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eet Day (1)
홍콩 까우룽(九龍) 반도 서쪽에 위치한 국제상업센터(International Commerce Center:ICC)는 홍콩에서 첫 번째, 세계에서 열세 번째로 높은 마천루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484m, 118층 높이의 이 건물은 임대료가 높기로 유명한 홍콩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임대료가 책정되어 있었다. 웬만큼 자산을 가진 기업이 아니고서는 감히 국제상업센터 입주를 꿈꿀 수도 없었다.
돈이 있다고 해도 입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산홍게이지산개발유한공사(新鴻基地產發展有限公司)는 70층부터 99층까지의 고층부를 국제상업센터라는 건물명에 맞게, 도이체방크나 모건스탠리 등과 같은 대형 글로벌 벌지 브래킷(Bulge bracket)에 게만 문호를 개방했다.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 홍콩에 진출한 벌지 브래킷 지사의 대부분이 국제상업센터 완공과 함께 까우룽 반도로 모여들었다.
아시아 진출을 선언한 미국계 보험사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도 아시아 헤드쿼터 설립을 위해 국제상업센터 78층과 79층에 입주해 있었다.
이날, 79층에 있는 회의실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미국 시애틀 본사의 보안감사부문 부사장이 아시아 헤드쿼터 설립 준비 과정을 점검하기 위해 직접 홍콩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고 해도, 긴장하고 있는 직원들은 부사장의 방문 사실을 알고 있는 일부 임직원 몇 명뿐이었다. 보안감사부문을 담당하는 부사장답게, 그녀의 방문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아시아 헤드쿼터 보안감사부서에서 과장(Manager)직을 맡고 있는 마리 H. 스완슨이 부사장의 방문을 알고 있는 몇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마리 H. 스완슨은 79층 회의실 밖에서 부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임무는 부사장의 홍콩 출장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보필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현지 임시 비서라고 할 수 있었다. 출장 기간 동안 부사장의 일정을 조율하고, 식사나 부사장이 머물 호텔 예약 등 부사장을 에스코트하는 일이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렇기에 마리 H. 스완슨은 회의실 안에서 지사 설립 진행 상황에 대해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 아시아 헤드쿼터 임원들에게 보고를 받는 부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실의 문이 다시 열린 시간은 부사장과 임원들이 회의실로 들어가고 두 시간 가까이 지나고 나서였다.
열린 문으로 제일 먼저 모습을 보인 사람은 차가운 표정의 부사장이었다. 그 뒤로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임원들이 서 있었다.
회의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은 부사장과 임원들의 표정에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른 직원들처럼 긴장한 표정을 한 마리 H. 스완슨도 차가운 얼굴의 부사장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수고하셨습니다.”
마리 H. 스완슨이 부사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회의실에서 나온 부사장은 차가운 표정으로 마리 H. 스완슨을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그녀에게 건네주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방을 받아 든 마리 H. 스완슨은 재빨리 부사장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사무실로 가시겠습니까?”
30cm 뒤에서 따라 걷는 마리 H. 스완슨이 부사장에게 물었다.
“아니.”
얼굴만큼 차가운 말투로 대답한 부사장은 계속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부사장과 함께 회의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중국계 중년 남자, 내년에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 아시아 HQ의 신임 지사장 내정자가 빠르게 부사장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 어디로 가시려는…….”
“잠시 바람을 좀 쐬고 싶군요. 제가 허가를 받아야 하나요?”
부사장이 날카로운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말투보다 더욱 날카로웠다.
“아니,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부사장님.”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물러서면서도 마리 H. 스완슨에게 눈빛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떻게든 부사장의 기분을 풀어 주라는 암묵의 지시였다.
마리 H. 스완슨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계속 부사장 뒤에 따라붙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지부장 내정자를 비롯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부사장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졌고, 엘리베이터라는 밀폐된 공간 안에는 부사장과 마리 H. 스완슨, 단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부사장의 시선이 옆에 서 있는 마리 H. 스완슨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그녀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잘 어울리네. 그 옷. 이쁘다.”
