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11)
***
신시아 챔버는 시애틀 외곽 머다이나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에 있었다. 그녀는 서재에서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11시를 넘어,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신시아 챔버는 샤워는커녕 옷도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다.
검토해야 할 서류가 너무 많았다.
EDT(Eastern Daylight Time : 미 동부 표준시) 기준으로 새벽 5시까지 확인해 줘야 하는 서류였다. 그 말은 시애틀에 있는 신시아 챔버에게는 3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진짜…… 해도 해도 끝이 없네.”
신시아 챔버는 서류를 넘기면서 투덜거렸다.
일이 너무 많았다. 특히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 관련 업무가 너무 많았다. 아시아 지사를 설립하면서 보안프로토콜을 새로 다 만들어야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프로토콜을 끊임없이 수정해야 했다.
그렇다고 CIA의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보험사보다 서류 작업은 적었지만, 출장이 문제였다.
CIA 관련 출장을 다녀오면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의 업무가 잔뜩 쌓여 있었고, 그 업무를 처리하면 CIA의 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정리해야지. 진짜, 하나는 꼭 정리해 버려야지.”
신시아 챔버는 서류에 거칠게 사인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둘 중 하나를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둘 다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본업인 CIA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정리한다면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의 보안감사 부문 부사장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CIA는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CIA가 운영하는 위장 기업 중에서 CIA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매출을 증대시키고 영업이익을 창출하는 몇 안 되는 회사가 바로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였다.
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만큼 위장이 잘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CIA는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를 롤모델로 산하 위장 기업들을 재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기에,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를 지금의 자리까지 끌어올린 공신 중 한 사람인 신시아 챔버가 회사를 떠나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서류의 절반 정도를 검토한 신시아 챔버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눈이 아팠다. 조금이라도 눈을 쉬게 해 주고 싶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힌 채, 양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문지르는 신시아 챔버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신시아 챔버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눈을 문질렀던 탓인지, 단번에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흐릿한 시야였지만, 서재 문 옆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니야. 괜찮아. 잠깐 눈이 뻑뻑해서.”
신시아 챔버는 그렇게 말하고, 초점을 맞췄다.
그녀의 딸 앤 챔버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 챔버가의 막내딸 마리아 챔버가 앤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어머, 마리아. 지금 몇 신데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
마리아를 확인한 신시아 챔버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신시아의 움직임에, 마리아는 앤의 다리 뒤로 몸을 숨겼다. 혼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잠들었다가 깼어요.”
앤이 대신 답했다.
신시아는 어떤 상황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악몽을 꿨을 것이다.
“저런, 우리 공주님. 자다가 깼어요?”
신시아 챔버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마리아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두 팔을 벌렸다.
혼나리라 생각했던 마리아는 신시아 챔버의 다정다감한 얼굴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신시아에게 다가와 품에 안겼다.
신시아는 그런 마리아를 꼭 안아 주었다.
챔버가의 막내딸 마리아는 아직 베네수엘라에서 살던 일곱 살 베르나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앤과는 달랐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기억을 봉인했던 앤과는 달리, 마리아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신과 치료를 통해 많이 호전되기는 했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악몽은 피할 수가 없었다.
신시아의 품에 안긴 마리아의 작은 몸이 작게 떨고 있었다. 신시아는 그런 마리아의 작은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따뜻한 우유를 줄까 하고요.”
앤이 서로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유만?”
신시아 챔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유에 오레오가 없으면 너무 잔인하지 않을까요?”
“늦은 밤에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
신시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애들은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야 한다면서요?”
앤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앤이 마리아의 나이였을 때, 신시아가 해 준 말이었다.
“조금만 줄게요.”
앤이 말했다.
그녀의 보호자는 달기만 한 그 과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세 개. 그 이상은 안 돼.”
신시아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가 허락했다. 꽈자 먹으러 갈까요?”
앤은 그렇게 말하며 마리아를 안아 들었다.
“치카치카 꼭 해야 해!”
신시아는 그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마리아는 오레오를 먹을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인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시아는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규가 있었다면 완벽할 텐데.
규, 지금은 마리. H. 스완슨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 아시아 법인 보안감사부문 과장.
그녀가 보고 싶었다. 앤과 마리아, 그리고 규가 함께 미소 짓는 장면이 보고 싶었다.
다시 미국으로 불러와야겠어.
신시아 챔버는 규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다시 불러들여서 2년 정도 일을 가르치고 이사로 발령을 내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자, 신시아의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규를 미국에 다시 불러들임으로써 신시아에게 집중된 과중한 업무를 그녀와 나눌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이곳 챔버가 저택으로 돌아옴으로써 챔버가의 마지막 조각이 채워지게 된다. 그야말로 일석이조(Kill two birds with one stone)였다.
그런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웃던 신시아 챔버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기프티드 스튜. 한규호. 갑자기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 다른 조각. 이미 직소 퍼즐을 완벽하게 맞춰 버렸는데, 남아 버린 조각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홍콩에서 그와 저녁을 먹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행동했고, 센스 있게 대답했다. 즐거운 자리였다. 무엇보다 규가 행복해했다.
챔버가에 한규호의 퍼즐 조각은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규에게는 한규호라는 퍼즐 조각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신시아 챔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챔버가에 또 다른 퍼즐 조각을 욱여넣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Son in law(사위)’라는 퍼즐 조각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책상에 올려 둔 그녀의 전화기가 울렸다.
신시아 챔버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전화기에 뜬 번호를 확인했다.
