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eet Day (4)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규호는 다시 카드 지갑을 열어 그녀의 주소를 확인했다.
‘Residence Bel-air Phase 6 #2611.’
26층에 있는 2611호가 그녀의 집이었다.
한규호는 복도를 걸어 2611이 쓰여 있는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카드 키를 문에 가져다 댔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규호는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거실이 나타났다.
그러나 한규호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거실이 아니라, 거실 통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었다.
신발을 벗고, 천천히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간 한규호는 창가로 다가갔다.
남중국해가 창밖으로 펼쳐져 있었다. 수평선을 향해 기울고 있는 태양이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여 가고 있었다.
“……진짜 비싸겠군, 여기는.”
한규호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잠시 바다를 바라보다 한규호는 몸을 돌려 집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거실을 중심으로 분리된 부엌과 두 개의 방이 배치된 형태의 콘도미니엄이었다.
한규호는 좌측 방문을 열어 보았다. 완의 말처럼 드레스 룸으로 쓰이는 듯 많은 옷이 걸려 있었다.
한규호는 걸려 있는 옷들을 살펴보았다. 여성 정장과 일상복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옷들을 살펴보면서, 한규호는 조금 전 보았던 완의 모습을 떠올렸다.
몸매가 살짝 드러나는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옷은 없겠지.
그녀의 몸매 라인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다른 방은 침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노트북이 올려진 책상과 큰 거울이 달린 화장대, 그리고 한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실은 마치 청소가 끝난 호텔 객실처럼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침대 시트도 각이 잡혀 있었다.
한규호는 부엌으로 나가 보았다. 커다란 냉장고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냉장고 안에는 각종 식재료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조리하는 것만으로도 바로 먹을 수 있는 즉석식품도 보였다.
-배가 고프면 냉장고에 간단히 먹을 것이 있으니 일단 꺼내 먹어요. 하지만 너무 많이 먹지는 말아요. 있다가 저녁 먹어야 하니까. 알겠죠?
한규호는 조금 전, 완의 말을 떠올렸다.
살짝 배가 고픈 감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는다는 원칙을 뒤로하고 거실로 가서 티브이를 틀었다.
한규호는 소파에 걸터앉아 리모컨을 들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금세 흥미를 잃고 티브이를 꺼 버렸다.
집주인이 올 때까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잠을 자는 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기둥서방이군.”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그대로 몸을 눕혔다.
***
누웠던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던 한규호는 눈을 떴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물론 일반 사람이라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작은 소리였지만, 한규호는 그 작은 소리를 들었다.
한규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현관으로 다가가려다 갑자기 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군. 나도.”
한규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현관 쪽으로 발을 옮겼다.
타이밍 좋게, 현관문이 열리며 완이 모습을 보였다.
“다녀왔어요.”
현관 앞에 선 한규호를 보고 완이 미소를 지어 주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 무언가가 쥐여 있었다. 핸드카트, 마트에서 장 볼 때 사용하는 바퀴 달린 휴대용 장바구니, 핸드카트의 손잡이가 그녀 손에 잡혀 있었다.
“……어서 와.”
한규호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많이 기다렸죠? 뭐 했어요?”
완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그냥. 잤어.”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카트를 받아 들었다.
보이는 것보다 무게감이 상당했다.
“뭐 좀 먹었어요? 배 안 고파요? 아, 그것 좀 이리 가져다줘요.”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온 완은 식탁에 가방만 내려놓고 바로 부엌 쪽으로 향했다.
“많이도 사 왔군. 그리 가볍지 않은데.”
한규호는 카트를 식탁 쪽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일단 급하게 생각나는 것만 사 왔어요.”
완은 그렇게 말하고 카트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제일 먼저 식탁에 올려진 것은 스테이크용 고기였다.
T자 모양의 뼈를 가운데 두고 안심과 채끝등심 부위가 붙어 있는 소고기가 두 덩어리 나왔다.