부사장이 말했다.
“그래요? 잘 어울려요?”
마리 H. 스완슨이 인터넷 쇼핑몰의 모델처럼 살짝 팔을 벌리며 말했다.
적당히 밀착된 아이보리색의 원피스가 아름다운 몸의 라인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리 H. 스완슨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긴장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살포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응. 이쁘네. 잘 어울려. 어디서 산 거야? 앤에게 사다 줄까? 어울릴지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던 부사장, 신시아 챔버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울릴 거예요. 하지만 앤은 저하고 취향이 달라서 아마, 사 줘도 입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마리 H. 스완슨, 미국에서는 규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그녀, 완이 조금 더 환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이. 제일 예쁜 나이니까, 좀 예쁘게 입고 다니고 그러면 좋을 텐데. 맨날 청바지에 후드티만 입고. 잔소리를 해도 듣지를 않으니.”
신시아 챔버의 투덜거림에 완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신시아 챔버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참 아름다운 웃음이라고,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웃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는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봐요.”
완이 물었다.
“응? 아니. 뭐 그럭저럭.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그랬는데.”
“근데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셨어요?”
“아, 뭐. 그냥. 뭐랄까. 재미없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까. 무의식적으로 표정이 굳었는데,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거 보니까, 그게 또 재미있고 그래서.”
“너무하셨어요. 다들 얼마나 떨었겠어요.”
“너무하기는. 처음부터 분위기를 제대로 잡아 놔야지, 안 그러면 자기 회사라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니까?”
“어머. 그 말씀은 진짜 부사장님 같았어요.”
“부사장님 맞지. 내가 이 회사에 청춘을 바쳤는데.”
“저는 그런 모습은 못 봤으니까요.”
“그래서 마리 과장님은 실망했어요?”
“아니요. 좋아요. 멋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완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신시아 챔버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건강하게 자란 아이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미소를 짓는 완을 보면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회사나 조직이 지정한 남자들에게 접근하고 친분을 쌓고 잠을 잤어요.
방 한쪽에 커다란 특수 유리가 있는 사각형의 살풍경한 공간에서 완과 마주 보던 그날.
CIA와 같이 일하겠다고 결정을 내린 완과 처음 CIA 요원의 자격으로 인터뷰를 하던 그날.
그녀가 MSS 17국 소속이었음을 처음 밝힌 그날.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하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렸다.
신시아 챔버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그녀의 미소와 그 표정이 어쩐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슬픈 기분이 들었다.
살짝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억지로 끌어 올리기 위해, 신시아 챔버는 톤을 살짝 끌어 올린 목소리로 말했다.
“뭐, 아주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야. 어쩔 수 없이 초반에는 중국인을 지사장에 앉히기는 해야 하겠지만, 나중에는 본사에서 사람을 보내야겠지. 아니지. 그냥 지금부터 규가 지사장을 맡을래?”
신시아 챔버가 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요?”
“응. 많이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저 사람들보다 규가 더 잘할 것 같아. 규가 지사장을 한다면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연봉 협상을 다시 해야겠는데요.”
완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지금 연봉에 두 배 줄게.”
“지금 제 연봉요?”
“아니. 지사장 연봉.”
“그러면 거절할 수 없겠는데요.”
“아니지. 그건 안 되겠다. 규를 다시 미국으로 데려가야 하는데, 여기에 둘 수 없지. 설립 초기라 일도 엄청 많을 텐데.”
그녀의 말에 완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규라고 불러 주시네요.”
“응?”
“전화할 때는 마리라고 하시더니, 지금은 규라고 불러 주고 계세요.”
“왜? 불편해?”
“아니요. 좋아서요.”
“미스 스완슨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는 규라고 부르고 싶네. 솔직한 심정이야.”
“저도 그게 좋아요.”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맞추고 서로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홍콩 국제상업센터의 고층부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머다이나 챔버가의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나저나 호텔은 자기가 예약한 거야?”
