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26화 (326/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9)

***

트레이시는 아무런 말 없이 한규호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서용석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규호는 서용석이 언제 한국에 들어왔는지,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다.

한규호 담당 요원인 트레이시도 서용석의 이동 경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신시아 챔버로부터 베네수엘라에 있던 서용석이 국경을 넘었고, 여러 나라를 경유해 방콕에 들어갔다는 내용을 고지 받았다.

하지만, 서용석이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지금 한규호에게서 처음 듣게 된 것이다.

놀란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던 트레이시의 입이 열렸다.

“확실한가요? 정말 그자가…….”

트레이시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동거인이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거인, 카멜리아가 기거하는 방이었다.

***

카멜리아라는 코드명을 가진 트레이시의 동거인은 문 가까이에 서 있기는 했지만, 트레이시의 생각과는 달리 방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무감정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문에 귀를 가져다 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방문 밖, 거실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을 때, 카멜리아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모든 신경을 집중했었다.

두 사람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뜨문뜨문 단어 몇 개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그 단어들을 조합해 의미 있는 문장을 만들어 낼 수도 없었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 카멜리아는 문에서 물러났고,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감정은 드러나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동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심장은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카멜리아는 몇 시간 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 남자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몇 시간 전을.

거실에서 창밖의 공원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카멜리아는 누군가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들었다.

카멜리아는 당연히 동거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달을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지만, 아직 이름도 모르는 CIA의 여자 요원. 그녀 말고는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를 사람이 없었다.

최근에는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외부 사람들이 가끔 찾아왔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한국 내 CIA 관계자이거나, 한국 국정원 관계자로 추측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동거인이 찾아오지 말라고 요청을 했는지, 아니면,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카멜리아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방문객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카멜리아의 동거인은 음식 배달을 자주 시켰고, 최근에 이 집을 찾아오는 유일한 방문객은 음식 배달원들뿐이었다.

하지만 배달원들은 벨을 눌렀지,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는다.

누군가 비밀번호를 눌렀다면, 그녀의 동거인밖에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야겠군.

카멜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 ‘그’가 서 있었다.

***

트레이시는 카멜리아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방문은 닫혀 있었지만, 방음 처리가 된 문이 아니었다. 한규호의 목소리는 그리 작지 않았다. 한규호의 말소리가 방문 틈을 타고 흘러 들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방문 너머의 동거인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들리지 않았을까? 그녀는 방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트레이시는 동거인의 방문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트레이시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한규호는 걱정 같은 것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눈빛으로 트레이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자, 트레이시는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녀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심은 했지만, 트레이시는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정말 그자가 한국에 들어온 것이 맞나요?”

그렇게 말한 트레이시는 바로 후회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한규호의 눈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날 믿지 못하나?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진.”

한규호가 말했다.

“인천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받고 있는 사진을 봤지.”

한규호가 말했다.

“미안해요. 못 믿는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그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트레이시가 사과했다.

그의 눈이 조금 누그러졌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트레이시였다.

“그…… 사실을 누가 알려 준 거죠? 우리 쪽인가요?”

한규호는 고개를 저었다. CIA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트레이시는 그가 말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그자의 뒤를 봐주고 있네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봐주는 누군가가 우리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가능성 중 하나.”

한규호가 말했다.

서용석의 뒤를 봐주는 누군가가 CIA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트레이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규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음모론자들의 주장처럼 CIA가 세상의 모든 음모와 공작을 다 꾸미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인들의 생각보다 더 많은 음모와 공작이 CIA에 의해 만들어졌고, 실행되었다.

CIA 요원인 트레이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조금 전, 서용석이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트레이시는 밀러 국장이 배후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내가 아는 것은 없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그 말에 한규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트레이시의 눈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믿어 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로 아는 것이 없어요.”

트레이시가 다시 말했다.

“그래.”

한규호도 알고 있었다.

설사 CIA가 이 일을 꾸몄다고 해도, 트레이시는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녀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한규호에게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한규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살아 있다면 우리가 찾아낸다. 죽었다면 시체라도 찾아낸다, 우리가 못 찾으면 아무도 못 찾아.”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죠?

