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06화 (306/386)

One Sweet Day (2)

그가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를 보았을 때, 그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녀의 다리가 제일 먼저 반응을 보였다.

두 발이 마치 땅에 못이라도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완은 그렇게 그 자리에서 멈춰선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완의 시야가 천천히 좁아졌다.

마치, 조리갯값이 낮은 카메라 렌즈처럼, 초점 부위를 제외한 시야의 나머지 부분이 흐릿하게 아웃포커싱 되었다.

그 남자의 얼굴만이,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만이 유일하게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의 시야에 한규호만이 남아 있었다.

***

완은 두려웠다. 두려움이 그녀의 가슴을 천천히 적셔 갔다.

또렷하게, 선명하게 보이는 한규호의 얼굴을 보면서, 혹시 환각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완의 마음 안에서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완은 알고 있었다.

환각이라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 마치 현실처럼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완은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완이 아직 샤오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그 시절, 다음 식양으로 만들어지기 위해 구 교수의 집, 2층 구석의 작은 방에서 매일 밤 울며 잠들어야 했던 그날.

시곗바늘이 3이라는 숫자에 거의 다가간 그 새벽. 일상이 되어 버린 악몽은 언제나처럼 같은 시간에 그녀를 깨웠다.

언제나처럼 눈물과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문을 보았을 때, 문가에 서 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미소를 머금고.

모닥불 앞에서 전통복을 입고 빙글빙글 춤을 출 때, 지어 주던 미소를 머금고, ‘나의 샤오메이’라고 말하며 안아 줄 때 보여 주던 미소를 머금고, 문간에 서서 작은 샤오메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리러 왔구나. 아빠가 드디어 나를 데리러 왔구나.

작은 샤오메이는 몸을 일으켰다. 아빠에게 가기 위해, 그 품에 안기기 위해.

그러나 몸보다 마음이 앞선 작은 샤오메이는 중심을 잃고 침대에 다시 쓰러져 버렸다.

짧은 시간이었다. 불과 1초도 되지 못하는 짧은 시간이었다. 시선에서 아빠를 놓친 것은 그렇게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아빠는 그곳에 없었다.

문가에 서서, 다정한 미소를 지어 주던 아빠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작은 샤오메이는 문밖으로 나가면 아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못 본 것이라고, 허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다. 너무나 생생한 미소였다.

그래서 아빠를 찾아 방을 나갔다. 어둠이 가득 내려앉은 구 교수의 집을, 평소라면 어둠과 구 교수가 무서워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어두운 집을 돌아다니며 아빠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빠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한 곳, 절대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구 교수의 방을 제외하고, 집의 모든 부분을 돌아보았지만,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빠를 찾지 못한 작은 샤오메이는 울었다.

계단에 앉아, 구 교수에게 들키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 가며, 동이 터 오를 때까지 울었다.

아빠가 그곳에 올 리가 없다는 것을, 실제로 그곳에 왔다면 사랑하는 딸을 남겨 두고 갈 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환각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처음 알았으니까.

***

완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환각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눈이라도 깜빡하면, 아주 잠깐이라도 그를 놓치면, 아빠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그녀의 신체 말단까지 퍼져 나갔다.

완은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마치 마비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몸이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완은 그대로 멈춰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서 있다가, 아빠처럼 그가 사라져 버리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완은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사라지기 전에, 아빠처럼 사라져 버리기 전에,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의 얼굴에, 그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선명한 그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 순간 또 다른 공포감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에게 닿으면, 손을 가져가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신기루처럼 허공에 흩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찾아왔다.

완은 한규호의 두 발자국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범위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그녀는 발을 멈추었다.

그녀가 멈추자 그의 얼굴에 변화가 일어났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미소, 뒤센 미소(Duchenne smile)라고 불리는 자연스러운 웃음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완도 그 미소를 보았다.

그 미소를 보면서, 눈앞에 보이는 이 남자의 모습이 허상이 아닐지도.

어쩌면 진짜로 그가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가 약속을 지켜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방콕으로 갈까요?”

그렇게 물었었다. 하지만 완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방콕으로 갈게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나중에 당신이 필요하면 그때 부탁하지.

한규호의 대답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지, 전화 너머 한규호가 야속하게 말했다.

“고집불통.”

완이 말했다.

생각하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느낀 섭섭함이 무의식적으로 말로써 표출된 것이다.

완은 자신의 말에 놀랐다.

투정을 부렸다. 어떠한 의도도 담겨 있지 않은, 자연스러운 투정이었다.

-사람이나 소개해 줘.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조금 더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보고 싶지 않아요? 나는 보고 싶은데? 나만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알았어요.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되죠?”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 번호로 연락을 달라고 전해 줘.

한규호의 대답이었다.

그 대답에 그녀의 마음이 조금 더 내려앉았다.