신시아 챔버가 물었다.
“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어제 홍콩에 도착한 신시아 챔버의 숙소는 도버아메리칸 인슈어런스와 같은 건물, 국제상업센터에 있는 ‘호텔 리츠칼튼 홍콩’이었다.
국제상업센터 102층부터 118층까지를 객실로 사용하는 리츠칼튼 홍콩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6성급 호텔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마음에 안 들지. 어느 누가 일터와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자고 싶겠어. 엘리베이터만 타면 바로 갈 수 있잖아. 그리고 그거 말고도. 어떤 바보가 그 호텔을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높아도 너무 높잖아.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어제 자는데 흔들흔들하는 느낌을 받았다니까.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잠을 자기는커녕 들어가지도 못할 거야.”
신시아 챔버의 객실은 117층에 있는 프리미어 이그제큐티브 스위트룸이었다. 최상층인 118층이 라운지였으니, 신시아 챔버는 어제 홍콩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잠을 잔 것이다.
“고소공포증 없으시잖아요.”
“있었어. 비행기를 하도 타고 다니니까 적응한 거지. 객실은 규가 예약한 거야?”
“아니요.”
완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회사의 높은 분들이 예약했다는 의미로.
“난 이해를 못 하겠어. 중국인들은 왜 그렇게 높은 곳을 좋아하는지.”
“위에서 내려다보면 우월감을 느낀다고 하더라고요.”
“높은데 서 있다고 우월감 느낀다는 게 더 이해가 안 간다니까. 그리고 나는 시애틀 사람인데, 불의 고리에 포함된 도시에 살고 있는데 말이야. 당연히 낮은 곳을 선호할 것이라고 왜 생각을 못 하는 걸까?”
“가장 비싼 객실을 잡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숙소를 잡으라고 할까요? 아니면 우리 집으로 오시는 것도 괜찮고요.”
완이 말했다.
“그래. 그게 좋겠다. 규가 싫지만 않다면 나는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아.”
“싫을 리가 없죠. 그런데, 우리 집도 높아요.”
“얼마나 높은데?”
“26층요.”
“117층 스위트룸보다 26층 규의 거실 소파가 더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
“소파는 안 돼요.”
완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 하나는 드레스룸으로 쓴다고 안 했어? 그럼 둘이 껴안고 자자고?”
“큰 침대 샀어요. 껴안지 않아도 편하게 잘 수 있어요.”
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시아 챔버는 뭔가 알 것 같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혼자 사는 아가씨가 왜 큰 침대가 필요했을까?”
“세상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완이 능숙하게 신시아 챔버의 농담을 받아넘겼다.
그때, 알림음이 울리며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멈추었다.
문이 열리며 1층 로비의 모습이 보였다.
“차 한잔하실래요? 작고 조용하지만 좋은 찻잎을 쓰는 집을 알아요.”
완이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음을 디디며 말했다.
“말 돌리지 말고. 어디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생긴 거야?”
그렇게 말하며 신시아 챔버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걸어가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는 발을 멈추었다.
옆에서 같은 속도로 걸어왔어야 할 완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신시아 챔버의 고개가 돌아갔다.
완이 옆에 없었다.
고개를 조금 더 돌리자, 두어 발자국 뒤에 발을 멈춘 채로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의 얼굴에, 두 눈에 놀라움이라는 감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신시아 챔버의 고개가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완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6피트 정도의 키, 옷 너머로도 알 수 있는 근육질의 체형, 어딘가 서글서글하고 눈매가 부드러운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도 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남녀가 서로를 보고 있었다.
신시아 챔버 옆으로 완이 스쳐 지나갔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그 남자에게 다가간 완은 남자의 두 발자국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구나.
신시아 챔버는 로비에 서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CIA에서 스튜(Stew)라는 코드명을 부여한 바로 그 한규호라는 것을.
“오늘 밤도 117층에서 자야 되겠네.”
신시아 챔버가 중얼거렸다.