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eet Day (5)
조화롭지 않은 식탁이었다.
산더미 같은 샐러드와 양으로는 절대로 밀리지 않겠다는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라자냐, 그리고 장정 몇은 거뜬히 먹고도 남을 거대한 티본스테이크 두 덩어리도 그랬지만, 식탁 한쪽에 놓여 있는 김치 접시와 녹색 소주병은 확실히 식탁의 조화를 깨트렸다.
그렇다고 맛의 조화를 깨트린 것은 아니었다.
한규호의 생각대로, 스테이크와 소주의 궁합이 괜찮았다. 라자냐의 느끼함도 잡아 주었다.
“생각 외로 티본스테이크와 소주가 어울리네요. 김치도.”
완도 같은 생각인 듯, 포크로 김치 한 조각을 찍으며 말했다.
“의도한 것 아니었어?”
한규호가 큐브 모양으로 썰린 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아니요. 그냥,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사 왔죠,”
그 말을 들은 한규호는 따로 반응하지 않고, 그저 입안에 고기를 씹었다.
“잘했죠?”
그런 한규호에게 완이 다시 물었다.
한규호는 살짝 끄덕여 주었다.
완은 그런 한규호를 보면서 미소 짓고는 비어 있는 한규호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면서 물었다.
“홍콩에는 언제 왔어요?”
“오늘.”
한규호가 말했다.
“그럼 공항에서 바로 우리 회사로 온 거네요.”
“뭐…….”
한규호가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이 그랬는데, 그렇다고 말하자니 뭔가 쑥스러웠다.
“얼마나 기다렸어요?”
완이 다시 물었다.
“얼마 안 기다렸어.”
한규호가 말했다.
“그러니까 얼마나.”
“조금.”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진짜로 궁금해서 그래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오전 8시에 방콕에서 출발하는 타이항공 0600편에 탑승한 한규호가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정오가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다.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왔고, 찾을 짐이 없는 한규호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서두르면, 점심시간을 마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완을 놀라게 해줄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회사가 위치한 국제상업센터로 향했고, 국제상업센터 로비에 완이 신시아 챔버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오후 4시까지, 그리 짧지 않은 세 시간을 로비에 기다려야 했다.
바보 같은 짓이었어.
한규호는 포크를 움직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고기가 괜찮네.”
한규호가 말을 돌렸다.
“방콕에서 왔어요?”
한규호가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맞네요. 그럼 두 시간에서 세 시간?”
한규호의 손이 멈추었다.
“궁금해서 찾아봤어요. 방콕에서 오는 비행기가 언제 있는지를요. 보통 아침 일찍 아니면 오후 출발이더라고요. 오후 가장 빠른 시간대 비행기가 에미레이트 항공의 오후 1시 45분 출발 편인데, 그걸 타면 그 시간에 로비에 도착할 수 없었을 테니, 오전 출발 편을 탔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오전에 가장 늦은 항공편이 타이스마일의 10시 출발 편이고, 그러면 오후 한 시 정도에 도착했을 테니, 공항 나오고, 여기 찾아오고 했다면 대략 두 시, 그럼 적어도 두 시간은 기다렸겠구나. 그런 계산이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어쩐지 규호 당신이 LCC를 타고 오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국적 항공사 중에서는 8시에 출발하는 타이항공이 있더라고요. 대충 12시쯤 도착했고, 공항 나오고 회사 오는 데 한 시간, 그러면 오후 한 시부터 대충 세 시간 기다렸다? 그래서 두 시간, 아니면 세 시간.”
한규호는 오랜만에 눈동자에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낸 채로, 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운 여자.”
한규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네? 뭐라고요?”
“아니야.”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포크를 움직였다.
“기뻤어요.”
완이 말했다.
한규호가 다시 고개를 들어 완을 바라보았다.
“뭐가 기뻤나요?”
한규호가 물었다.
완이 다시 나이프와 포크를 잡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그녀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에 가져가며 말했다.
