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eet Day (12)
디즈니 제국을 지배하는 월트 디즈니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 아시아에서는 도쿄에 이어 두 번째로 홍콩 디즈니랜드를 구상하면서 홍콩 디즈니랜드만의 독특한 특성을 적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풍수지리 전문가를 포함한 것이다.
등 뒤로 산을 두고, 바다를 마주 보는 배산임해(背山臨海)의 입지, 평탄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약간 경사진 부지가 바로 풍수지리 사상이 적용된 대표적 사례였다.
이 같은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아, 디즈니랜드에서 호텔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곡선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기(氣)가 남중국해로 흘러나가는 것을 곡선으로 만들어진 산책로가 막아 준다는 이유였다.
그 산책로를 한규호는 완과 함께 걷고 있었다.
한규호는 자신의 손을 잡고,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완을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네요.”
완이 말했다.
“어떻게 생각했는데?”
한규호가 물었다.
“그냥 사람 많은 테마파크? 딱히 디즈니랜드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은 없었어요. 당신이 오지 않았다면 여기에 올 일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막상 와 보니 생각보다 좋은데요?”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완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올 일이 없었을 것이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완의 집에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고 느지막이 디즈니랜드 리조트 안에 있는 호텔에 체크인을 할 때까지만 해도 후회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과 함께, 느긋한 걸음으로 디즈니랜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간식을 사 먹고, 차를 마시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사소한 잡담들을 나누면서,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완이 좋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규호는 앞으로 시선을 향했다. 늦은 오후의 게으른 햇살이 조화롭게 꾸며진 산책로와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군.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한규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상한 기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요 며칠간 한규호는 계속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완이 옆에 누워 있었다. 침대에서 가벼운 장난을 치고, 늦은 아침을 먹었다.
점심쯤에 맞춰 가볍게 산책을 하거나 장을 보러 갔다. 다시 돌아와서는 영화나 책을 보다 낮잠을 잤고, 일어나 저녁을 해 먹거나, 완에게 이끌려 맛집을 찾아다녔다. 집에 돌아와 거실의 불을 꺼놓고, 창밖의 밤바다를 보면서 음악을 듣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었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이런 삶을 살아 보지 않았다.
가슴에 칼이 꽂힌 그날 이후, 분노가 가득한 가슴을 긴장과 경계라는 옷으로 감싸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요 며칠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완이 말했던 평범한 일상. 한규호에게 허락되지 않은, 한규호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 보는 이 시간이, 평범한 일상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한규호는 다시 완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앞으로 딱 일주일만. 일에 대해 이야기는 하지 말아 줘요.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딱 일주일만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어요.
완이 그렇게 부탁했었다.
“부탁이 아니라, 선물이었군.”
한규호가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요?”
완이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규호가 살짝 웃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
홍콩 디즈니랜드 리조트 내에는 세 개의 호텔이 있었다.
전통적인 빅토리아 스타일의 홍콩 디즈니랜드 호텔, 피아노 테마의 실외수영장으로 유명한 디즈니 할리우드 호텔, 그리고 모험을 테마로 한 디즈니 익스플로러 롯지가 있었다.
완과 한규호의 객실은 가장 전통적인 디즈니랜드 호텔 7층에 있는 킹덤 클럽 스위트룸이었다.
1박에 5,700홍콩달러, 한국 돈으로 88만 원이 넘어가는 이 객실은 숙박비와 비교하면 시설이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디즈니랜드 내에 자리 잡고 있다는 장점과 패스트패스 같은 디즈니랜드 리조트만의 특전 덕분에 객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라운지에 가서 차 한잔하고 갈까요?”
호텔 로비로 들어서며 완이 물었다.
그들이 묵는 킹덤 클럽 스위트룸은 클럽 라운지 이용이 가능했고, 클럽 라운지에서는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에프터눈 티 세트를 제공했다.
“그럴까? 몇 시까지 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던 한규호의 말이 끊겼다.
완은 한규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규호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아니 며칠 동안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표정을 한 채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의 표정이었다.
완의 시선이 움직였다. 한규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완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한규호를 바라보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환영받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한규호가 앞으로 걸어갔다. 완이 재빨리 그 옆에 붙었다.
정면에서 한규호를 바라보던 남자도 한규호를 향해 걸어왔다.
두 사람은 1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한규호가 앞에 선 남자에게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그 목소리가 칼처럼 날카로웠다.
“……당신이야말로…….”
“아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앞에 선 남자, 국가정보원 요원 곽용신이 입을 열었을 때, 어디선가 난입한 목소리가 둘 사이에 팽배한 긴장 상태를 갈라놓았다.
완과 한규호, 그리고 곽용신의 머리가 동시에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갔다.
세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여자아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무게중심을 잡지 못해 뒤뚱거리면서도, 온 힘을 다해 곽용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달려온 아이는 재빨리 곽용신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리고 잠시 동안 비비적거리다, 앞에 선 한규호와 완을 보고는 재빨리 아빠 다리 뒤로 몸을 숨겼다.
그 모습을 보고 한규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완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아. 아빠 친구야.”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며 딸을 안아 들었다.
“딸?”
한규호가 물었다.
“막내.”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움직였다.
한규호는 그 시선을 따라갔고,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두 명의 여성, 성인 여성과 그녀의 손을 잡은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자기야, 예약이 뭔가 이상하데. 체크인이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뭐라고 하는지 잘 못 알아듣겠어. 자기가 가서 이야기 좀 해 봐.”
그 말을 들은 한규호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가족 여행. 국정원 곽용신 요원이 홍콩 디즈니랜드로 가족 여행을 왔다는 것을.
어느새 다가온 곽용신의 아내가 불안한 눈빛으로 한규호를 보면서 말했다.