손님이 오는 건가?
최소 1kg은 넘을 것 같은 소고기가 두 덩어리. 구워지면 용적이 줄어든다고 해도, 두 사람이 먹기에 절대로 적다고 할 수 없는 양이었다.
두 번째로 모습을 보인 것은 얇게 썰린 소고기였다.
정육점에 가서 ‘사장님. 불고깃감 주세요.’ 하면 줄 것 같은 형태로 썰려 있었다.
그런 한규호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불고기 양념통이 장바구니에서 모습을 보였다.
한규호는 식탁에 놓인 불고기 양념통을 들어 보았다.
한국 식품회사의 상표와 ‘사리원 불고기 양념’이라는 한글이 쓰여 있었다.
어디서 이런 것을 샀을까?
한규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장바구니 안을 살펴보았다.
장바구니 안에는 한국 식품회사의 김치, 한국 식품회사의 즉석 김치찌개, 즉석 된장찌개가 보였고, 한쪽 구석에는 녹색 소주병도 있었다.
“요즘 한국 음식이 인기를 끌어서, 마트 가면 웬만한 한국 식료품은 다 팔아요.”
완이 말했다.
“……신기하군.”
한규호는 장바구니에서 소주병을 꺼내면서 그렇게 말했다.
티본스테이크에 소주. 생각 외로 잘 어울릴지도.
한규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장바구니에서 식료품을 꺼냈다.
샐러드용 채소, 빵 같은 것들이었다.
상당히 많은 식료품을 꺼냈는데도, 아직 장바구니 안에는 내용물이 남아 있었다.
장바구니 가장 아래에 깔려 있는 것은 종이박스였다. 속옷만 입은 백인 남자가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브리프와 트렁크 각각 세 개씩 사 왔어요. 옷 가방 안 가지고 왔죠?”
완이 속옷 상자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한규호는 완을 바라보았다.
여권과 지갑만 달랑 들고 홍콩에 오기는 했다. 지갑에는 신용카드와 3천 달러 정도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필요하면 사고 버리는 것이 익숙한 한규호는 여행용 가방을 싸는 일이 별로 없었다.
완은 한규호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속옷을 사 온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규호는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상상이 안 돼요.”
“뭐가?”
“당신이 여행 간다고 가방 싸고 그러는 거. 상상이 가지 않아요.”
완이 한규호를 보며 말했다. 그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한규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맞받아쳐 주고 싶은데,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오늘은 속옷만 갈아입고, 다른 옷은 내일 같이 가서 사도록 해요. 옷을 살 때는 무조건 입어 보고 사야 해요. 귀찮다고 인터넷에서 사면 꼭 후회하게 돼요.”
완이 말했다.
“……다른 옷?”
“일단 요리부터 할게요. 배고프죠? 밥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완은 그렇게 말하고 스테이크용 고기를 집어 들었다.
설마 하던 한규호의 생각대로 스테이크용 티본 두 팩을 모두 집어 들었다.
한규호는 그 모습을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왜요?”
한규호의 시선을 느낀 완이 물었다.
“옷.”
“옷?”
“안 갈아입어?”
한규호가 물었다.
그녀는 회사에서 입고 있던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완이 두 팔을 살짝 벌리며 몸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왜요, 별로예요? 안 어울려요?”
한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진실을 말하기엔 쑥스러웠다.
“안 어울려요?”
완이 두 팔을 살짝 벌리며 한규호에게 다시 물었다.
“……불편하지 않겠어?”
한규호가 말했다.
“괜찮아요. 신축성이 있으니까. 옷 갈아입을까요?”
“……아니. 당신이 편하면, 뭐.”
“저는 편해요. 내가 요리하는 동안 소파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더 편해질 것 같아요.”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속옷 박스를 집어 들고 몸을 돌렸다.
