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32화 (332/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15)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 강화도 인화리 종점 교차로, 그곳에서 시작하는 왕복 2차선의 초라한 도로에는 48번 국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민간인 통제선을 빠져나온 48번 국도는 강화도 북부를 관통해 강화대교를 넘어 김포로 접어든다. 그리고 한강을 따라 김포 북부 지역을 가로질러 김포국제공항에 다다른다. 김포에서 서울 서남부로 이어지는 왕복 6차선의 도로에서 강화도 서북단에서 시작한 초라한 2차선 도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김포공항을 지나 목동을 관통한 48번 국도는 성산대교 남단에서 방향을 틀어 한강을 건너고 홍제천을 따라 계속 북동진을 하다 경의중앙선을 만나면서 동쪽으로 머리를 돌린다.

1년 365일 차량이 가득 들어차 있는 성산로, 연희 IC-연세대학교-세브란스 병원을 힘겹게 지난 48번 국도는 금화터널에 올라 마지막 숨을 고른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면서.

금화터널을 지나 독립문 사거리를 거쳐, 광화문 앞에 도착한 48번 국도는 마지막으로 남쪽을 향해 방향을 튼다.

그리고 2010년 광화문 광장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왕복 20차선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던 세종대로 교차로에서 장장 68km에 이르는 대장정을 끝낸다.

48번 국도의 종점인 세종대로는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도로였다. 아니, 서울을 넘어 한반도 내에서 가장 중요한 도로라고 할 수 있었다. 600년 전부터 그랬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새로 선 후, 2년이 지난 후인 1394년,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조선의 새 도읍으로 선포하고 천도를 단행한다. 그리고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길을 정비하고 그 길에 육조(六曹)거리라는 이름을 붙인다.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육조거리에 조선의 주요 정책을 집행하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가 자리를 잡았다. 조선의 가장 중요한 결정들이 이곳에서 시행되었다.

그로부터 6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거리의 위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가 위치한 세종대로는 지금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 논의되고 결정되는 장소였다.

물론 변한 것도 있었다. 포장된 도로, 고층건물, 그리고 600년 전 한성부에는 없었던 외교공관이 세종대로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세종대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중심으로 반경 2.5km 이내에 한국과 외교 관계를 맺은 대부분 나라의 대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연했다. 청와대가 있었고, 외교부가 위치한 정부서울청사가 세종대로에 인접해 있었다.

대한민국의 외교를 관장하는 외교부에서 남쪽으로 600m,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외교공관인 미국대사관에서 불과 400m 떨어져 있는 청계11빌딩. 그곳에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있었다.

***

새벽 6시.

아직 미명조차 떠오르지 않은 이른 시간, 청계11빌딩에서 유일하게 작동하는 엘리베이터가 18층에서 멈추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코카소이드 계열의 남자, 흔히 백인이라고 분류되는 특성을 가진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계 유대인인 아슈케나짐의 혈통을 가진 남자,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에 파견된 상무관(商務官)이라는 직함을 가진 남자는 무거운 표정으로 청계 11빌딩 18층에 위치한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들어갔다.

상무관이 대사관에 들어서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참사관(councilor)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참사관이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상무관은 인사 대신 질문을 꺼냈다.

“주무시나?”

“아닙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참사관이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참사관은 외교부 3급에 해당하는 직급이었다. 외교부에서 적어도 15년, 평균적으로 20년 이상 근무해야 오를 수 있는 직급이었고, 2급 대사의 부재 시 대사의 전권을 위임받는 자리였다.

그에 반해 상무관은 경제부 소속으로 대사관에 파견된 직함이었다. 대사관의 일을 돕기 위한 자리였지, 주축이라고 할 수는 없는 직함이었다.

참사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한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위치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참사관은 예의 있는 태도로 상무관을 대했고, 상무관은 그런 참사관에게 하대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상무부 상무관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저 남자의 진짜 정체는 이스라엘 3대 첩보기관 중 하나인 신 베트 대외협력사업국 부국장 중 한 명이었으니까.

신 베트 부국장의 직함을 가진 남자는 참사관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더 이상의 용무는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복도를 따라 걸어가 대사관 한쪽에 마련된 문을 두드렸다.

문에는 대사 집무실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들어오세요.”

문 너머에서 피곤함이 묻어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 베트 부국장의 직함을 가진 남자는 숨을 한 번 고르고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대사가 있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사는 소파에 비스듬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옷은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이 잔뜩 묻어 있었다.

신 베트 부국장의 직함을 가진 남자는 대사의 얼굴에 녹아든 피로를 이해했다.

요 몇 달간, 정확히 말하면 카멜리아가 한국에 있다는 것이 확인된 그날 이후, 주한 이스라엘 대사는 비상대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 전 컨테이너가 도착했습니다.”