+82로 시작하는 한국 전화번호, CIA 요원 트레이시 테일러의 번호였다.
***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고 있는 신시아 챔버의 머리에 속담 하나가 떠올랐다.
‘Speak of the devil, and he is sure to appear.’
악마에 대해 말하면, 악마가 나타난다.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한규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트레이시 요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규호가 한국에, 정확히 말하면 트레이시와 카멜리아의 숙소를 아무런 말 없이 찾아왔고,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 서용석에 대해 말해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서용석이 한국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누가 말해 준 거지?”
신시아 챔버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가 아닌 것은 확실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확실한 거야? 그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입국 심사를 받는 사진을 봤다고 했어요.
사진? 사진을 보았다고?
신시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 사실을 알려 준 자가 사진도 건네주었겠군.”
-그런 것 같아요.
입국 심사를 받는 사진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는 사진을 건네준 누군가가 공항 보안 영역에 접근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역량을 가진 단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서용석의 뒤를 봐주고 있는 누군가가 우리라고 의심하고 있겠네.”
-가능성 중 하나라고 했어요.
“충분히 의심할 만하지.”
신시아가 말했다.
-우리가 서용석을 관리하고 있나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모르겠어. 내가 아는 한 아니야. 하지만 확실히 노라고는 대답 못 하겠네.”
신시아 챔버는 한규호가 그 이름을 꺼내기 전까지, 서용석이라는 남자의 존재도 알지 못했다.
한규호가 서용석에 대한 정보를 원했고, CIA가 서용석을 추적했고, 서용석이 방콕으로 갔다는 사실을 보고 받았다. 트레이시가 아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신시아 챔버는 기프티드 전담 요원이었다. 그 말은 CIA 내에서도 상당한 정보 열람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정보 열람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CIA가 진행하는 모든 사업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일단 국장님께 보고하는 수밖에 없겠네. 바로 전화를 해야겠네.”
신시아 챔버는 그렇게 말하며 시계를 보았다.
시계의 시침이 12라는 숫자에 거의 접근해 있었다.
시애틀에서 자정이면 랭리는 새벽 3시였다.
상사에게 전화하기에 그리 좋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신시아 챔버와 밀러 국장은 단순한 직장 상사·부하 사이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기프티드 관련 사안은 최우선 보고 사항이었다.
-저도 좀 알아볼까요?
“아니. 일단 그 남자를 감시해 줘. 특이 사항이 있으면 바로 말해 주고. 혹시 그 남자 숙소를 어디로 잡았는지 알아?”
신시아가 물었다.
-여기서 지내겠다고 했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거기서 지낸다고 했다고?”
-네. 신세를 지겠다고 했어요.
“거기…… 빈방이 있어?”
-아니요. 없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어디에서 자겠다는 이야기지?”
-그 이야기는 안 해 줬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위험해.
신시아의 본능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홍콩에서 그와 같이했던 저녁 식사를 떠올렸다.
***
규와 홍콩의 유명한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던 그 날, 신시아는 한규호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느꼈다. 그래서 그가 홍콩을 떠나기 전, 한 번 더 이런 자리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도 그러고 싶군요. 다음에는 제가 모시도록 하게 해 주신다면.
한규호의 대답이었다.
그 대답을 들은 신시아 챔버는 한규호에게서 호감을 느꼈다. 그의 말, 어투, 표정에서 진심을 느꼈다. 가식적인 대답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에 한규호에게서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에게서 느껴지는 호감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미스터 한은 너무 말을 잘한다. 말 잘하는 남자는 바람둥이일 가능성이 있는데.
반 농담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반 농담이라는 것은 반은 진심이라는 이야기였다.
규는 확실히 한규호를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만약 규가 자신의 목숨과 한규호의 목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다면 그녀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녀의 또 다른 딸인 앤도 마찬가지였다.
앤이 한규호를 남자로서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채무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만약 한규호가 앤에게 어떤 부탁을 한다면, 앤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트레이시는 어떨까?
신시아는 트레이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커뮤니케이션은 기프티트 전담 요원으로서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트레이시가 단순히 업무적인 관점으로만 한규호를 상대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트레이시는 아직 어렸고, 한규호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녀도 채무감을 가지고 있을까?
CIA가 트레이시를 선택한 이유는 일종의 미인계 응용이었다. 그녀를 이용해 한규호를 미국의 품에 끌어안으려는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한규호가 그녀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녀를 이용하려 한다면?
한규호는 왜 그곳에 나타난 것일까? 왜 그곳에서 머물겠다고 한 것일까? 트레이시를 이용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지?”
신시아가 물었다.
-나갔어요. 음식 재료를 사 온다고.
“음식 재료?”
신시아 챔버가 되물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네.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오늘 저녁은 자기가 하겠다고 했어요.
신시아 챔버의 머리에 두 번째 경고등이 울렸다.
“일단 알았어. 국장님께 보고할 테니, 대기하고 있어 줘. 언제 전화가 갈지 모르니 전화기 항상 들고 있고.”
신시아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신시아는 잠시 동안 끊어진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들, 동부 시간으로 5시, 시애틀 시각으로 새벽 2시까지 검토해야 하는 서류는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신시아의 본업은 CIA 요원이었다. 그것도 기프티드를 전담하는 요원이었다. 지금은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신시아는 시계를 보았다.
시침이 자정을 넘어 버렸다. 랭리는 새벽 3시.
신시아는 키패드를 열고, 전화번호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