그런 표정으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당신네 국장이 나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지.”

트레이시의 얼굴에 이해한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밀러 국장이 어떤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을지 알 것 같았다.

“CIA가 서용석을 데리고 장난질을 쳤는지 아닌지는 일단 미뤄 두자고. 아니, CIA의 장난이 아니라고 가정해 보지. 그렇게 가정한다면, 의문이 하나 생기지. 다른 누군가가 서용석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랭리는 몰랐을까? 알아내지 못했을까?”

한규호가 트레이시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한규호의 눈. 진실을 날카롭게 파고들 때 보여 주는 그의 눈이 트레이시의 눈동자를 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트레이시도 그런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면, 왜 숨겼을까?”

매서운 눈으로 트레이시를 바라보며 한규호가 물었다.

***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그 매서운 눈이 싫었다. 정확히는 그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그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을까?

한규호가 언제나 지금과 같은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트레이시는 다양한 한규호의 눈을 보았다.

처음 만나던 날, 이탈리아로 가는 걸프스트림 안에서 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큰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동행인에 대한 호기심, 비행기 승무원에 대한 작은 호기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미얀마의 작은 어촌마을 탄치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한규호는 처음으로 무서운 눈을 보여 주었다. 지금 보여 주는 눈보다 훨씬 더 무서운 눈이었다.

-저 여자가 죽으면 당신도 죽어.

그렇게 말하면서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트레이시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눈에서 공포를 느꼈다.

일본에서는 다정함이 담긴 눈을 보았다. 브랜든 허드슨으로서, 남편으로서,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연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 눈이 싫지 않았다. 그 다정한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아카사카에 있는 주일 미국대사관에서 깨어났을 때도, 그의 다정한 눈빛을 보았다. 걱정과 다정함이 담겨 있는 눈이었다. 브랜든 허드슨이 보여 주던 거짓 다정함과 구분할 수 있는 진짜 다정한 눈빛이었다.

그날부터였다.

트레이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가짜 남편 브랜든 허드슨이 아닌, 한규호의 진짜 눈빛을 본 그날 이후,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매서운 눈이 싫었다. 매서운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

“내가 아는 것은 없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한규호의 질문과 관련해 그녀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한규호가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트레이시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매서움이 사라졌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야.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거실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거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트레이시는 역광에 의해 어둡게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유 모를 서글픔을 느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다시 이런 상황이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망이 나쁘지 않군.”

창밖으로 펼쳐진 낙생대 공원을 바라보며 한규호가 말했다.

“국정원?”

여전히 창밖을 시선에 두고 있는 한규호가 물었다.

“뭐가 말이죠?”

트레이시가 말했다. 목소리에 섭섭함의 잔상이 묻어 있었다.

“이 집. 국정원이 구해 준 거겠지?”

한규호가 물었다.

“……아마도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한규호는 창밖에 펼쳐진 콘크리트 숲속 공원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그가 만나 왔던 국정원 요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중에서 곽용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이 집을 봤다면 분명 투덜거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원 활동비나 더 두둑하게 줄 것이지. 그런 뉘앙스로 투덜거렸을 것이다.

“좋은 집이군. 방이 두 개뿐이라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한규호가 말했다.

트레이시는 또다시 한규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방이 두 개뿐이라 아쉽다고?

“뭐. 어찌 되었건, 당분간 잘 부탁해.”

다시 한규호가 말했다.

그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당분간 잘 부탁한다고?

“그게 무슨 말이죠?”

트레이시가 물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한규호의 시선이 트레이시를 향했다.

“집주인이 국정원이라면 따로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실거주자에게는 양해를 구해야 하지 않겠어?”

한규호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양해를 구한다고요?”

“당분간 신세를 좀 질게. 특별히 신경 쓸 것 없어. 아,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오늘 저녁은 내가 준비하도록 하지.”

한규호가 말했다.

그의 눈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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