“어머, 누구? 아는…… 분?”
“어? 어. 저기…… 그…… 대학…… 후배.”
곽용신이 말했다.
대학 후배?
한규호가 속으로 되물었다.
“아, 그러시구나. 안녕하세요.”
대학 후배라는 말을 들은 곽용신의 아내가 경계심을 풀면서 한규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수님.”
한규호가 재빨리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곽용신의 아내에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우리 만난 적 있었나요? 죄송해요. 제가 얼굴을 잘 기억 못 해서.”
곽용신의 아내가 말했다.
“결혼식 때 인사드렸습니다. 기억 못 하실 거예요. 그때 워낙 정신없으셨으니.”
“아, 그랬군요. 아무튼, 반가워요. 와, 놀랍네요. 이런 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러네요. 저도…… 놀랐습니다.”
한규호가 곽용신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게. 나도…… 놀랐어.”
곽용신이 말했다.
“그나저나, 옆에 계신 분은……?”
곽용신이 완을 보며 물었다.
“아, 그…… 약혼자.”
한규호가 말했다.
“약혼자?”
그 말에 곽용신이 놀란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사심 없이 진짜로 놀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곽용신은 진짜 놀랐다. 약혼자라고? 그 한규호에게 약혼자가 있었다고?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너무 미인이잖아!
“안녕하세요? 규호 씨 약혼녀인 마리라고 합니다. 공주님들도 안녕하세요?”
완이 곽용신 부부와 두 딸에게 인사했다.
한국어로.
“어머, 디즈니랜드에 데이트하러 오셨나 봐요. 반가워요.”
곽용신의 아내가 부럽다는 눈빛으로 완을 보면서 말했다.
한규호는 짧은 시간 동안 다섯 번 놀랐다.
곽용신을 만나서, 그의 가족이 같이 있어서, 대학 후배라고 소개되어서, 완을 약혼자라고 소개해서. 그리고 완이 한국말을 해서.
완이 곽용신이 아내에게 물었다.
“그런데, 체크인에 뭔가 문제가 있나 봐요.”
“네. 뭔가 예약이 잘못되었다고 그러는데…….”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완이 말했다.
“도와주신다고요?”
“네. 제 친구가 여기에서 일해서, 어쩌면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같이 프런트로 가 보실래요?”
그렇게 말한 완은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아직 어떤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곽용신의 두 딸과 시선 높이를 맞춘 다음, 두 사람에게 말했다.
“공주님들은 엘사가 좋아요? 아니면 신데렐라가 좋아요?”
완의 질문에 곽용신의 두 딸의 얼굴이 확 펴졌다.
“엘사요!”
곽용신의 다리에 매달린 작은 아이가 외쳤다.
“저도…… 엘사가 좋아요.”
엄마 손을 잡고 있는 첫째 딸도, 아직 경계심을 풀지는 않은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알겠어요. 자, 그럼 우리 엄마 손 잡고 같이 갈까요?”
그렇게 말한 완은 곽용신의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프런트데스크 쪽으로 가 버렸다.
그 자리에는 한규호와 곽용신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프런트로 가는 네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곽용신에게 한규호가 말했다.
“대학 후배?”
“그럼 뭐라고 할까? 직장 동료라고 할까?”
곽용신이 말했다.
“그건 그렇군. 하지만 꼭 후배여야 했을까?”
“몇 년 생인데?”
“……당신이 말해 보지.”
“말띠. 78.”
“…….”
한규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약혼자라고? 설마, 진짜 약혼자인가?”
곽용신이 다시 프런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곽용신은 완을 기억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
탄치에서 정신을 잃은 완이 미 7함대의 헬리콥터에 실릴 때, 곽용신도 그곳에 있었다.
당연했다.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고, 얼굴에 먼지와 검둥이 가득했던 완에게서 지금의 완을 연상하는 것은 일반인이라면 불가능했다.
“뭐…… 대충 비슷해.”
한규호가 말했다.
“왜? 저런 미인이 왜?”
곽용신이 완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마치 한규호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이 이상한데?”
“아, 미안. 하지만 솔직히 너무 놀라서. 뭐. 아무튼, 그럼 연인과 휴가 중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곽용신이 말했다.
한규호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잘되었군. 나도 가족과 오랜만에 온 여행이니까. 쓸데없이 엮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곽용신이 말했다.
“아, 그리고.”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동안 뜸을 들였다.
그런 곽용신을 한규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로 엮이지 않는 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정신이 없어서 그때는 말하지 못했는데…….”
곽용신이 그렇게 말했을 때, 또다시 외침이 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빠아아아아아아아!”
다다다 하고 달려온 곽용신의 막내딸이 다시 곽용신의 다리에 매달렸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완을 포함해 세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기야. 체크인 됐어! 체크인뿐만 아니라, 업그레이드도 되었어! 겨울왕국 콘셉트의 스위트룸!”
놀란 눈으로 다가온 곽용신의 아내가 말했다.
“스위트룸?”
곽용신도 놀란 눈으로 말했다.
“응. 마리 씨가 친구라고 하니까 방을 업그레이드해 줬어.”
곽용신이 놀란 눈으로 완을 바라보았다. 완은 한 발자국 뒤에 서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한규호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해될 것은 없었다.
“너무 고마워서, 내가 마리 씨랑 후배분 저녁 식사에 초대했어. 오늘 저녁 대접해 드리려고.”
“저녁?”
곽용신은 방이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응. 마리 씨도 좋대.”
그 말에 한규호가 다시 완을 바라보았다.
완은 마치 ‘나 잘했죠?’ 하는 눈빛으로 한규호를 보고 있었다.
아니야. 이 아가씨야.
한규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