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5)
***
한규호와 박종연, 두 사람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약속이 하나 있었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
말로 꺼낸 적 없었고, 문서로 작성한 적 없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둘만의 맹약이었다.
이날도, 두 사람은 장정 셋은 거뜬히 먹고도 남을 양의 해물칼국수, 초대형 파전과 산더미처럼 쌓인 회 무침, 그리고 소주 여섯 병을 모두 다 먹어 치웠다.
한규호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진짜 이제 그만합시다.”
“뭘?”
박종연도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리의 벨트까지 풀고서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6인분 시키는 거.”
한규호가 말했다.
“그래. 이제 진짜 그만두자. 이 정도면 그 냥반들도 만족하겠지.”
박종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말했지만, 다음에도 상황이 그다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식당 주인이 눈치 빠르게 테이블에 매실차와 재떨이로 사용되는 종이컵을 올려놓았다.
한규호는 끔찍한 표정으로 매실차를 바라보았다.
매실차가 소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잔의 매실차가 지금은 마치 사약처럼 보였다. 소화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입으로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한규호는 박종연을 바라보았다. 박종연도 끔찍한 표정으로 매실차를 보고 있었다.
“담배나 한 대 줘 봐요.”
한규호가 박종연에게 말했다.
“없어.”
박종연이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없다고?”
“그래.”
“왜 없는데요?”
“끊었어.”
“끊었다고?”
한규호는 담배를 끊었다고 말하는 박종연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뭔데? 왜 사람을 그딴 눈으로 보는데?”
한규호는 박종연이 왜 담배를 피우는지 알고 있었다.
박종연은 북한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발목을 잘라 낸 이후부터였다.
환상통(Phantom Pain). 절단 부위에서 발생하는 통증. 발목 절단 수술을 받은 박종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발목 아래에서 통증을 느꼈다.
환상통은 근본적인 치료 방법이 없었다. 통증을 완화하는 대증요법은 있었지만, 아직 환상통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방법은 없었다.
통증 완화를 위해 박종연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한규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담배를 끊었다? 무언가 계기가 있다는 의미였다.
“설마…….”
한규호가 말했다.
“설마?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박종연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
“약?”
“마약?”
“야! 이 미친놈아!”
박종연이 소리쳤다.
한규호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박종연은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남자였다. 몸을 망치는 것은 몰라도, 정신을 망치는 일은 하지 않을 남자였다.
“뭔 일 있었습니까? 갑자기 왜? 언제부터?”
“몰라 이 자식아. 시끄러워. 딴 이야기 해. 담배 이야기는 하지 마.”
박종연이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안 되었군.
한규호는 괴로워하는 박종연의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판단 내렸다.
그렇게 판단이 내려지자,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흡연 욕구가 끓어올랐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인 다음, 천천히 박종연 얼굴에 내뿜어 주고 싶었다.
지금보다 더욱 괴로워하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젠장, 담배 이야기 들으니까 또 땡끼잖아.”
박종연의 얼굴에 짜증이 번져 갔다.
한규호는 그런 박종연의 얼굴을 보면서, 식당을 나가자마자 담배부터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왜 온 건데?”
박종연이 흡연 욕구를 줄이기 위해 물 컵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뭐, 그냥.”
“그냥?”
“얼굴 본 지도 오래되었고.”
한규호가 말했다.
“그냥 얼굴을 보러 왔다?”
박종연이 물었다.
***
오랜만에 얼굴을 보러 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한동안 계속 해외를 돌아다니느라 근 1년 가까이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단지 얼굴만 보려고 평택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해 줄 말이 있었다. 서용석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기 위해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한규호는 석재 장치장에서, 한 손에 든 서류를 흔들면서 지게차 기사에게 소리치는 박종연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야기를 해 줘야 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 박종연의 모습은 한규호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종연의 뒷모습을 보면서, 박종연은 더 이상 백금산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까지 백금산의 맹추위 속에 살고 있는 한규호와 달리, 박종연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각자의 인생을 사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지,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박종연을 다시 백금산이라는 악몽으로 끌고 가는 것이 맞는지 주저하고 있었다.
