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25화 (325/386)

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8)

판교 백현동에 있는 백현 허브 오피스텔은 소위 말하는 ‘초역세권’ 오피스텔은 아니었다.

거리로만 본다면 신분당선 판교역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에 불과했지만, 소위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위치한 다른 오피스텔에 비하면 백현 허브 오피스텔은 말 그대로 초역세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백현 허브 오피스텔이 인기 없는 오피스텔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백현 허브 오피스텔만이 가지고 있는 경쟁력으로, 상대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세 개 건물, 2000실이 넘어가는 대단지 오피스텔답게 다양한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가구당 2대 이상 허용될 정도로 주차 공간도 넓었다. 길 하나만 건너면 대형 백화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고속도로 접근성도 좋았다. 판교나들목까지의 거리는 단 2km, 주차장을 나와 단 세 번의 좌회전만으로 바로 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백현 허브 오피스텔 입주민들이 자랑하는 가장 큰 장점은 오피스텔 바로 배후에 위치한 낙생대공원이었다. 콘크리트 숲인 계획도시 판교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는 작은 공기정화기를 배후에 두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거기에 윤중천과 탄천도 그리 멀지 않았다.

이러한 장점 덕분에, 백현 허브 오피스텔은 인근의 다른 오피스텔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대료와 낮은 공실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설이 좋은 만큼 관리비가 높았다. 웬만한 소형 오피스텔의 임대료에 육박할 정도였다.

그러하기에 상대적으로 높은 임대료와 더 높은 관리비를 감당할 수 있는 직업군의 사람들이 입주해 있었다. 쉽게 말해, 일반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이 오피스텔 최상층에 사는 두 사람의 직업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정보기관 요원, 그것도 미국과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요원이 두 사람의 직업이었다.

***

백화점 식품관 쇼핑 봉투를 든 여자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젊은 여자, 염색으로는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적인 금발 머리를 가진 미인이었다.

거주민들의 연령대가 낮고,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판교에서도 그녀의 존재감은 확실했다. 청바지에 심플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쇼핑 봉투를 들고 있는 모습은 마치 백화점 모델처럼 자연스러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심한 대단지 오피스텔이라고 해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힐끗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백인 여자, CIA 요원 트레이시 테일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꾸 살이 붙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몇 달째 오피스텔 안에서만 머물고 있었다. 출퇴근도, 일상적인 업무도, 누구를 만날 일도 없었다.

조금씩 체중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홈 트레이닝을 하고는 있지만, 그래 봤자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오피스텔이라는 공간 안에서 활동량은 제한되어 있었다.

음식도 문제였다. 정확히 말하면 배달 주문 애플리케이션이 문제였다.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면 집까지 음식이 배달되었다. 배달 음식의 종류도 다양했고, 맛있었다.

짜고, 달고 자극적인 한국 음식. 무엇보다 엄청난 베리에이션을 가진 그 망할 놈의 치킨이 유독 문제였다.

오늘 아침 오랜만에 체중계에 올라갔던 트레이시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직접 백화점 식품관을 찾아가, 샐러드용 채소 몇 가지를 사 들고 들어오는 길이였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트레이시는 손에 든 봉투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 남자의 부탁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카멜리아라는 코드명을 가진 여자, 이스라엘 요원으로 추정되는 여자를 ‘감시’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처음 한 달 동안은 그 남자의 부탁에 따라 그녀를 ‘감시’했다. 교도소의 교도관처럼,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혹여나 그녀가 도망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밤마다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곤 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트레이시는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이시뿐이었다.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있는 사람은 트레이시가 유일했다.

지금의 숙소를 마련한 국정원은 인력 지원을 해 주지 않았다. 상주하는 요원도 없었고, 문 앞을 지키는 요원도 없었다. 그저,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고 요청하면 구해다 줄 뿐이었다.

CIA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트레이시 테일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아무런 지시도, 연락도 없었다.

감시 대상자인 카멜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카멜리아는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뻔뻔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도망갈 의지도 없는지, 트레이시가 자리를 비워도, 그녀는 오피스텔을 벗어나지 않았다.

카멜리아의 얼굴을 떠올린 트레이시의 얼굴에 약한 주름이 졌다.

기분 나쁜 여자였다.

기분 나쁜 것으로 치면 무엇보다 그 남자. 한규호가 제일이었다.

그녀를 한국에 처박아 놓은 한규호. 일본에서 해어진 이후,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얼굴은커녕,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게 제일 화가 났다.