보고 싶었다. 만나고 싶었다. 하다못해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그의 말에, 그녀의 마음이 조금 더 내려앉았다.

“……너무하다 생각하지 않아요?”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 버렸다.

네. 알겠어요. 적당한 사람을 빨리 찾아서 이 번호로 연락하라고 할게요.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항상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에게 감정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고 결심했음에도, 전화 통화만 하면, 한규호의 목소리만 들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놓은 진짜 감정이 자꾸 표면 위로 떠올랐다.

-이번 일이 끝나면 홍콩에 들르도록 할게.

그가 말했다.

같은 말투였다.

지금까지의 야속했던 말투와 같은 말투였다.

그러나 그 말투가 그녀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마치 따뜻한 미온수처럼,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천천히 적시어 갔다.

야속함이, 서운함이 그 미온수에 천천히 녹아 들어갔다.

“항상 그런 식이에요. 사람 마음은 다 상하게 해 놓고, 마지막에 그렇게 말하면 화낼 수가 없잖아요.”

퉁명스러운, 그러나 작은 행복감이 담겨 있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런가.

그가 말했다.

그에게서 제일 많이 들은 말. 하지 말라고 했던 말. 사실은 그리 싫어하지 않는 그의 ‘그런가’.

“또 그런가. 하지만 봐줄게요. 약속했어요. 당신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죠. 나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완이 말했다.

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

미얀마 서쪽에 위치한 고산도시 마투피를 약 50km 남긴 히말라야의 산자락 어딘가에서, 그녀는 거칠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마치 과호흡 증후군의 증상처럼 그녀의 숨소리는 빠르고 거칠었다.

그렇게 힘겹게 걸어가던 그녀의 발이 결국에는 멈추고 말았다.

제대로 영양 보급을 받지 못한 상태로, 8시간 동안 산맥을 오르고, 계곡을 넘고, 능선을 타다 헝거 낙(Hunger Knock)이 찾아 온 것이다.

혈당이 저하되는 것을 감지한 뇌가 경고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아니, 경고신호는 진작부터 보내오고 있었다.

경고신호를 보냈음에도 신체 활동이 계속되자 그녀의 신체 기능을 제한하는 것이다.

완은 알고 있었다. 더는 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계속 갈 수 있다는 것을.

완은 결론을 내렸다. 그의 발목을 잡지 않겠다고.

그래서 그에게 말했다.

가라고.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현명하게 생각하라고. 꺼져 버리라고.

차갑고, 냉혹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가 떠난 후, 두 팔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로 기다렸다.

인생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리고 그를.

몇 시간이 흐른 후, 그녀의 소망처럼, 밤도, 그리고 그도 다시 돌아왔다.

작은 새 몇 마리와 여기저기 구멍 난 텐트 천을 들고, 그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그에게 완은 소리쳤다.

왜 돌아왔냐고, 같이 죽어 주면 기뻐할 것으로 생각했냐고.

소리치는 그녀에게 한규호가 말했다.

“데리고 나가 줄 수 있냐고 물었지. 데려갈 수 있다고 내가 말했지. 데려갈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와야지. 같이 가야 하니까.”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데리고 나가 줄 수 있나요?

그가 말했다.

“그럴 수 있지. 그럴 거고.”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싼 후, 엄지손가락으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면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완은 오랜만에,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온몸을 떨면서 한참을 울었다.

그가 잡아 온 새를 구워 먹고, 낙엽으로 덮은 텐트 천 안에 그에 품에 알몸으로 안긴 채로, 따뜻한 그의 온기를 느끼면서,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말해 준 적 없는 이야기, 고향에 대해, 아빠에 대해, 삼촌에 대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아저씨들에 대해, 구 교수에 대해, 전대 식양에 대해, 그리고 그에게 이름을 주고 사라질 소녀, 완에 대해, 그리고 아빠가 부르던 이름, 샤오메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따뜻한 두 팔로 그녀를 안아 주며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미국으로 가고 싶어요.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

그가 말했다.

도와줄 수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도와줄 수 있어.

그가 말했다.

미국으로 가도 될까요?

그녀가 물었다.

가도 괜찮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이제는 잠들어도 괜찮아.”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

미소를 띠고 있던 그의 입이 열리는 모습이 완의 눈동자에 비쳤다.

“오랜만이네.”

한규호가 말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그녀의 귀로 흘러 들어왔다.

환청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한 그의 목소리였다.

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로 그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그와 남은 거리는 이제 한 발자국.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완의 조심스러운 손이 한규호의 뺨에 천천히 닿았다.

환각이라면, 허상이라면 느껴지지 않을 온기가 그녀의 손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뺨에 닿아 있는 그녀의 손 위로, 한규호의 손이 천천히 포개어졌다.

그녀의 손바닥에, 손등에 그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오랜만……이에요.”

완이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