***
완의 지시에 따라 어색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들고 넷플릭스를 탐색하던 한규호가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소리에 다시 식탁으로 향한 시간은 완이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하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힐끔힐끔 그녀가 준비하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짧은 시간에 가능할까 싶었는데, 식탁에는 이미 샐러드와 빵, 그리고 티본스테이크 두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손님이 더…… 오는 건가.”
한규호가 중얼거렸다.
“아니요? 왜요?”
“살짝…… 많지…… 뭐.”
한규호는 그렇게 얼버무리며 식탁에 앉았다.
“부족한 것보다 남는 게 좋지 않아요?”
앞치마를 입은 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샐러드에 드레싱을 치면서 말했다.
“남는다……. 그런 수준이 아닌데.”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배고프죠? 먼저 먹고 있어요.”
완이 다시 오븐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설마 나올 음식이 또 남아 있나?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어 스테이크를 썰었다.
완의 권유처럼 먼저 식사를 시작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스테이크가 제대로 구워졌는지 궁금했다.
조금 전, 굽기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는 완의 질문에, 한규호는 상관없다고 말했고, 그녀는 미디엄으로 굽겠다고 했었다.
안심과 채끝등심이 같이 붙어 있는 티본스테이크는 쉬운 음식이 아니었다. 단순히 굽는 것으로 끝나는 요리가 아니었다.
같은 온도에서 같은 시간을 구우면 안심보다 등심이 더 빨리 익었다. 양쪽 부위를 같은 굽기로 구워 내려면 상당한 실력이 필요했다. 실제로 전문 요리사의 기량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티본스테이크를 굽게 하는 일도 있었다.
요리를 잘한다고 해도, 전문 조리인이 아닌 일반인이 두 부위를 같은 굽기로 구워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규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우선 먼저 익는 채끝등심 부위를 썰자, 핑크빛의 속살이 보였다.
중심을 기준으로 전체에 약 사 분의 일 정도가 핑크빛을 띠고 있었다.
등심은 완전한 미디엄.
썰린 단면을 본 한규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안심은 미디엄레어와 미디엄의 중간쯤에 위치할 가능성이 컸다. 단면에 조금 더 붉은 기가 돌 가능성이 있었다.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심 부위로 칼을 가져갔다. 그리고 썰린 조각을 가져와 등심과 비교해 보았다.
같았다. 둘 다 사 분의 일가량 분홍빛을 띤 완벽한 미디엄 굽기였다.
“잘 구웠죠?”
어느새 다가온 완이 물었다.
그녀의 손에 오븐용 용기가 들려 있었다.
“스파게티?”
“라자냐요. 급하게 만들어서 맛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한규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 여자가 CIA의 지시를 받아 날 배 터져 죽이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반주할 거죠? 혹시 몰라서 소주를 사 오기는 했는데. 와인도 있긴 있어요.”
마지막으로 김치를 접시에 담아 온 완이 앞치마를 풀며 말했다.
“……소주로 할까.”
한규호가 말했다.
와인이든, 소주든, 반주가 없어도 상관없었지만, 일부러 사 온 그녀의 성의를 생각해서 소주로 결정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완은 그렇게 말하며 소주잔 두 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소주잔에는 두꺼비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또 어디서 구했어?”
“한인 마트 가면 없는 게 없어요. 이것 좀 따 줘요.”
완은 그렇게 말하며 소주병을 한규호에게 건넸다.
한규호는 소주병을 받아 들고 뚜껑을 땄다.
“한국에서는 스스로 따르면 안 된다고 하던데. 맞나요?”
완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소주잔을 내밀었다.
“별걸 다 아는군.”
한규호가 그녀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며 말했다.
“칭찬이죠?”
“……뭐.”
완은 한규호에게서 소주병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한규호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건배할까요?”
완이 자신의 소주잔을 들며 말했다.
“무엇을 위해?”
한규호도 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 멋진 날을 위해서(To the sweet day).”
한규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완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