박종연은 그런 한규호의 생각을 눈치채고 있었다.
“단지 그냥 얼굴만 보러 왔다고?”
박종연이 다시 물었다.
한규호는 박종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박종연이 한규호의 심연을 더듬으려는 듯, 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눈이었다.
조금 전, 한 손에 든 서류를 흔들면서 소리치던 박 부장의 눈이 아니었다.
함경북도의 어느 이름 모를 야산에서, 북한군을 바라보던 진도 2의 눈이었다.
한규호는 잠시 동안, 말없이 진도 2의 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서용석.”
한규호가 말했다.
“그 자식이 한국에 들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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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석이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규호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서용석은 ‘왜’ 한국으로 온 것일까?
사실, 한규호에게 있어서 서용석이 한국에 온 이유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한규호에게 중요한 것은 서용석이 아직 한국에 있는지, 한국에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그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규호의 직감이, 언제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한규호의 직감이 ‘왜’라는 의문사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가 왜 한국행을 선택한 것인지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한규호는 두 개의 가설을 세웠다.
서용석의 한국행이 북한의 명령이라는 가설, 그리고 서용석 개인의 선택으로 한국에 잠입해 왔다는 가설이었다.
두 개의 가설을 세운 한규호는 각각의 가설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검토해 보았다.
현실적으로 신빙성은 북한 당국의 명령을 받아 한국으로 잠입해 들어왔다는 가설에 실렸다.
서용석은 535 정찰대를 북한군 최고의 특수부대로 끌어올린 장본인이었다. 북한 내에서 최상위의 전투력을 가진 인간병기였다. 그 말은 공작원으로서도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였다.
서용석이 북한의 지시에 따라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라면, 아마도 암살이나 사보타주 같은, 서용석이 가진 전투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임무를 부여받고 한국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신빙성 있는 그 가설을, 한규호의 직감은 거부하고 있었다.
오히려, 신빙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가설, 서용석이 자신의 의지로 그의 조국을 등졌다는 가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가지 근거가 있었다.
우선은 서용석의 이동 경로였다.
CIA가 확보한 정보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에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서용석은 위장 여권을 가지고 육로를 통해 콜롬비아로 넘어갔다.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라탐 항공을 이용해 칠레 산티아고로 향했고, 산티아고에서는 콴타스를 타고 시드니로, 시드니에서 싱가포르 항공을 타고, 싱가포르를 거쳐 방콕으로 갔다.
방콕에 도착한 서용석은 밀입국 브로커를 통해 캄보디아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송한승’이라는 이름의 한국 여권을 사용해 한국으로 잠입해 들어온 것을 바티칸 소속의 정체불명의 남자가 알려 주었다.
지나치게 복잡했다. 적어도 두 개의 위장 여권을 사용했고, 네 개 항공사를 이용했으며, 여섯 개 국가를 경유했다.
북한이 아닌 다른 나라였다면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했어야 했다. 위장 여권을 사용하고, 밀입국 루트를 이용함으로써 흔적을 지우고, 여러 나라를 경유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하지만 서용석의 조국은 북한이었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는 북한에게 있어서 여러 나라를 경유하는 것은 버거운 절차였다. 외교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불가능에 가까웠다.
소위 백두혈통이라고 부르는 지배자 일족도 아닌, 고작 공작원 하나를 한국에 잠입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복잡한 루트를 이용할 이유도, 능력도 북한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 다른 단서는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런 활동 징후가 포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서용석쯤 되는 인물을 보냈다는 것은 무언가 엄청난 일을 꾸몄을 가능성이 높았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사용하지는 않는 법이었다. 거기에 서용석은 범 잡는 칼이었다.
한국의 대공(對共)정보망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치밀했다.
북한이 무언가 일을 꾸미려 한다면, 그리고 그 일이 서용석을 동원할 정도의 일,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줄 수 있는 고위급의 암살이나, 국가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시설 파괴 공작이라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징후가 포착되거나 흔적이 남았을 것이고, 국정원 레이더망에 걸려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한규호가 아는 한, 서용석이 인천공항에 모습을 드러내고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서용석이 동원될 정도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작은 임무에 서용석이 동원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징후를 포착할 수 없는 작은 임무를 수행했거나, 아니면 실패하고 북으로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라면 서용석의 복잡한 이동 경로가 설명이 되질 않았다.
