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eet Day (7)
한규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보이는 첫 장면은 화장대에 앉아 화장을 하는 완의 뒷모습이었다.
언제 일어나 준비를 했는지, 출근용 정장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고, 화장도 거의 마무리되어 있었다.
한규호는 침대에 누워 있는 자세 그대로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벌써 일어났어요?”
화장에 집중하던 완이 거울을 통해 한규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출근?”
한규호가 물었다.
완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주고는 계속 화장에 집중했다.
한규호는 팔로 머리를 받치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썹에 마스카라를 바르고, 입술에 립스틱 바른 후에야 완은 고개를 돌렸다.
“출근해야죠. 당신을 기다리게 하려면.”
“나를 기다리게 한다고?”
“기다림은 기둥서방의 미학이에요. 여자가 일하는 동안 집에서 얌전히 여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거죠.”
“기다리게 하려고 일부러 출근하겠다는 말씀이시군요.”
한규호가 말했다.
완이 화장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침대로 다가와 기대앉았다.
“출근하지 말까요?”
완이 말했다.
한규호는 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장난기, 기대감, 그리고 따스함,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애정’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한규호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한규호의 손가락이 완의 턱에 아주 살짝 닿았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립스틱이 발린 완의 입술이 한규호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러운, 입술과 입술만의 온기를 공유하는 그런 입맞춤이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 한규호는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완의 얼굴이 있었다. 미소를 가득 담은 그녀의 눈동자가 불과 몇 센티미터 앞에 있었다.
“립스틱, 다시 발라야겠어요.”
완이 속삭였다.
“출근은 하겠다는 말이네.”
한규호가 말했다.
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전에 회의가 열릴 거예요. 본사에서 오신 부사장님이 임원들을 전부 소집해 회의를 열 거예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완이 화장대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몰랐는데. 그 부사장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인지.”
한규호가 말했다.
미국 본사에서 온 부사장이라면 홍콩 지사 직원들에게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규호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의 부사장이라는 직책은 그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CIA라는 타이틀도 마찬가지였다.
한규호 말에 립스틱을 바르던 완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머, 지금 질투하는 거죠?”
그를 바라보는 완의 눈에 장난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한규호는 아차 싶었다.
“질투는 무슨…….”
한규호가 부정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맞는데요? 중요하지도 않은 부사장 때문에 나를 두고 가겠다는 거야? 나랑 부사장 중에서 누가 더 중요해. 이런 의미 아니에요?”
한규호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완이 다시 침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누워 있는 한규호의 옆에 몸을 눕혔다.
그녀의 입술이 한규호의 귀에 가까이 붙었다.
“부사장님은 회의에서 아시아 지부 설립 준비가 미흡하다고 화를 낼 거예요. 임원들은 공포에 질린 채로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겠죠? 그러면 부사장님이 임원들에게 지시할 거예요. 서류를 전부 다시 점검해 보고 싶으니, 따로 사무실을 준비하라고. 회사에서 떨어져 있는 곳으로. 하지만 갑자기 사무실을 어떻게 구하겠어요? 급하게 호텔 객실을 하나 잡을 수밖에 없겠죠? 그러면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 아시아 지부의 보안 감사 파트 소속인 마리 H. 스완슨 과장은 부사장님의 지시에 따라 호텔 객실에 ‘감금’당한 채로 서류를 검토하게 될 거예요. 회, 사, 도, 못, 가, 고, 주, 말, 도, 없, 이.”
스타카토로 딱딱 끊어지는 완의 말소리가 한규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한규호는 고개를 돌려 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규호, 당신이 가장 우선이에요. 그 누구도, 당신보다 가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어요.”
완이 말했다.
한규호는 말없이 그런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사실 아무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한규호의 이마에 완이 다시 입을 맞추었다.
“신시아가 직접 세운 계획이에요. 당신을 위, 해, 서, 그러니 조금만 참아 줘요. 늦어도 1시 전에는 돌아올 거예요. 점심 같이 먹어요.”
완이 몸을 일으켰다.
“진짜 가 봐야겠어요. 이러다 지각할 것 같아요.”
완은 그렇게 말하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한규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완이 몸을 돌려 한규호를 보며 말했다.
“아니. 그대로 누워 있어요. 지금 당신이 일어나면 진짜 지각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 말에 한규호는 자신이 알몸으로 누워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조금 더 자요. 어젯밤 무리했으니까, 그리고 간단한 아침을 만들어 놨어요. 커피만 끓여서 같이 먹어요. 점심 같이 먹어야 하니까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요. 아, 그리고!”
완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신시아가 조만간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던데요?”
“……‘챔버’ 부사장?”
“네.”
“언제?”
“당신이 편한 시간에요.”
“편한 시간이라. 편하지 않으면 같이 저녁을 안 먹어도 되겠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한규호가 말했다.
그 말에 완은 다시 한규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규호, 당신이 가장 우선이에요. 당신이 싫으면 나도 싫어요.”
그러고는 한규호의 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더 거절 못 하겠군.”
한규호가 말했다.
“신시아에게는 고마운 것이 많아요. 그리고 신시아가 당신에게 침대를 양보해 줬어요. 그러니 괜찮으면 당신도 양보해 줘요.”
완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규호에게 입을 맞추었다.
조금 전 입맞춤보다 더 길고, 깊은 입맞춤이었다.
***
한규호는 완의 말대로 조금 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더 잠을 잘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누워 있는 상태로, 왜 부사장이, 신시아 챔버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는지를 생각했다.
그녀와의 첫 번째 접촉은 베네수엘라에서였다.
