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eet Day (11)
결국, 그날은 찾아오고야 말았다.
홍콩에 도착하고 일주일째 되는 날 저녁.
며칠 전 완이 사 준 수트를 차려입은 한규호는 센트럴역 인근에 위치한 쇼핑몰, ‘랜드마크’에 위치한 한 식당에 앉아 있었다.
기드 미슐랭(Guide Michelin)에서 별 세 개를 부여한 프렌치 레스토랑, 라틀리에 드 조엘 로부숑(L'Atelier de Joël Robuchon). 이곳이 오늘 한규호가 저녁을 먹을 장소였다.
물론 한규호의 선택이 아니었다.
맛을 판별하는 미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니, 어쩌면 누구보다 날카로운 미각을 가지고 있는 한규호였지만, 미식(美食)을 찾아 미슐랭 쓰리스타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스타일은 한규호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렌치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 신시아 챔버와의 저녁 식사가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레스코드를 맞춘다고, 불편한 수트를 차려입은 한규호는, 불만이 묻어나는 무표정을 한 채로 식당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오픈된 주방에는 검은색의 유니폼을 입은 조리사들이 열심히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고, 단정한 차림이 서버들이 그리 빠르지 않은 움직임으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한규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요?”
한규호 옆자리에 앉아 있는 완이 속삭이듯 물었다.
“아니.”
한규호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완이 물었다.
“내 표정이 어때서?”
“심통 난 것 같아요.”
“심통 안 났어.”
“진짜요?”
“그래.”
한규호가 짧게 말했다.
그런 한규호를 보고 완이 싱긋 웃고는 테이블 밑으로 한규호의 손을 잡았다.
완의 부드러운 손이 느껴지자 한규호는 완을 바라보아다.
“신시아가 여기에 와 보고 싶다고 했어요. 이해해 줄 수 있죠?”
“……나는 괜찮아.”
한규호가 말했다.
“고마워요.”
완이 손가락으로 한규호의 손바닥을 간지럽히면서 말했다.
한규호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 저기 오셨네요.”
완이 입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규호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신시아 챔버가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한규호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신시아 챔버를 맞이하기 위해 한규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요, 내가 늦었죠?”
테이블로 다가온 신시아 챔버가 한규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한규호가 그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희도 조금 전에 왔습니다.”
예의 바른 대답에 완이 흐뭇한 얼굴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일단 앉을까요?”
신시아 챔버의 권유에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세 번째인가요? 얼굴을 본 게?”
신시아가 한규호에게 미소를 지어 주며 물었다.
“전화 통화까지 포함하면 네 번째군요.”
한규호가 답했다.
“그러네요. 처음에는 전화 통화. 그다음은 화상 연결, 세 번째는 실제로 얼굴을 봤지만 짧은 시간에 불과했고. 실질적으로는 처음 보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네요. 반가워요. 신시아 챔버예요.”
“한규호입니다.”
“식당은 내가 일방적으로 정했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일단 주문부터 할까요?”
신시아 챔버는 그렇게 말하고 웨이터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
식전주인 아뻬리티브(Aperitif), 차가운 전채 요리인 오르되브르(hors-d’œuvre), 따뜻한 전채 요리 앙트레(Entree), 메인요리인 플라 프란시빨(Plat principal), 치즈와 디저트(fromage et dessert)로 이루어진 저녁식사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신시아 챔버와 완이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 가고, 한규호는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거나, 가벼운 대답을 하면서 세 사람은 그 긴 식사를 이어 갔다.
피곤하군.
미슐랭에서 별 세 개를 준 레스토랑에 대한 한규호의 감상평이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신선한 식재료와 식재료의 풍미를 잘 살린 조리 방식은 상당히 괜찮은 맛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처럼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감탄을 내뱉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솔직한 그의 평가였다.
무엇보다 너무 길었다.
불편한 옷을 입고, 불편한 주제, 예를 들어 연애를 하는 데 있어서 이상적인 남자의 태도가 무엇인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기에 두 시간은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어땠어요? 여기 음식은?”
신시아 챔버가 디저트로 주문한 캬라멜라이즈드 타르트타탱을 포크로 자르며 물었다.
“맛있었습니다.”
한규호가 라틀리에의 대표 디저트라는 르 쇼콜라(Le Chocolat) 초콜릿 크림에 스푼을 가져가면서 말했다.
마지막 음식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네요. 물어보지도 않고 제가 일방적으로 정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여긴 꼭 한번 와 보고 싶었거든요. 뉴욕의 조엘 로부숑이 별 두 개였는데, 홍콩의 조엘 로부숑이 별 세 개라고 하니 궁금했어요.”
“그렇습니까?”
“원래는 규하고 오려고 했는데, 알다시피 규가 미스터 한을 혼자 두고, 나와 저녁을 먹을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그렇다고 혼자 올 수는 없으니까요. 이해해 주면 좋겠어요.”
“……훌륭한 식사였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규호가 다시 예의 바르게 말했다.
“고마워요.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네요.”
신시아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와일드한 터프가이라는 이미지였는데, 실제로 같이 식사를 해 보니, 매너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신사였네요.”
신시아가 말했다.
그 말에 완이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은 한규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정하지 못했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한규호가 찾은 대답이었다. 표정만큼 어색한 대답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신시아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엄마라는 입장에서 딸의 연인은 일종의 위험 요소처럼 느껴지거든요.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은 색안경을 쓰고 바라볼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또 미스터 한은 아무래도 특수한 관계이다 보니까, 조금 더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네요.”
한규호의 눈을 직시한 신시아 챔버가 마치, 진짜 완의 엄마처럼 그렇게 말했다.
한규호는 베네수엘라에서의 통화를 떠올렸다.
