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 사냥꾼들의 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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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서 나와 40여 분 가까이 산길을 달려가던 서용석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체력적인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직 다리에는 여유가 있었다. 호흡도 마찬가지였다. 거친 숨을 뱉어 내고는 있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더 속도를 붙여, 폐활량의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서용석은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달려 나가야 하는 경로를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었다.
천천히 느려지던 다리가 완전히 멈추었다.
서용석은 그렇게 멈춘 채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천천히, 그리고 깊게 심호흡을 하면서,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온 사위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짙은 어둠이었다.
하지만 서용석은 그 ‘무언가’를 알아챌 수 있었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밤마다 산길을 달렸다. 체력을 키우는 것과 동시에, 감각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었다.
인간의 시력은 다른 동물에 비해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전자기 스펙트럼의 일부분, 가시광선의 영역만을 볼 수 있었다. 가시광선 영역을 볼 수 있다고 해도, 빛이 부족한 야간에는 가시 범위가 더욱 줄어들었다. 동물의 안구에 있는 휘판(tapetum lucidum)이 인간에게는 없었다.
서용석은 인간이었다. 노력을 통해 일반인보다 높은 야간 시력을 가질 수는 있어도, 인간의 범주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야행성 동물과 같은 시력을 가질 수는 없었다.
서용석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부족한 야간 시력을 키우기 위해, 부족한 시각을 다른 감각으로 보완하기 위해 매일 밤 산길을 뛰었다.
소리를 듣는 청각, 냄새를 맡는 후각, 피부에 느껴지는 촉각, 그리고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육감이 그것이었다.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무언가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이었다.
가장 먼저 육감이 발동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가장 먼저 찾아왔다. 뒤이어, 후각을 통해 짐승의 냄새를 맡았다. 청각을 통해 짐승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완전히 걸음을 멈추고서야 눈으로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무언가, 정확히는 무언가의 실루엣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루엣을 확인한 서용석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멧돼지로군.
대략 30여 미터 앞에 멧돼지가 서 있었다.
서용석은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실루엣을 통해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아직 거리가 떨어져 있었고, 실루엣은 흐릿했지만, 그리 작지 않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30미터 밖에서도 실루엣을 확인할 수 있다면 성체라는 이야기다. 크기와 상관없이, 다 자란 멧돼지가 위험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서용석은 멧돼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을 천천히 허리로 가져갔다. 그리고 허리에 달아 둔 칼집에서 전투용 총검을 꺼내 들었다.
OKC에서 제작한 M11 군용 총검, 미군 폭발물 처리 부대 납품용으로 만들어진, 날 길이 18cm의 전투용 총검을 손에 쥐었다.
서용석은 비반사 처리된 전투용 총검을 손에 들고 다시 모든 신경을 멧돼지에 집중했다.
멧돼지는 아직 서용석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서용석은 움직이지 않는 멧돼지를 잠시 바라보다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멧돼지에게 다가간 것이다.
호랑이가 사라진 한반도에서 멧돼지는 최상위 포식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 한반도에서 인간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가장 강한 야생동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순 계산으로, 200kg에 육박하는 멧돼지가 시속 50km의 속도로 달려들었을 때 만들어지는 운동에너지는 2만 줄(Joule)에 육박했다.
덩치도 덩치였지만, 그보다 더 큰 위험은 멧돼지의 엄니였다. 멧돼지 엄니는 단단하게 다져진 땅을 헤집어 놓을 정도로 강하고 날카로웠다. 허벅지에 멧돼지의 엄니가 박히면 대동맥이 그냥 잘려 나갔다.
일반인이 멧돼지를 만났다면, 그리고 멧돼지가 그 사람을 인지했다면, 최악의 경우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났을 때, 첫 번째 원칙은 절대로 자극하지 않는 것이다.
발견 즉시 그 자리에 멈춰 서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바위나 나무 같은 장애물로 피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뒤로 돌아 도망가는 것은 금물이었다. 최대 시속 50km의 속도를 낼 수 있다는 멧돼지를 인간의 달리기 속도로는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약 멧돼지가 사람을 발견하고, 공격하려고 한다면 멧돼지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나무나 바위로 올라가는 것이 유일한 피난법이었다.