베르나가 납치된 것을 알게 된 앤 챔버는 마이애미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앤 챔버의 법적 보호자인 신시아 챔버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당시 앤 챔버는 격양되어 있었다. 베르나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끔찍한 사진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베르나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왜 비행기를 타지 않았느냐는 신시아 챔버의 질문에 마치 반항하는 사춘기 소녀처럼 앤 챔버는 소리를 질렀다.
-걱정하지 마세요. 알다시피 나는 죽지 않으니까. 죽을 수 없으니까. 염동력에 의해 보호받는 앤 챔버는, 멀쩡히 살아 돌아갈 수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보고하면 된다고요!
신시아 챔버의 반응은 한규호의 예상 밖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 둬. 엄마는 지금 진짜 화났어. 나중에 돌아오면 이번 일에 대해서 긴 대화를 나눠야 할 거야.
마치, 엄마처럼, 사춘기 딸을 야단치는 엄마처럼 말했다. 한규호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전화기 너머에서 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얼굴을 떠올렸다.
-미스터 한, 우리 애(my kid)를…… 잘 부탁해요.
그렇게 말했었다.
마치 앤 챔버의 진짜 엄마처럼,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은 도쿄 아카사카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 상황실이었다.
허드슨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였다.
-한 번 통화했었더랬죠. 반가워요. 신시아 챔버예요. 앤의 엄마예요.
상황실의 초대형 스크린 너머 중년 여성이 반가움이라는 감정을 얼굴에 띠우고 인사를 해 왔었다. CIA의 신시아 챔버가 아니라, 앤의 엄마라고 말했다.
주일미국대사관의 1급 보안 구역인 통신 상황실의 핫라인을 활용해 그녀는 마치 마음씨 좋은 이웃 아줌마처럼 말을 건네 왔다.
-신시아라고 불러 줘요.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어머, 내가 너무 말을 편하게 하고 있나? 미안해요. 마치 딸 남자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라. 사실 앤이 남자친구를 소개해 준 적은 없었지만.
한규호는 가벼운 분위기가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정색하며 물었다.
트레이시에게 같이 자라고 지시했냐고. CIA가 그런 지시를 내렸냐고.
그러나 분이기는 바꾸지 못했다.
신시아 챔버는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말투로,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트레이시를 신경 써 줘서 고맙다고.
이런 말도 했었다.
-보고 싶었어요. 내 딸들의 마음을 흔든 남자가 누구인지.
한규호의 얼굴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곤란하겠는데.”
한규호가 중얼거렸다.
CIA의 신시아 챔버는 괜찮다. 상대할 수 있다. 그러나 앤 챔버, 그리고 완의 보호자인 신시아 챔버로 다가온다면 상대하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녀와의 저녁 식사가 이전과 비슷한 분위기로 흘러간다면, 상당히 피곤한 저녁 식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흘러가면 곤란한데…….”
한규호는 다시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한규호는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그 모습 그대로 침대에서 나왔다.
몸을 일으킨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화장대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이었다.
완이 놓고 간 것일까?
화장대에 놓여 있는 물건은 스마트폰뿐만이 아니었다.
어제 그녀가 건네준 카드 지갑과 남성용 속옷, 그리고 속옷 위에는 곱게 접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한규호는 가장 먼저 쪽지를 집어 들어 펼쳤다.
동글동글한, 누가 봐도 여자가 쓴 쪽지가 쓰여 있었다.
-홍콩에 있는 동안은 이 전화기를 쓰도록 해요. 제가 사용하는 번호를 등록해 놓았으니, 목소리가 듣고 싶으면 통화 버튼만 누르면 돼요.
한규호는 다시 화장대의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완이 깜빡 잊고 놓고 갔다고 생각했던 스마트폰은 그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언제부터 준비해 놓고 있었을까?
한규호는 다시 쪽지로 시선을 쭉 내려, 계속 읽어 갔다.
-필요한 거,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지갑 안에 카드로 사요.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 부담 가질 것 같지는 않지만.
한규호는 쪽지를 내려놓고 어제 그녀가 건네준 카드 지갑을 열어 보았다.
출입용 카드 키와 함께 투구를 쓴 로마 병정의 얼굴이 그려진 은색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가 꽂혀 있었다. 카드에는 마리 스완슨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었다.
“부담 가질 필요 없다 하셨으니, 차나 한 대 뽑아 볼까나.”
한규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저 쪽지를 읽어 보았다.
-팬티는 일단 브리프를 꺼내 놨어요. 혹시 트렁크가 편하면 드레스 룸 들어가서 오른쪽 첫 번째 옷장, 첫 번째 서랍에 넣어 놨어요.
한규호는 팬티를 집어 들었다.
어제 그녀의 쇼핑 바구니 안에 들어 있던 바로 그 속옷이었다. 어느새 빨래에 건조까지 마쳤는지, 기분 좋은 뽀송뽀송함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한규호는 그녀가 꺼내 놓은 브리프를 입고, 계속 쪽지를 읽었다.
쪽지의 나머지는 조금 전 완에게서 들었던 내용이었다.
오전에 잠깐 회사에 갔다가 돌아올 것이고, 점심을 같이 먹을 테니 조금만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조만간 신시아 챔버와 함께 저녁을 먹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규호는 천천히 쪽지를 접어 카드 지갑에 넣었다.
거실로 나가자 완의 말처럼 식탁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계란이 다섯 개는 들어갔을 정도로 거대한 오믈렛, 3층으로 쌓인 팬케이크, 꿀, 베이글과 크림치즈, 두 종류의 시리얼이 식탁에 놓여 있었다.
“……간단한 아침이라고?”
한규호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