그 당시에도 이런 느낌이었다.
마치 앤의 진짜 엄마인 것처럼 말했다.
“이해합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고마워요. 이해해 준다니. 동양인들은 확실히 연장자에 대한 예의가 배어 있는 점이 좋아요. 어머. 이거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들리려나? 나쁜 의도는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어때요? 우리 규가 잘 대해 주고 있나요?”
신시아 챔버가 주제를 전환했다.
“네, 뭐.”
한규호가 대답을 얼버무렸다.
옆자리 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불만이 있지만 참고 있다는 의미로 들리는데요?”
“……아니야. 그런 거 없어.”
그런 두 사람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는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불만이 있으면 바로바로 이야기해 줘야 상대방도 알 수 있어요. 작은 불만들이 쌓이면 나중에 큰 갈등으로 자라나게 되어 버려요.”
한규호는 눈을 감고 싶었다.
두 여자, 아니. 정확히는 두 모녀 사이에 끼인 남자 친구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을 하기는 했다. 나름 각오도 했다.
하지만 막상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예상하고, 각오한 것보다 더 힘들었다.
차라리 작전이 편하겠군.
그런 생각을 하는 한규호에게 신시아 챔버가 미소를 띤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해해 줘요.”
“……무엇을 말입니까?”
“규에게 부탁받았어요. 자연스러운 식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저, 친한 사람끼리, 아니, 친한 두 사람과 그 자리가 어색한 한 사람이 저녁을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신시아 챔버가 완을 바라보며 말했다.
완은 신시아 챔버에게 미소를 지어 주고 있었다.
“미스터 한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오늘은 이해해 줬으면 해요.”
신시아 챔버가 한규호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뭐랄까.”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옆자리에 앉은 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이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난 것은 처음이라.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례되는 모습을 보였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한규호가 다시 신시아 챔버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한규호의 손을 테이블 밑에서 완이 다시 꼭 잡아 주었다.
“생각했던 이미지랑 다르네요. 확실히.”
신시아 챔버가 한규호에게 말했다.
“좋은 쪽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나쁜 쪽은 아니에요. 그나저나, 홍콩에는 언제까지 있을 예정인가요? ‘약혼자’ 씨는?”
“2주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2주? 그럼 일주일 정도 남았네요.”
“그렇습니다.”
“떠나기 전에 또 식사했으면 좋겠네요. 조금 더 편안한 분위기로.”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저도 그러고 싶군요. 다음에는 제가 모시도록 하게 해 주신다면.”
한규호가 말했다.
그 말에 신시아 챔버의 얼굴에도, 완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생각이 바뀌는데요.”
신시아 챔버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미스터 한은 말을 너무 잘하네요. 말 잘하는 남자는 바람둥이일 가능성이 있는데.”
신시아 챔버는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의 얼굴을, 앤 챔버와 트레이시 테일러의 얼굴이 떠올렸다.
한규호 옆에 앉은 완이 말했다.
“괜찮아요. 들키지만 않는다면.”
그 말을 신시아가 받았다.
“안 들킬 수 있을까요?”
한규호는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
“어땠어요?”
식사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 옆자리에 앉은 완이 물었다.
“뭐가.”
“저녁 식사.”
“뭐, 맛은 나쁘지 않더군.”
한규호가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음식에 관해 물은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요.”
완이 한규호 쪽으로 한 뼘 다가오며 말했다.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더군.”
한규호가 말했다.
완이 한규호의 손등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고마워요.”
완이 말했다.
“……뭐가.”
“행복한 저녁 식사였어요.”
완이 한규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래.”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천만에.”
“고마워요.”
“……그래. 나도.”
한규호가 말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잠시 동안 말없이, 손을 통해 느껴지는 서로의 체온을 공유했다.
완이 한규호 쪽으로 한 뼘 더 다가오며 물었다.
“오늘 너무 고마워서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혹시 소원 같은 거 없어요?”
“……소원?”
“네. 뭐 차가 가지고 싶다든가, 아니면 엉덩이를 때려 달라든가. 그런 거.”
한규호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좁아졌다.
“엉덩이를 맞는 것은 싫군. 때리는 것도 그렇고. 차도 필요 없고……. 그러면 부탁을 하나 할까?”
한규호가 말했다.
“네, 뭔데요?”
“뭐…… 내일은 그냥 집에서 편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은데.”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한규호가 말했다.
“내일요?”
완이 물었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일정이 잡혀 있었다. 홍콩 디즈니랜드에서 이틀간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완이 권유했고, 한규호가 수락했다.
한규호는 그 계획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한규호는 완과의 데이트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디즈니랜드가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디즈니랜드란 장소가 그에게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네. 그렇게 해요.”
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시원한 대답이었다.
한규호는 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실망이나 섭섭함 같은 감정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내가 말했죠? 규호, 당신이 우선이에요. 당신이 싫으면 나도 싫어요.”
완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규호 쪽으로 조금 더 다가왔다.
한규호는 그런 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겠어?”
한규호가 물었다.
“진짜로, 진짜로. 괜찮아요. 꼭 그곳에 가 보고 싶어서 가자고 한 게 아니에요. 그저 규호, 당신이 홍콩에 있으니까, 별 의미 없이 같이 가자고 한 거예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완이 정말 괜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그렇다면.”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죄책감에서는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그냥…… 갈까?”
정면을 바라보는 한규호가 말했다.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완이 말했다.
“뭐…… 나도 괜찮아.”
한규호가 말했다.
“……진짜요?”
“그래. 당신이 좋으면…… 나도 뭐…….”
“나도 뭐요?”
“……내일 가자고.”
한규호가 얼버무렸다.
그런 한규호의 품에, 완이 몸을 기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