하지만 서용석은 멧돼지를 향해 더 다가가고 있었다. 피하기는커녕 자극하고 있었다.
서용석은 멧돼지를 이대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몇 발자국 다가가자 실루엣으로만 보이던 멧돼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용석은 중량을 가늠해 보았다.
지금까지 봐 왔던 멧돼지 중에서 가장 큰 놈이었다. 그 거대한 놈을 보면서 서용석은 생각했다.
역시, 남쪽인가. 300킬로는 거뜬히 넘겠군.
멧돼지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북한에 있을 때, 535를 이끌고 실전 훈련을 진행하던 당시 야생 멧돼지와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었다.
북한에서 만난 멧돼지는 그리 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클 수 없었다. 사람이 먹을 것도 부족한 땅이었다.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나무를 다 베어 내, 산은 다 헐벗어 있었다. 먹이가 부족했다, 멧돼지는 체중을 불릴 수 없었다.
지금 서용석의 눈앞에 있는 녀석은 작은 곰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크기였다.
“그 녀석들이 봤으면 좋아했겠군.”
서용석이 소리 내어 말했다.
그의 말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은 밤공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실전 훈련 도중에 멧돼지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영양 보충을 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사냥은 어렵지 않았다. 부대원들이 있었고, 총이 있었으니까.
서용석은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멧돼지와의 거리가 20여 미터로 줄어들었을 때, 멧돼지의 모습이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야생을 품은 안광이 서용석을 향해 있었다. 멧돼지도 서용석을 인지하고 있었다.
서용석은 손에 든 총검을 역수로 잡았다.
역수는 사실 싸움에 있어서 그리 좋은 그립은 아니었다.
역수는 정수와 비교하면 사정거리가 짧았고, 베기의 위력이나 정확도에서도 손해를 봤다. 찌르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역수 찌르기는 정수 지르기보다 여러모로 제한적이었다.
그런데도 서용석은 총검을 역수로 잡았다. 역수의 유일한 장점, 찍어 내릴 때, 총검에 실을 수 있는 에너지가 정수보다 월등히 높았다.
서용석은 총검 한 자루로 300kg이 넘어가는 멧돼지를 잡을 생각이었다.
서용석이 한 발 더 다가갔고, 멧돼지는 그런 서용석을 향해 몸을 돌리며, 앞발을 굴렀다.
돌격 준비 자세였다.
***
멧돼지는 이미 서용석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시력이 나쁜 멧돼지는 부족한 시각을 월등한 후각과 청각으로 보완했다.
후각을 통해서 이질적인 냄새, 인간의 땀 냄새를 맡았고, 청각을 통해서 이질적인 소리, 신발창이 바닥을 차는 소리를 들었다.
멧돼지는 무언가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망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멧돼지는 박달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 없는 패자(霸者)였다.
이 산에 있는 그 무엇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눈앞에 서 있는 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먹이인지, 아닌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무언가는 감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실이 멧돼지의 심기를 건드렸다.
멧돼지는 일단 다가오는 무언가에게 징벌을 내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 몸통 박치기를 한다. 지금까지 그 무엇도 버텨 내지 못한 필살의 공격이었다. 피해 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범위 안에만 들어오면 엄니로 찢어발길 생각이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멧돼지는 앞발을 굴렀다.
두어 번 앞발로 땅을 고르면서 방향을 잡았다. 그러고는 무게중심을 뒤로 살짝 주었다. 뒷다리에 힘을 싣기 위한 준비 동작이었다.
방향을 잡고, 힘이 완전히 실렸을 때, 멧돼지는 감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친히 징벌하기 위해 앞으로 힘차게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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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석은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멧돼지를 침착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육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가속이었다.
멧돼지와 일대일로 상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이었지만,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멧돼지 사냥에 있어서 제일 원칙은 일격필살(一擊必殺)이었다. 급소를 노려, 한 방에 끝내야 했다.