신 베트 부국장의 직함을 가진 남자가 말했다.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신 베트에 대한 사람들의 착각 중 하나는 납치나 암살과 같은 액티브한 작전을 전부 모사드가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착각한 사람들은 신 베트는 정보 수집과 분석만을 담당한다는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신 베트도 무력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작전팀을 자체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작전팀 중 하나에 ‘화물(הוֹבָלָה:freight)’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화물’이라는 코드명이 붙어있는 신 베트 작전팀의 주 임무는 납치였다. 신 베트 본부에서 목표를 지정하면 화물팀이 날아가 목표를 납치해 이스라엘로 데려왔다. 그들이 한국에 온 이유는 누군가를 납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납치와 궤를 같이하는 임무, 구출이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납치 전문가는 구출 전문가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컨테이너가 도착했다. 카멜리아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팀이 한국에 입국했다는 의미였다.

“컨테이너는 장치장으로 이동 중이고, 봉인 씰(Seal) 제거 시기는 아직 미정입니다.”

신 베트 부국장의 직함을 가진 남자가 말했다.

장치장은 구출팀이 머물 임시 숙소, 봉인 씰 제거는 작전 개시를 의미했다.

대사는 구출팀이 어디에 머무는지, 언제 작전이 시행되는지 알지 못했다. 알아서도 안 되었다. 구출팀이 도착했다. 작전이 언제 시행될지 모른다. 그것이 대사가 알아야 할 전부였다.

이번 작전의 지휘권은 텔아비브에 있었고, 대사의 임무는 뒤처리를 하는 것이었다.

“188을 만나 봐야겠군요.”

대사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188.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88. 주한 미국대사관의 주소.

한국에서 작전을 진행하기 위해서 한국 정부의 승인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는 알려 줘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승인이 필요했다.

미국 대사를 만난다는 것은 승인을 얻기 위함은 아니었다. 예루살렘에서 직접 워싱턴 DC와 교감을 가졌다. 대사는 그저 외교부 나름대로의 채널을 가동하기 위해, 다시 말해 체면을 차리기 위해 미국 대사를 만나야 했다.

외교란 그런 것이었다.

그렇다고 대사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외교부는 나름대로 채널을 가동해야 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신 베트 부국장의 직함을 가진 남자가 작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듯, 몸을 돌려, 조금 전 그가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 버렸다.

대사는 그렇게 떠나가는 신 베트 부국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강렬한 흡연 욕구를 느꼈다. 동시에 무기력함도 느꼈다.

신 베트가 작전팀을 가동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대사가, 외교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대사는 작게 중얼거렸다. 일이 잘못된다면 그러한 통보를 받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대사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대사는 수면에 빠져드는 대신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카멜리아의 위치는 이미 파악해 놓고 있었다. 서울 남쪽의 위성도시, 자동차로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카멜리아가 있었다.

‘화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전팀이 한국에 들어온 이상, 카멜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요원을 구출하는 미래가 확정되었다.

문제는 어떻게 구출하느냐는 부분이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은밀하게 움직일까? 아니면, 흔적을 남겨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대놓고 움직일까?

그의 조국 이스라엘은, 특히 신 베트와 모사드는 흔적을 남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끔은 일부러 흔적을 남김으로써, 이스라엘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만약 이번에도 그렇게 행동한다면? 일부러 흔적을 남기려 한다면?

“은퇴해야 할지도. 아니…… 은퇴로 끝나면 다행이려나.”

대사는 작게 중얼거렸다.

한국 정부가 항의할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은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것이지만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신이 될 가능성이 컸다. 아니, 확실했다.

이스라엘 대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상에 놓인 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기분 나쁘게 미지근한 온도의 생수로 말라 버린 입술을 축였다.

***

트레이시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창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느꼈다.

감겨 있는 눈꺼풀 위에서도 충분히 알아챌 수 있는 아침햇살에서 트레이시는 이질감을 느꼈다.

강했다. 그녀가 항상 아침에 느끼던 햇살보다 강했다.

트레이시는 눈을 떴다. 그리고 머리맡에 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4분. 평소 기상 시간보다 4시간이 더 지나 있었다.

트레이시는 항상 일찍 일어났다. 보통 아침 6시, 늦어도 6시 30분을 넘기지 않았다. 그녀는 출근할 필요가 없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야 하는 마지노선이 없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대학을 다닐 때부터 몸에 익은 습관이었다. 일찍 일어나 남들보다 오전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싶었다. 공부, 때로는 운동, 아니면 독서. 무엇이 되었든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런 그녀가 오전 10시가 넘는 시간까지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드문 일이었다. 트레이시에게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 남자 때문이야.

트레이시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규호 때문에 잠을 설쳤다.

몇 달 동안을 이곳에 처박아 두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도 없던 남자가 어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 서용석이 한국에 있고, 그 사실을 CIA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알려 주었다고 말했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트레이시가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눈빛, 마음속 깊은 곳, 심연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빛, 트레이시가 싫어하는 그 눈빛을 다시 보여 주었다.

트레이시는 억울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이곳에서 하루하루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그의 부탁 때문에.

그런데도 한규호는 다시 그 눈빛을 보여 주었다.

그게 억울했고 화가 났다.

덕분에 잠을 설쳤고, 때문에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야 말았다.

커피나 마셔야겠어.

트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남자 때문이다.

몸을 일으키며 다시 한번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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