별 영양가 없는, 시답잖은 일을 하기 위해 범 잡는 칼인 서용석을 동원할 이유도, 돈과 노력을 들여 복잡하게 제3국을 경유시킬 이유도 없었다.
***
“그러면 그 자식이 자기 의지로 북한을 등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한규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종연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규호가 되물었다.
박종연은 한규호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정치 싸움에 밀려 도망쳐 나온 것은 아닐 거야.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정치적인 숙청을 두려워하지 않아.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배신은 안 하는 놈들이야.”
박종연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두 사람은 서용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고, 통성명을 하고, 대화를 나눠서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세계를, 사선을 넘나드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만이 아는 그런 무언가가 있었다.
“좋아. 일단 북한의 지시는 아니라 치고. 개인의 의지로 뛰쳐나왔다 치면 무언가 목적이 있겠군. 아주 사랑해 마지않는 망할 놈의 조국을 등질 정도의 목적이.”
박종연이 다시 말했다.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종연은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배고파서? 쌀밥에 고깃국을 배 터지게 처먹고 싶어서?”
그리고 젓가락으로 빈 칼국수 그릇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지 잘 먹고 잘살고 싶어서 한국에 들어왔다면 진작 국정원에 달려갔겠지? 내가 535의 서용석이다. 그렇게 말하면 국정원에서 쌀밥도 주고, 고깃국도 주고, 집도 주고, 차도 주고 그랬을 테니. 국정원에서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 봤고?”
한규호가 고개를 저었다.
박종연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청이라서 모르는 거 아냐?”
한규호는 그 말에 피식하고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을 본 박종연도 미소를 지었다.
한규호는 독립 요원이었지만, 국정원 요원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그런 잡부는 아니었다. 박종연도 잘 알고 있었다.
“나 같은 선량한 시민이라면 몰라도, 서용석이 국정원에 달려갔다면, 적어도 너는 알게 되겠지. 좋아. 계속 생각해 보자. 아무튼, 서용석은 국정원에 달려가지 않았다. 배고파서 도망 나온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는 맞다 치고.”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뭔가를 꾸몄거나 꾸미고 있다는 이야긴데, 놀러 온 건 아닐 거 아냐. 그 자식이 뭔가 꾸미고 있다면 안 걸렸을까?”
한규호는 고개를 저었다. 국정원에서 놓칠 리가 없다.
“그렇겠지?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서용석은 대가리를 땅에 박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북한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네. 북한으로 갔을까? 아니지. 그렇게 돌아가기엔, 너무 힘들게 왔지. 힘들게 와서 그냥 돌아갈 경우가 뭐가 있을까? 누굴 경호했을까? 위대한 백두혈통?”
“그 집안사람들이 아무리 멍청해도 한국에 들어오지는 않을 겁니다.”
“모르지. 북에서도 한류가 인기라며.”
“들어왔다면 걸렸을 겁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그렇겠군. 고귀하신 백두혈통이 행차하셨는데, 모를 리가 없지.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볼까? 뭔가 꾸미다가 여의치 않으니 그냥 돌아갔다.”
“안 상사님은?”
한규호가 이제는 고혼이 된 옛 전우의 이름을 꺼냈다.
“안 상사? 안성종 상사님?”
“안 상사님이라면 어땠을까요?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돌아갔을까요?”
한규호가 물었다.
박종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하니 단박에 이해가 가는군. 그냥 그렇게 돌아갈 사람들이 아니지. 안 상사님도, 그리고 서용석 그 자식도.”
“그렇게 생각됩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국정원에 투항하지 않았다. 아직 돌아가지도 않았다. 활동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남은 것은 그거뿐인가?”
박종연이 말했다.
“가능성이 가장 크죠.”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박종연이 말했다.
“그렇겠죠.”
한규호가 말했다.
박종연이 테이블에 젓가락으로 글자를 썼다.
‘복수’라는 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