“큰 건물이고 오가는 사람도 많아요. 로비 말고도 출입구가 여러 곳 있고, 지하 주차장을 이용한다면 애초에 로비에 갈 일도 없어요. 약속 없이 찾아왔다면 우연히 마주칠 가능성보다 못 마주칠 가능성이 더 커요. 똑똑한 규호 씨가 그걸 모를 리가 없죠.”
한규호는 고기를 썰어 가는 그녀의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규호 씨는 기다리기로 한 거죠. 마주치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헛고생이 될 것을 감수하면서, 깜짝 놀래켜 주겠다는 생각에, 놀란 내 얼굴을 보고 싶어서. 로비에 서서 긴 시간을 기다려 준 거죠.”
완은 조금 큰 주사위 모양으로 썰어 낸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었다. 그리고 한규호에게 내밀었다.
“어서요. 팔 아파요.”
한규호는 입을 벌려 그녀가 내민 스테이크를 받아먹었다.
“기뻤어요. 당신의 그 무모함이, 그 장난기가, 그 기다림이.”
완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한규호는 그녀가 건네준 고기를 씹으며, 속으로 다시 생각했다.
이제는 진짜 못 당하겠네.
“바보가 된 기분이군.”
한규호가 투덜거렸다.
“당신과 헤어지고 계속 생각했어요. 얼마나 기다렸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기다렸을까?”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침묵했다.
잠깐의 침묵 후에, 다시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언제 떠날까.”
완이 말했다.
한규호는 완의 표정의 미묘한 변화를 보았다.
“언제 갈 거예요?”
완이 다시 스테이크를 썰며 물었다.
한규호는 완의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 갈까?”
한규호가 되물었다.
“제가 결정해도 되나요?”
완이 물었다.
“참고해 보도록 하지요.”
한규호가 말했다.
그러나 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낯 뜨거운 소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말을 못 하겠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에 나온 완의 대답이었다.
“그냥 말해 줘요. 언제까지 있을 생각으로 온 거예요?”
한규호는 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미얀마의 산지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 얼굴이었다.
“2주.”
한규호가 말했다.
“보름 정도 신세를 지려 하는데. 괜찮을까?”
한규호의 말에 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안 되려나?”
한규호가 물었다.
“미묘하네요.”
완이 말했다.
“미묘하다? 어떤 부분이.”
“어쩌면 오늘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장을 보면서, 집에 도착했을 때, 당신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걱정했어요.”
한규호는 스테이크를 썰면서 그녀가 집에 들어올 때 숨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걱정에 비하면, 2주는…… 참 좋네요. 좋은데.”
한규호는 완이 썰어 건네준 스테이크보다 조금 더 크게 스테이크를 썰었다.
“지겹다고 쫓아내지나 말라고.”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썰어 놓은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완에게 내밀었다.
완의 시선이 스테이크를 향했다가 다시 한규호에게로 향했다.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한규호가 내밀어준 스테이크를 받아먹었다.
***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저녁이 끝나고, 한규호는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커피를 끓여 오겠다는 완을 씻으라고 억지로 욕실로 밀어 넣고, 그녀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뒷정리를 할 생각이었다.
한규호의 예상대로, 음식은 잔뜩 남아 있었다.
한규호는 보관할 음식과 버릴 음식을 구분해, 보관할 음식을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고, 버릴 음식은 한곳에 모아 두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완에게 물어보고 처리할 생각이었다.
적당히 식탁을 정리한 다음, 그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에 주방 세제를 묻혀 그릇을 닦아 내면서, 마지막으로 설거지를 했던 것이 언제였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에서 그는 밥을 해 먹지 않았다. 그래서 설거지를 할 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설거지를 한 게 언제였지?
그렇게 기억을 더듬다 분당에 있는 정지혜의 집에서, 진도0 이규철 팀장 미망인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설거지를 도왔던 것을 기억해 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상당히 오래된 기억 같았다.
한국에 가면 한번 들러야 하겠군. 종연이 형도 한번 보고.