멧돼지의 대표적인 급소는 눈과 귀 사이였다. 경추와 뇌로 연결되는 신경이 지나가는 부위였다. 제대로만 맞으면 한 발의 총알로도 멧돼지를 쓰러트릴 수 있었기에, 사냥꾼들이 가장 먼저 노리는 부위였다. 여의치 않을 때, 노리는 두 번째 급소는 가슴, 소위 말하는 심장이 위치한 부위였다.
물론 총이 있을 때 이야기였다.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총알의 응집된 에너지가 있어야지만, 멧돼지의 두꺼운 근육을 뚫어 낼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단검 한 자루를 가지고 공략할 수 있는 부위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서용석은 다른 부위를 공략할 생각이었다.
등, 정확히는 척추를 노릴 계획이었다. 단숨에 척추를 끊어 내기 위해 전투용 단검을 역수로 잡은 것이다.
상황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서용석도 알고 있었다. 만약 근거리에서 난전이 일어난다면 서용석은 절대로 멧돼지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한 번, 많아도 두 번, 정도의 기회밖에 없었다.
서용석은 자세를 낮춤으로써 두 다리에 무게를 실었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다음, 호흡을 멈춰 숨을 폐 안에 가두었다.
돌진을 시작한 멧돼지가 빠르게 서용석을 향해 다가왔다. 1.5m 정도의 체고가 마치 덤프트럭이 달려오는 것 같은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사람의 발걸음으로 서너 발자국 앞까지 다가왔을 때, 서용석은 승모근과 광배근에 힘을 주어 상체를 왼쪽으로 빠르게 비틀었다. 동시에, 땅을 딛고 있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하체도 같이 회전시켰다.
투우의 돌진을 최소한의 동작으로 피해 내는 투우사(鬪牛士) 마타도르(matador)처럼, 미세한 틈을 남겨 둔 채로, 멧돼지의 돌진을 피해 냈다.
그러나 서용석의 의도는 회피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공격을 위한 사전 준비였다.
서용석은 몸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 역수로 잡고 있던 총검을 아래쪽으로 강하게 찍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확히 척추가 지나는 부위였다.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련하고 또 단련한 그의 팔근육이 강하게 부풀어 올랐다.
비반사 처리된 18cm의 칼날이 바늘처럼 단단한 털과 두꺼운 가죽을 뚫고 들어가는 느낌이 손잡이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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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석을 치지 못한 멧돼지는 관성에 의해 앞으로 계속 달려 나갔다.
칼날은 척추를 끊어 내지 못했다. 아예 닫지도 못했다.
힘은 충분했다. 문제는 멧돼지의 속도였다. 달려 나가는 속도가 너무 빨랐고, 칼날이 척추에 닿기 전에, 멧돼지는 거리를 벌렸다.
20여 미터 앞에서 달리기를 멈춘 멧돼지는 몸을 돌려 서용석을 바라보았다. 안광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서용석의 입장에서 상황은 더욱 나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멧돼지의 운동 능력은 그대로였고, 심적으로는 더욱 흥분한 상황이었다.
좋군.
서용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체력은 혼자서도 단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실전은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서용석도 알고 있었다. 목숨이 걸렸다는 말의 의미는 서용석이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죽을 수도 있다.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여기서 죽을 정도라면, 그 친구를 만나도 소용없겠지.
서용석은 눈앞에서 다시 발을 구르는, 300kg이 넘어가는 멧돼지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가 찾는 사람은 눈앞의 멧돼지 따위는 상대도 안 되는 괴물이었다.
박철, 서용석의 뒤를 이어 535를 이끌 예정이었던 박철 상사를 단 두 번의 칼질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서용석이 고르고 골라서 심혈을 키워 만들어 낸 535의 대원 7명도 모두 그의 손에 고혼이 되어 버렸다.
칼 한 자루, 그 남자의 명치에 박혀 있던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순식간에 535대원 8명의 목숨을 끊었다.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를 찾기 위해 조국을 등졌다. 그를 상대하기 위해 8년 동안 매일 밤 산을 뛰었다.
고작 멧돼지에게 죽을 정도였다면,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낫다고 서용석은 생각했다.
“와라.”
서용석이 멧돼지를 향해 말했다.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멧돼지가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