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7)
얀 베르그만(Jan Bergmann).
벌지 브래킷(Bulge Bracket, 자본 규모가 큰 세계구급 투자은행) 크레디트 에우로파(Credit Europa)의 소유주. 베르그만 가문의 가주, 그리고 북한에 핵 개발을 위한 원심분리기를 제공한 1호 손님.
여자는 그 얀 베르그만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용석은 놀라지 않았다.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찾아올 것이라고. 찾아온 누군가가 얀 베르그만의 사람일 것이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용석은 놀라지 않았다.
얀 베르그만이라는 존재에 비하면 갑작스러운 손님 같은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자는 여러 발의 총알을 맞았다. 칼도 맞았다. 그런데도 살아남았다.
단순히 살아남은 것에 그치지 않았다. 며칠 만에 몸을 일으켰고, 유럽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앉으시오.”
서용석이 식탁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다음 서용석이 지정한 의자에 가서 조신하게 앉았다.
“찾아온 목적은?”
서용석이 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의 주인께서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서용석은 여자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찾아온 목적은?”
서용석이 다시 물었다.
여자의 주인이라는 얀 베르그만이라는 사람과 서용석은 아는 사이라고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도움이 필요한지 여쭈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
서용석이 물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여자가 말했다. 마치, 램프의 지니처럼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원하는 모든 것?”
“그렇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일부러 젊은 여자를 보냈군.
서용석은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미인이었고, 몸매가 은근하게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화려한 버섯에는 독이 있지.
서용석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여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여자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속옷 한 장만 입은 서용석의 손이 얼굴로 다가오고 있음에도 여자의 눈에는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용석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본 적 있는 눈이었다.
535를 이끌던 시절,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당에서 술과 여자를 내려주었다.
그때 여자들과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다. 감정 없는 눈.
손가락이 여자의 뺨에 닿았다.
서용석은 손아귀에 힘을 주어, 그녀의 두 뺨을 강하게 틀어잡았다. 손가락이 그녀의 홍조 띤 뺨을 파고들었다.
“무슨 수작이지?”
서용석이 낮게 말했다.
“저는 주인님의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입을 잡힌 여자가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말했다.
서용석은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동자에서 감정을 읽었다. 공포가 아닌 불쾌감이 여자의 눈동자에 일렁거렸다.
이런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은,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상대하기 어려웠다.
마치 서용석 자신처럼.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서용석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서용석이 물었다.
처음으로 여자의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여자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 ‘주인’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서용석이 다시 물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여자가 말했다.
서용석은 여자의 얼굴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여자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물어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서용석이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제야 여자의 눈동자에 감정이 떠올랐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
여자는 얼굴에 댄 전화기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들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서용석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흥미롭군.
서용석은 전화를 받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옷만 입은 남자가 다가갈 때도, 강한 힘으로 두 뺨을 틀어 잡혔을 때도 여자는 전혀 감정적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눈동자에 두려움을 띠고 있었다.
익숙한 눈, 익숙한 두려움이었다.
확실히 알겠군.
서용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왜 그녀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었는지, 지금 그녀 눈에 깃든 두려움이 왜 익숙한지를.
뼈에 각인된 맹목적인 충성.
서용석은 그녀에게서 주인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 느껴졌다. 마치 서용석 조국의 인민들처럼.
지금 그녀의 눈에 떠오른 두려움이 익숙했다. 최고지도자가 현장 지도를 하러 갔을 때, 인민들이 보여 주던 눈빛이었다.
혹시나 실수하지 않을까? 혹시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그런 두려움이 깃든 눈빛이었다.
그랬군.
그녀의 눈에 깃들어 있는 두려움의 원천은 공포가 아니었다. 종교적인 경외감, 그녀가 믿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 그녀의 눈에 떠오른 두려움의 원천이었다.
서용석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전화기 너머의 상대와 통화하던 여자가 얼굴에서 전화기를 떼어 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서용석에게 건네주었다.
“받으시죠.”
여자가 말했다.
그러나 서용석은 그 전화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여자의 눈을 계속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서용석이 전화를 받지 않자, 여자의 눈에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당황스러움은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확실하군.
서용석은 분노로 바뀌어 가는 여자의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서용석이 전화기 너머의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것에 여자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 두 눈이 ‘감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용석은 이대로 계속 기다리게 만들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서용석은 전화를 건네받았다. 그런 충동보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가 가진 속셈이 궁금했다.
“말하시오.”
전화기를 얼굴로 가져간 서용석이 말했다.
맞은편의 앉은 여자의 표정에서 분노가 짙어졌다. 서용석의 ‘하오체’ 말투가 그녀를 자극했다.
-오랜만이군.
전화기 너머에서 장년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용석은 그 목소리에서 한 장면을 떠올렸다.
두꺼운 모직 코트를 펄럭이며, 레펠용 로프를 타고 헬리콥터에서 강하하던 얀 베르그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군.”
서용석이 말했다.
상대방이 반말하는데, 그가 존대할 이유가 없었다. 얀 베르그만은 서용석의 상관도 아니었고, 지금은 1호 손님도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궁금한가?
얀 베르그만이 물었다.