한규호는 거품이 일어난 수세미로 스테이크가 담겨 있던 접시를 꼼꼼하게 닦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뭐 하고 있어요?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완이 놀란 눈으로 고무장갑을 낀 한규호를 보고 있었다.
“밥값.”
한규호가 말했다.
“밥값요?”
“그래. 기둥 서방질을 하려면 기본적인 눈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지.”
한규호가 말했다.
완의 놀란 눈이 반달 모양으로 바뀌었다.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완은 그렇게 말하며 한규호에게 다가와 그 등을 가볍게 쓸어 주었다.
뒤늦게 민망함이 찾아온 한규호는 아무런 말없이 계속 설거지에 집중했다.
한규호가 설거지를 끝내고, 싱크대에 묻어낸 물기도 대충 닦아 냈을 때, 파자마를 입은 완이 다시 거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물일곱 살의 과장이라……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젊은 것 같은데.”
한규호가 화장기 없는 완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칭찬이죠?”
완이 물었다.
“……뭐.”
한규호는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며 고무장갑을 벗었다.
“커피 마실 거죠?”
완이 부엌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럴까.”
한규호가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어떻게 해 줄까요?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아니면 라떼? 믹스커피는 없어요.”
“그냥. 아메리카노로.”
“뜨거운 거? 아니면 차가운 거?”
“얼음 있어?”
“있어요, 잠깐 앉아 기다려 줘요.”
완의 말에, 한규호는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소파에 앉는 대신 창가로 다가갔다.
밖은 어두웠고, 실내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래서 주간에는 멋진 수평선을 보여 주던 통 창은 거울처럼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한규호는 창가에 붙어 손으로 그림자를 만들고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바다였지만, 홍콩 앞바다를 오가는 선박들이 켜 놓은 불이 수면 위에 반딧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달이 뜨면 볼만하겠군.
한규호는 창밖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달이 뜨면 거실의 불을 끄고, 그 달을 보면서 술 한잔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꺼졌다.
한규호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듯, 완이 거실의 전등을 꺼 버린 것이다.
한규호는 손을 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이 없음에도 생각 외로 괜찮은 밤바다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전망이 괜찮죠?”
손에 머그컵 두 개를 든 완이 다가오며 말했다.
“이 집을 회사에서 구해 줬다고?”
한규호가 머그컵 하나를 받아 들며 말했다.
“좋은 회사죠?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 자리 만들어 줄까요?”
완이 말했다.
“당신 부하로 말이지.”
“네. 그건 양보 못 해요.”
완이 웃으며 말했다.
한규호도 그런 완을 보며 웃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여기는 월세가 얼마야?”
한규호가 물었다.
“4만 8천 홍콩달러요. 미화로 하면 5천 달러 정도 되겠네요.”
“좋은 회사군.”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담긴 머그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방 두 개짜리 콘도미니엄이 바다가 보인다는 이유로 한화로 600만 원 정도의 월세라니. 돈이라면 부족함이 없는 한규호라고는 해도 수긍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맘에 들어요? 사 줄까요? 별장처럼 쓸래요?”
완이 물었다.
“사 준다고? 당신이?”
“제가요.”
“돈 많아?”
“잊었어요? 저 식양이에요. 이 정도 콘도미니엄이라면 열 채 정도는 선물해 줄 수 있어요.”
완이 말했다.
“에어비앤비로 굴리면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한규호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네요. 우리는 여기서 살고, 그 방은 당신이 관리하면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데요.”
“완벽한 기둥서방이군.”
한규호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부탁이 있어요.”
옆에 서 있던 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규호가 고개를 돌렸다.
완은 여전히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주일.”
완이 말했다.
“앞으로 딱 일주일만. 일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줘요.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딱 일주일만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어요.”
완이 말했다.
한규호는 말없이 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한규호와 눈을 맞췄다.
“해 줄 수 있나요?”
완이 물었다.
“그래.”
한규호가 말했다.
완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그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한규호는 그 입술에 자신에 입술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