였다. ‘스윙 스테이트’라는 용어는 정치 분석가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교육 수준을 갖추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산층 이상의 미국인이라면 알고 있는 용어였다.
하지만 그 용어를 모르는 미국인의 비율이 훨씬 더 높았다. 상당수의 미국인, 특히 교육 수준이 낮고, 정치 관심도가 낮은 저임금 계층은 그 단어의 존재 자체도 모를 것이다.
한규호는 미국인이 아니었다. 정치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서 한규호가 첩보 세계의 일원으로써 미 대선에 관심이 있고, 스윙 스테이트라는 용어를 상식 수준에서 알고 있다고 해도, 지난 선거에서 오하이오주의 표심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상식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상한 사람.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사람.
트레이시는 소파에 누워 있는 한규호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트레이시에게 한규호가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생각해? 당신네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까?”
트레이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고, 그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었다.
“아, 미안. 깜빡했군. 전 세계 모든 선거에 개입하는 CIA가 유일하게 관여하지 못하는 미국 선거인데.”
대답하지 못하는 트레이시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한규호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트레이시는 그 미소가 어쩐지 조금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규호는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뭐, 말은 못 해도 듣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당신네 대통령은 마음이 급한 것 같아. 지지율은 계속 떨어지고, 경합 지역에서는 분위기가 안 좋고,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지미 카터 이후 오랜만에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릴지도 모르겠어.”
한규호가 말했다.
“몰랐네요. 그렇게 우리 선거에 관심이 많은 줄은.”
트레이시가 말했다.
“뭐, 미국 대선은 단순히 미국인들만의 선거가 아니니까. 애이팩이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한규호의 말에 트레이시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에이팩(AIPAC : 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 위원회의 이름이 한규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의미죠?”
트레이시가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 질문에 한규호가 다시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이스라엘 애들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을 거란 이야기지.”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움직였다.
그 시선을 따라 트레이시도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 카멜리아의 방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