요즈음 트레이시의 일과 중 하나는 그 남자를 다시 만났을 때, 뭐라고 쏘아붙이는 것이 좋을지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아주 많았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트레이시는 현관문을 열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고, 현관문에서 이어진 좁은 복도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답답함. 좁은 복도를 볼 때마다 트레이시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침실 두 개에 거실 하나, 두 사람이 살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녀가 미국 남부 시골의 마당이 넓은 주택에서 성장한 미국인이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좁은 집은 익숙했다. 대학 시절 좁은 기숙사와 하숙집은 지금까지도 포근함이라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CIA 요원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집은 좁았다. 언제 어디로 이동할지 모르는 그녀에게 큰 집은 필요 없었다. 일본에 있을 때, 그녀가 살던 집은 지금 오피스텔의 3분의 2 크기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지금 이 집에서 그 어느 집보다 더 답답함을 느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신발을 벗은 트레이시는 백화점에서 사 온 채소를 손질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앞에는 그녀의 동거인이 서 있었다. 물을 마시려는 지, 한 손에 컵을 들고 있었다.

트레이시의 동거인, 카멜리아라는 이름의 여자는 트레이시를 힐끗 보고는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저 여자도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가장 큰 요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했다.

두 사람은 한 지붕 밑에서 몇 달을 같이 보냈지만, 그 몇 달 동안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열 마디가 채 넘지 않았다.

카멜리아는 전적으로 트레이시를 무시했다. 마치, 투명인간인 것처럼 그녀를 무시했다.

트레이시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당연히 화가 났다. 친구 사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었다.

참 나,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트레이시는 식료품 봉투를 식탁에 소리 나게 올려놓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신경 쓰지 말자. 나만 힘들지.

트레이시는 그렇게 마음을 달래며, 쇼핑 봉투에서 채소를 하나씩 꺼냈다.

냉장고에 넣기 전에 손질을 해 두고 싶었다. 닦고, 썰어 두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의 없는 동거인이 싱크대를 비워 줘야 했다.

트레이시는 어서 빨리 비키라는 눈빛으로 카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카멜리아는 트레이시가 그런 눈으로 바라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컵에 든 물을 천천히 세 번에 걸쳐 마시고는 컵을 씻기까지 했다.

차라리 도망갔으면 좋겠다.

트레이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녀가 도망을 치려 한다면, 다시 잡아들인다는 명분으로 그녀의 허벅지에 로우킥을 먹여 줄 수 있을 텐데. 얼굴에 오른손 스트레이트도 괜찮고.

트레이시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설거지를 마친 카멜리아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트레이시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손님.”

오랜만에 들어 보는 카멜리아의 목소리였다. 적어도 한 달 이상.

트레이시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당황했다.

카멜리아가 말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해서 당황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때문이기도 했지만, 트레이시를 당황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은 카멜리아가 말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녀가 한 말의 내용이었다.

‘손님’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다. 단어의 의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손님? 그게 무슨 말이지?

트레이시는 카멜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멜리아의 시선이 거실을 향해 있었다.

트레이시는 카멜리아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마저 돌렸다.

거실 구석, 현관에서 바로 부엌으로 직행했을 때, 사각지대가 되는 거실 구석에 한 남자가 있었다.

소파에 앉은 한규호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카멜리아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거실에는 한규호와 트레이시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트레이시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이곳에 유배시킨 것에 대한 원망,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이 혼재되어 있었다.

“사이 좋아 보이는데?”

그런 그녀에게 한규호가 말했다.

“……뭐라고요?”

한규호의 말에 트레이시가 발끈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한규호는 트레이시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모르는지, 웃음 띤 얼굴로 트레이시를 바라보고 있었고, 트레이시는 그런 한규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무서운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얼굴을 보게 되면 한바탕 쏘아붙이고 싶었는데, 조금 전 짜증 나는 농담 한 마디에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자 분노보다 반가움이 더 컸다. 반가움이 더 크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트레이시는 자신이 느끼는 최대한의 분노를 담아서 말했다.

“갑자기 어쩐 일이죠?”

트레이시는 후회했다. 생각보다 분노가 담기지 않았다.

“그냥.”

한규호가 말했다.

“그냥?”

트레이시가 되물었다.

“잘 있나 싶어서.”

한규호가 다시 밉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트레이시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를 이곳에 반 감금한 것이나 다름없는 장본인이 마치 친구 집에 놀러라도 온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말투로.

그의 말이 어이없었다. 그리고 기뻤다.

“많이 힘들었나 본데.”

한규호는 어이없어 하는 트레이시의 표정을 보면서 말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미안.”

한규호가 사과했다.

한규호의 사과에 트레이시의 말이 멈추었다.

몇 달 동안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분노가 자꾸 사그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분했다.

마음 같아서는 마구 쏘아붙이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그의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먹여 주고 싶었다.

아니, 조금 전, 농담 같은 도발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바로 상대방 턱에 오른손 훅을 날렸을 것이다. 그런데 한규호의 도발 같은 농담이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아주 조금 전의 기억인데, 벌써 희석되려 하고 있었다.

“단지 그뿐?”

트레이시는 다시 분노의 기운을 담아 한규호에게 말했다.

“서용석이 한국에 들어왔어.”

한규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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