“뭘 원하지?”
서용석이 되물었다.
-나는 그대에게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얀 베르그만이 말했다.
그 말에서 서용석은 불쾌감을 느꼈다.
말투도, ‘그대’라는 호칭도 기분이 나빴지만, 무엇보다도 서용석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기분 나빴다.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기분 나빴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나를 왜 돕겠다는 것이지?”
서용석이 물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군. 작은 유희라고 해 두지.
서용석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지금 그가 느끼는 분노를 어떠한 식으로 표출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서용석이 터져 나오는 분노를 안으로 갈무리하고 물었다.
-그래.
“당신 목숨도 그 모든 것에 포함되나?”
서용석은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여자가 분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행동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여자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기존에 보여 주었던 분노에 더 이상의 분노를 더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에서도 분노의 징후가 들려오지 않았다. 분노는커녕, 낮고 진득한 웃음소리였다.
-재미있군. 그래. 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을 거둬 가 보게.
얀 베르그만이 말했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해 보라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서용석은 다시 그날을 떠올렸다.
수발의 총알이 가슴에 박히는 데도, 그저 잠깐 휘청거릴 뿐, 계속 걸음을 걷던 얀 베르그만의 모습을.
-그것뿐인가? 원하는 것은 내 목숨뿐?
전화기를 통해 흘러 들어온 얀 베르그만의 목소리가 서용석을 다시 현실로 끌고 왔다.
“그놈을 찾을 수 있나?”
서용석이 물었다.
-그를 원하나?
얀 베르그만이 말했다.
서용석이 ‘그놈’이라고 표현했지만, 얀 베르그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 찾을 수 있나?”
서용석이 다시 물었다.
-복수가 하고 싶은가?
얀 베르그만이 물었다.
“찾을 수 있나?”
서용석이 세 번째로 같은 질문을 했다.
다시 전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서용석은 얀 베르그만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얀 베르그만은 서용석에게 한국으로 갈 것을 제안했다. 한국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를, 한규호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다.
서용석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먼저 떠나 버린 부하들의 목숨값을 받아 내기 위해, 조국을 등지기로 결정했다.
맞은편에 앉아서 분노에 찬 눈빛으로 서용석을 바라보던 여자는 떠났다가 사흘 후에 일본계 브라질인의 위조 여권을 들고 다시 찾아왔고, 서용석은 그녀의 안내를 받아 국경을 넘었다.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탔고, 몇 개의 나라를 거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이곳, 박달산 남쪽 사면에 자리 잡은 에우로파 프룩스 극동종자연구소에 자리를 잡았다.
얀 베르그만이 소유한 벌지 브래킷 크레디트 에우로파는 곡물 시장을 지배하는 5대 글로벌 곡물 회사 중 하나인 에우로파 프룩스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에우로파 프룩스도 얀 베르그만의 소유물 중 하나였고, 박달산의 이 시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
적당히 응급처치를 하고 산 중턱에 앉아 있은 지, 1시간 가까이 지났을 무렵, 서용석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서용석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략 300~400미터 밖에서 다수의 플래시 라이트의 불빛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금방 찾아왔군.
서용석은 그 불빛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서용석은, 자력으로 내려가는 대신, 지금 이 장소에서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 걸어 내려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대로 내려간다면 부상이 심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부상이 심해지고, 회복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그를 데리러 올 누군가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8년 전, 서용석 숙소의 문을 노크했던 여자. 그리고 지금은 에우로파 프룩스 극동종자연구소의 연구소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여자, 다니엘라 노이도르프(Daniela Neudorf), 그녀가 서용석을 데리러 올 것을 알고 있었다.
다니엘라 노이도르프는 베네수엘라에서 두 번째 만난 날, 출국용 위조 여권을 가져온 날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하루도, 서용석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박달산 남쪽에 있는 에우로파 프룩스 극동종자연구소에는 다섯 명의 상주 인원이 있었는데, 서용석을 제외한 네 명은 언제나 서용석의 곁을 지켰다.
그들의 임무는 서용석을 보필하는 것이었다.
1호 손님의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던 얀 베르그만을 서용석이 당의 명령에 따라 경호했던 것처럼, 그들은 얀 베르그만의 지시에 따라 서용석을 모셨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용석이 차를 원했다면 차를, 집을 원했다면 집을, 여자를 원했다면 여자를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용석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체력을 키우고, 전투력을 늘리고, 한규호를 만나는 데 있었다.
서용석은 체력 단련을 위한 운동 장비를 요구했고, 한 달이 안 되는 시간에 연구소 내에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체력 단련장이 마련되었다. 국가대표 선수촌에 버금가는 최고급 장비가 갖춰진 체력 단련장이었다.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는 다니엘라 노이도르프가 서용석의 건강을 관리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식사를 담당하는 직원이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식단을 제공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다가온 여자, 다니엘라 노이도르프가 물었다.
서용석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부상 부위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본 다니엘라가 다가와 부상 부위를 살폈다. 그러고는 가지고 온 구급상자를 열어 상처를 소독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상처를 소독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서용석은 생각했다.
동물 사육사.
주인인 얀 베르그만이 소유한 애완동물을 사육하는 사육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